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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교적 신앙 (행 7: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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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행1:8절 [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 있은 후
행1장에서 7장까지 예루살렘에 복음 전파를 시작으로,
8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전파,
13장부터는 복음이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그런데 그 전환기가 되는 시기마다 순교자의 피가 있습니다.
7장에 스데반 집사, 12장에 야고보 사도가 순교합니다.
주의 종들이 순교할 때
그도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지만
이 땅에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불꽃이 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면에서 초대교회 첫 순교자
천사의 얼굴을 가진 스데반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대표하는 한 모델이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수준과 기준을 결정해 주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지금 스데반은 자기를 모함하고 위증하는 사람들 앞에 서서
공회의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스데반은
위기를 설교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설교의 결과는 청중들이 이를 갈며 큰 소리를 치며
귀를 막고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쳐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공회 앞에 설교한 설교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증인들의 말을 들은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사실 신문을 합니다.
7:1절 [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
즉 성전을 헐고 율법을 거스렸다는
증인들의 증언이 사실인냐? 라는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스데반은 변명을 하지 아니하고
진정한 성전에 대해 성경을 들어 설교를 합니다.
2-50절까지 그는 먼저 진정한 성전에 대해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네 시대로 나누어 설명을 합니다.
아브라함(2-8), 요셉(9-16), 모세(17-43), 다윗과 솔로몬(44-50))
이렇게 네 시대로 나누어 설교를 하는데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한 장소에 제한 받지 않는 <2>
어느 곳에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2절에 그는 아브라함이 아직 메소포타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으며,
9절에 요셉이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에도 그와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시는 분이 아니라
30-33절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땅인 미디안 광야에서
떨기나무 가운데에 모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곳은 이스라엘이나 성전이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또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을 짓게 하셨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건축물에 제한 받는 분이 아니다.
그 실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에
그 성전이라도 버리실 것을 경고하셨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성막이나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가 거하시는 곳은 어디든지 거룩하며 성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것을 증거합니다.
49절에
[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 상이다. ]
그러므로 어떻게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이 지은 건축물에 매일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분이 맺으신 언약에 따라
어디든지 그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성전 개념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와서는 거룩해 지고 집에서나 직장에서는 세속적인 삶을 산다면
지금 스데반을 죽이려고 하는 무리들과 별반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반응을 보고
스데반이 호되게 책망을 합니다.

스데반은 계속해서 율법을 무시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
공회에 앉아 자기를 심문하는 당신들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모세가 전해준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대로 거스렸으며, <3>
이를 바로 잡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모두 박해하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공회에 앉은 종교 지도자들과 장로들을 향해
당신들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여
항상 성령을 거스리며 당신들의 조상들과 같이 의인을
핍박하고 박해하였다고 고발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세가 올 것이라고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죽인 살인한 자라고 책망합니다.
그들은 천사가 전해준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 라고 합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발언은 변호라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잡아죽인 유대인들에 대한 죄를 정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스데반의 논증은 끝났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이 펼쳐온 논리를 따라서 자신들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목이 곧고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인가를 말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할례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그들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지극히 논리적이고 그러나 비수와 같이 날카로운 말씀은
모인 기득권층들, 즉 산헤드린 공의회에 앉아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며 인생을 세속적인 즐거움 속에서 지내려 했던 사람들에게 강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스데반이 증거한 말씀은 자신들의 삶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치부와 자신들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거울에 담아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앞서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던 사람들처럼
마음에 강한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찔림을 받기는 받았으되
그 찔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스데반의 말을
당시 공회원들과 헬라파 유대인들에게만 하는 책망으로 돌린다면
우리 또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나 자신을 발견해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혹 나의 신앙도 오래 하다보니 <4>
마치 고무 풍선에 바람이 빠져버리니 날지도 못하고 땅에 내려앉지도 못하는
복음의 감격도 없이 형식과 체면에 메여 교회 생활만 하고 있지 아니하는지?
주여 오늘도 나의 목이 굳어지지 아니하고 부드러워질 수 있도록
나의 마음과 귀에 성령으로 불세례를 주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
이렇게 하늘로 호흡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경우는 더 악합니다.
이들 역시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에 찔렸다는 말은 말씀을 잘 들었다는 것입니다.
건성으로 들어서는 찔림이 없습니다.
