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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놀라운 삶의 결단 (빌 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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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교황의 장례식이 지난 금요일에 있었습니다. 교황의 지위와 업적 때문인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세계 정상급 지도자 200명을 비롯하여 수백만 명의 신도가 참석했고, 수십 억의 세계인이 텔레비전을 통해 장례식을 시청했습니다. 대단한 장례식입니다. 영국의 찰스 황태자는 자신의 결혼식이 교황의 장례식과 겹쳐 하루를 연기했다고 합니다. 영국 왕세자도 보통의 지위가 아닌데 날짜를 바꿀 만큼 교황의 지위가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시작된 인류역사는 한마디로 기독교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반 이상을 천주교가 절대권위로 통치하고 다스렸습니다. 그 한 복판에 교황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하나님 다음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교황권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옛날 중세시대만큼 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전 세계의 어떤 지도자보다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교황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제 요한 바오로가 세상을 떠났기에 모두의 관심은 다음 교황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8일부터 본격적으로 교황선출을 위한 모임이 시작됩니다. 교황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선출됩니다. 교황을 세우기 위해 모이는 추기경의 비밀회의를 ‘콘클라베’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서 ‘열쇠를 가지고, 혹은 열쇠로 잠근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보는 것처럼 교황선출은 철저한 베일 속에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선출방법은 이미 공개가 되었습니다. 각국에서 모인 117명의 추기경들이 투표해서 3분의 2이상이 나올 때까지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 그렇게 어려운가’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후보 없이, 연설도 없이, 선거운동 없이 추기경들의 표를 모은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1800년에 있던 콘클라베가 역사상 가장 긴 투표였는데, 3개월 반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4일 이내 끝나는데 이제는 그만큼 교황이 살아있을 때 차기 교황후보를 물밑에서 정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변수가 많은 것이 교황선출이어서 이번에도 의외의 인물이 나올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콘클라베’는 한마디로 중요한 결정을 신중하게 선택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후회 없는 결정을 하고 존중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일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한마디로 결정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순간의 결정이 자기는 물론,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큰 변수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중요한 결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다메섹에서 놀라운 은혜로 주님을 만났던 바울이 다음에 취한 행동은 ‘결단’이었습니다. 그 결정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도중에 바뀐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그의 생애를 바꾸는 결단이었고, 그때부터 주님을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결단은 한마디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주님을 만난 뒤 버린 것이 무엇이고, 또 취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그가 버린 것을 보겠습니다. 5절에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자랑거리를 소개합니다. 여기에 보면 적어도 7가지가 나옵니다. 먼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유대인들은 할례의식을 통해 자기들이 특별한 사람인 것을 강조합니다. 지금 바울이 이 편지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고 있는데, 이방인이 중심이었던 그들에게 자신이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도 유대인들이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뿌리와 배경이 든든하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뼈대있는 가문이고, 배경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베냐민 지파라고 말합니다. 앞의 두 개는 유대인이면 모두가 가지는 자랑이었다면 베냐민 지파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큰 자랑입니다. 이 말은 곧 그가 왕족이라는 뜻입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함께 이스라엘을 주도하는 지파 중에 지파입니다. 그래서 자랑할만한 것입니다. 넷째로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히브리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과 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가나안을 떠나 흩어진 유대인들이 자기 말은 잊어버린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 영어와 한국어를 능통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2개 언어만이 아니라 그 외에 많은 언어를 소화한 사람입니다. 그는 문화적인 면에서, 언어의 영역에서 아주 탁월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당시 ‘바리새인’하면 모두 위선자요 외식하는 자로 알고 있지만, 그 시대에는 바리새인은 높은 지위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습니다. 사회적 엘리트, 부유한 계층, 기득권을 가진 자가 뜻입니다. 특히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서도 ‘가멜리엘’이라는 당대 최고 바리새인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엘리트중의 엘리트였다는 말입니다. 여섯째,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다고 말합니다. 교회를 핍박한 것이 왜 자랑인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 말은 그가 이론적인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옳다고 인정하는 것에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바리새인 중에서 이런 사람이 존경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합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결코 쉽게 쓰는 말이 아닙니다. 큰 자랑의 말입니다. 곧 이 말은 자기가 누구와 비교해서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어떤 지위나 권세와 부귀를 가진 사람과 견주어도 그가 손색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자랑거리를 그는 소개합니다. 특히 여기에서 그가 자랑한 것을 7가지로 열거한 것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7곱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완전수입니다. 그는 거의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남부럽지 않고, 가장 인생을 멋지고 호화롭게 살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주님을 만난 뒤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런 것이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내려놓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이런 것이 유익하기도 했지만, 적잖은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배설물로 여긴 것입니다. 버린 것입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요즘 같으면 여기에 열거한 것 하나둘만 가져도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살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을 믿는데 방해가 되자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믿는데 이것이 우선 순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은혜를 받고, 결단을 내리며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버릴 것을 버렸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심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것이 바울의 신앙입니다. 