주목해서 잘 들어야 마음에 찔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면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가는 것입니다. 귀를 막는 것입니다. 더 이상 안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에 있는 양심은 찔림을 받아서 견딜 수 없이 아픕니다. 그러니까 귀를 막고 달려들어서 자신에게 찔림을 안겨준 원인을
제거해 버리겠다고 달려듭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자신의 양심이 죽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행2:37절의 경우를 보면
이 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똑같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원망하거나 귀를 막고 달려들지 않고 [ 형제들아 어찌할꼬? ] 하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찔림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찔림을 받았으면
화를 내거나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
사단이 마음을 주장해서
말씀에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은 회개하는 마음과 근신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을 돌이키고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당당하게 설교할 수 있는 배경이 무엇이겠습니까?
스데반이 목이 곧은 공회원들와
성난 군중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55절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천사의 얼굴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5>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한 후부터 세상을 바라보고 산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는 하늘로 호흡하면 신앙생활 했던 것입니다.
이제 스데반 집사는 생명이 경각간에 달려 있는 죽음의 위기를 느끼면서 그의 눈은 성난 군중들이나, 말씀에 찔림을 받고 이를 갈고 있는
죄악된 군상들에게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스데반이 끝까지 마음의 안정을 잃지 않고
천사의 얼굴로 증거하며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라본 것이 하나님 나라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서서 계신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그가 만약 세상을 바라보고 성난 군중들을 바라보았다면
그는 겁에 질린 초라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의미 있는 죽음,
평안한 죽음,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비결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느냐 만큼 중요한 것이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죽음, 평안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평생을 건강하게 사시다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얼굴로
하늘의 영광을 소망하며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일의 가족 여러분
영광스럽고 거룩한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우리도 마지막 시간에는 스데반처럼
[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
내가 탄 마차는 ~!
마지막까지 하늘 나라를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이런 스데반의 거룩한 모습과 감격의 말을
보고들은 군중들은 어떻게 행동을 합니까?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는 말은
마음에 <화살이 심장에 꽂혔다>는 말입니다.
정곡을 찔렀다는 말이지요.
말씀이 남의 말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에게 <6>
자신들이 죄를 지적하는 말로 들렸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강하게 지적하는 음성으로 들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에 찔렸으면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을 받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54절에 이들이 "이를 갈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듣고 그것이 나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으로 들리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혹시 목사를 향해서 이를 가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분명히 그 말씀이 성경의 확실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 쪽에서는 이를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아닙니까?
여러분! 이것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죄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돌로 쳤다고 했습니다.
모인 무리들 모두가 성령충만한 것이 아니라 악에 충만했습니다.
사단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고 돌이킬 기회를 사장시켰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악의 심리학을 보셔야 합니다.
마음의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고 귀를 막고
돌로 치는 과정들을 주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집단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들은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는데도
악에 충만해서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이들의
감정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들의 현주소요, 악에 물든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비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분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도 성품적으로 빗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얼마나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인정해야할 잘못들 앞에 직면하면 되려 화를 내고 큰 소리를 치고 심지어는 언어폭력, 물리적인 폭력까지 동원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안에 숨쉬고 있는 악입니다. 죄입니다. 죄성입니다.
이것을 바로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성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7>
58절에 청중들이 스데반을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세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고 합니다.
당시 율법에는 증인들이 먼저 돌로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은
스데반의 죽음에 사울이 주도적으로 행동했음을
누가가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누구입니까?
행9장에부터 나오는 사도바울이 아닙니까?
기독교 유사 이래로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제국을 확장해 나가는데
선구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의 출현이 스데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신앙적 교훈을 안겨다 주고 있습니다.
행8:1절에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던 바울은
후에 회심한 후 이 사건을 행22:20절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왜?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행22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들먹이는 것은
바울 역시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가 되어
자신을 연행하는 천부장 앞에서 변호를 하는 가운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변화되는데 있어서
첫출발이 바로 스데반의 죽음이라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데반이 모함을 받고 고난 당하고 멸시 당하고
거짓 증인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어 가는 것이
기독교 태동의 거대한 봉우리가 되는
사도 바울을 잉태하는 동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는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예수 믿는다고 욕 얻어먹고 억울하게 당하고 내쫓김을 받지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실패함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처형법에는 3m나 되는 높은 곳에서
죄인을 땅으로 떨어뜨려 죽지 아니하면
증인들이 먼저 돌로치고 청중들이 돌로 쳤다고 합니다.
증인들과 청중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돌로 치니
스데반이 마지막 죽는 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두 마디를 합니다.
6. 스데반의 마지막 죽음의 장면을 나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59-60절)
59-60절을 보세요
[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릂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첫 번째 [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 ]입니다. <8>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그 순간에
스데반은 주님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입니다.
스데반은 지금 죽음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정말 마음이 여유가 없는 사람은
남을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음의 임박한 순간에도
용서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죽음을 초월하는 신앙을 말해주며
그렇기 때문에 누가는 스데반의 죽음을
[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
그러나 잠 잔다는 것은 다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듯이
스데반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어
우리로 하여금 순교적 신앙에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한국교회 밑바닥에는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같은 순교자들의 피가 흘러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고자 하는
순교신앙을 따라 살려는 교인들이 있듯이
스데반의 순교신앙이 우리 내일교회에 성도들의 가슴과 삶에
살아역사 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많은 부분에서 주님의 처형사건을 따르고 있습니다. 거짓 증인에 의해 고소를 당한 점이나,
그 죄목이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점이나,
그가 죽을 때에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고
박해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외친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사건과 너무도 흡사하다.
이와 같이 스데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마지막 모습 속에서
살아 계셔서 함께하시는 주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자가
바로 신앙의 승리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오늘 스데반의 순교적 죽음을 통해 <9>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스데반은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가의 주된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가르친 교훈과 죽음을 통해
그가 기독교 선교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과 율법의 완성자라고 가르쳤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건물이나 전통에 묶여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건물과 전통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면
언제든지 그것을 폐하실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그의 교회와 함께 하신다.
주님은 약속대로 그의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그들과 함께 하신다 ] 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가르침은 박해를 야기시켰고
마침내 그는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죽음은 나중에 사울을 깊이 감동시켰고,
행8장에 빌립이 사마리아 전도를 하게 되었고
행11장에 이 때에 흩어진 교인들이
선교의 기지인 안디옥 교회를 설립하게 되며
행13장부터는 바울에 의해 세계 선교가 전개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선교 촉진을 위해 주님께서 준비하신 사건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사의 고대사나 근대사나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는
항상 순교의 피가 흐르며 순교의 신앙이 저변에 흐르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때에 만주 연길현에 종성동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은 함경북도 종성 사람들이 개척한 동리로
1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침례교회도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39년 11월 어느 날 해가 질 무렵,
공산당원들이 마을을 습격하여 교인과 동리 사람들을 예배당에 몰아 넣고는 불신자는 좌편에 교인들은 우편에 갈라 서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에 한씨 부인이 "나는 죽어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는 우열로 나서자, 너도 나도 60여 명의 교인들의 이에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자 공산당원들은 이 교회를 시무하고 계시던 김영진 목사를 끌어다가 완전히 옷을 벗겨 쇠사슬로 결박한 다음 교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면도날을 들고는 발목으로부터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칼을 목에 대고 "너 이래도 예수를 믿겠느냐?"고 욱박지를 때에
김 목사님은 [ 나는 예수 믿습니다. 나는 예수 믿습니다. ] 하며 <10>
[ 예수, 예수 ] 할 때에 공산당원들은 그의 생식기까지 잘랐습니다. 이때에 김 목사는 숨이 끊어지고 말았는데
독기가 오른 공산당원들은
"너희들도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이렇게 죽이겠다."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배교 하는 자 없이 모두 엎드려 울부짖어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김영진 목사 후임으로
종성교회에 부임했던 한기춘 목사가 중언한 내용인데
저는 이런 순교간증을 읽어면서, 만주 땅이나 북한 땅에
분명히 복음의 불길이 활활 타오를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순교적 신앙 -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맙시다.
일상생활 가운데 순교적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귀중한 은혜인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신앙은 생명을 거는 신앙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면 가장 큰상을 받습니다.
가장 성공한 자입니다. 가장 위대한 자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다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전도하다가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창피를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내가 교회 와서 예수 믿게 되어 좋은 교인을 만나서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것은 취직된 것보다 더 큰 축복입니다.
순교만 축복이 아니라 예수를 믿다가 당하는 모든 고난 환난 손해도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예배 드리러 왔다가 도둑 당하고 교통사고 당하는 것도 축복입니다. 예수 믿다가 당하는 모든 시련과 고난도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잘된 것도 축복이지만
예수 믿고 어려움 당하고 예수 믿다가 순교하는 것은 더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 영광,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신앙,
그래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신앙,
이런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복음의 역사와
하나님의 큰 축복이 풍성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
순교신앙으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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