은혜를 받은 뒤에 그가 취한 마음의 자세요, 행동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임하면 반드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놀라운 주님의 은혜가 놀라운 삶의 결단을 하게 합니다. 바울과 같은 과정을 우리도 밟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반드시 버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면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옛날 습관, 모습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리지 않으면 신앙은 자라지 못합니다. 신앙의 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변화도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의지가 필요합니다. 과감한 결단과 헌신을 통해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 52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지어다” 이 말은 이제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받을 백성을 향한 말씀입니다. 포로기간동안 묻은 모든 이방의 더러운 때를 씻어 버리고 귀환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압니다. 내 양심과 내 속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주님을 믿고 더욱 또렷이 들립니다. 이제 우리가 거기에서 떠나야 하고 나와야 합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 결단에 평강이 있고, 은혜가 임합니다. 날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떠날 것은 떠나는 결단을 다짐하면서 주님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가 취한 것입니다. 바울이 버릴 것을 버린 것은 그냥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쓰레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버린 이유는 지금 버리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금까지 가진 것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하는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을 얻기 위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장 귀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랑을 버리고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육신을 버리고 영혼을 얻었습니다. 보이는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얻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하늘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결단입니다.

  그가 여기에서 주님을 얻은 뒤 취한 결단을 크게 2가지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추구한 것입니다. 8절에서 이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의 ‘지식’은 단순한 주님에 관한 정보나 역사적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경험하고 그분과 교제함으로써 얻어지는 체험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여기 ‘고상하다’는 말은 ‘견줄 것이 없다, 비교할 게 없다’라는 뜻입니다. 주님보다 귀한 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런 주님을 알아 가는 지식의 고상함으로 인생이 즐거웠던 사람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제임스 패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책에서 우리의 신앙을 여기에 묶어 놓는 것을 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창조된 것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삶에서 기쁨과 만족을 주는 최고의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요, 과정이요,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 비쳐집니까? 얼마나 주님을 알려고 힘을 씁니까? 예수님이 가장 귀한 분으로 여겨지십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분으로 발견하기 전까지 우리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라는 찬송이 우리의 심령에 파고들어야 합니다. ‘주님 외에 없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를 알아 가는 재미가 있습니까? 그분을 알아 가는 지식의 고상함에 마력처럼 끌리지 않습니까? 그분을 알면 나를 보고, 그분을 알면 인생을 알게 됩니다. 그분을 알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그분을 알면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분을 알면, 우리가 아무 것도 없어도 모든 것을 가지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7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그가 주님을 얻은 뒤 취한 두 번째 결단은 ‘예수를 향한 목표’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을 그의 인생에 가장 크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4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사람이 인생을 알고, 자기를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고, 어떤 길로 가야 할지를 아는 것보다 소중한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이것보다 큰 은혜와 축복은 없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한 목표를 가지고 오직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 목표가 복음을 위한 열정을 만들었습니다. 그 목표가 참 성도의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그 목표가 자기를 날마다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그 목표가 결국 그를 진정으로 성공하는 인생을 만들었습니다. 육체의 자랑거리로 그는 만족하지 못했고,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를 강권했던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를 존귀한 자로, 성공자로, 승리자로 만든 것입니다.

  헬라어의 '인간, anthropos'라는 말은 ‘위를 바라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특성입니다. 모든 동물은 밑을 봅니다. 그런데 사람만이 유일하게 위를 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은 땅엣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찾는 존재라는 것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위로부터 태어난 자들입니다. 위를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가장 크게 보여야 합니다. 자신을 한 번 보면 주님은 두 번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이기고 환경을 극복하고,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름이 낀 날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먹구름을 뚫고 위로 올라가 다시 구름을 보면 오히려 아름다워 보입니다. 독수리처럼 오르는 자는 문제도 아름답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위를 향하는 사람만이 정상에 오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해도 주님을 볼 때 힘이 생기고,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주님을 볼 때, 걱정과 근심도 이깁니다. 주님이 나의 중심이요 목표일 때, 진정 우리는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울은 놀라운 은혜를 받고, 놀라운 결단을 내린 사람입니다. 그의 결단은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한 것입니다. 이런 결단의 힘을 그는 본문에서 ‘예수께 잡힌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예수께 잡힌 사람, 주님의 포로가 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께 잡힌 사람, 주님의 포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 놀라운 삶의 결단을 내리고 행복한 삶, 승리의 길을 향해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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