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쁨이 가득한 교회 (빌 4:1-7)

  • 잡초 잡초
  • 535
  • 0

첨부 1


- 설교 : 문기태 목사

(빌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고아가 된 11세의 폴리에나가 단 한점의 혈육인 이모를 찾아옵니다. 이모는 40이 넘은 노처녀로 상속받은 많은 재산을 관리하며 저택에서 살지만 자기에게 맡겨진 조카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기대에 부풀었던 폴리에나는 이모 폴리 해링턴의 야박함을 원망하지 않고, 목사였던 아버지가 가르쳐 준 기뻐하는 게임을 합니다. 초라한 다락방에서 혼자 말합니다.
'옷장에 거울이 없어 기뻐요. 거울이 없으면 주근깨가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벽에 그림이 없어도 훌륭한 그림이 보여요. 작은 창문을 통해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으니까요. 이모님이 이 방을 내게 주셔서 기뻐요.'
부엌에서 빵과 우유를 먹으면서도 기쁨 놀이는 계속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어서 기뻐요. 낸시 언니와 함께 먹을 수 있어서 기뻐요.'
하인인 낸시가 폴리에나를 불쌍히 여기며 말합니다.
"아가씬 뭐든지 기쁘시군요."
"그건 게임이에요."
"게임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무엇이든 기뻐하는 게임이에요.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어요. 천도부인회에서 위문상자가 왔는데 열어보니까 제가 갖고 싶어하는 인형이 아니고 목발이었어요. 슬퍼서 울었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목발을쓰지 않아도 되니 기쁘구나.' 건강한 다리가 있어서 기쁘다는 것이었어요.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보람 있어요. 하지만 이따금 너무 어려워 도저히 안 될 때도 있어요. 작은 다락방에 넣어졌을 때 같은 경우에는요. 누구나 진심으로 찾아 보면 반드시 뭔가 기뻐할 만한 것이 있어요."

폴리에나의 기쁨놀이는 불행에 처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행복을 느끼게 해줍니다. 성격이 까다로운 이모조차 몰라보게 변하여 조카 폴리에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폴리에나의 중재로 헤어졌던 애인을 다시 만나 결혼하고, 교통사고로 걸을 수 없게 된 조카 폴리에나를 위해 재산까지 아낌없이 처분하며 최선을 다합니다.
폴리에나에게서 기쁨놀이를 배워 위로받았던 사람들이 절망에 빠진 폴리에나를 찾아와 위로해 줍니다. 폴리에나는 다시 기쁨놀이를 시작하며 희망을 갖게 되고, 의사인 이모부와 이모의 주선으로 큰 도시에 있는 유명한 의사한테 수술을 받고 걸을 수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미국의 주부작가 엘레나 포터가 1913년에 발표한 작품인데,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젊은 독자들의 동아리가 수없이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서의 주제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모두 기쁨이 가득하여 기쁨이 가득한 교회를 만들어 가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어버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이 그로하여금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주엇고 다른 사람들도 특히 자신이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던 빌립보교인들도 기쁨속에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16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븜을 잃어버린 교회가 많습니다. 경직된 자세와 굳어진 얼굴로 예배를 드리며 그것을 경건한 증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안에 많습니다. 교회안에서 사소한 문제로 서로 오해하고 섭섭해하며 서로 미워하며 상처를 주고 받으며 기븜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의무감과 감사를 잃어버린 마음으로 억지로 봉사하며 기쁨이 메말라가는 교인들도 많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린채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모여 있는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랫동안 즐거운 마음을 잊은채 살아가는 사람을 진정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에게는 지금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행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쁨을 나누어주고 싶어서 전도하며 다른 사람을 즐겁게 섬기려고 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며 우리 교회를 항상 기쁨이 가득한 교회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1. 주 안에서 든든히 서야합니다.(1)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이 주안에 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안에서 살아가면 기븜이 충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참된 기쁨은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안에는 언제나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안에서 샘솟는 기쁨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참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가질 수 있는 기쁨이 온전한 기쁨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할 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이 4절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씀은 결코 한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환희를 강조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왜 바울은 여기서 "주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이 표현은 본문이 시작되는 4:1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안에 서라"고 했습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이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라면 성도답게 굳게 서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 것입니다. 왜 "항상'이라는 강조를 했을까요? 지금 사도는 일관성있는 삶의 태도로서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은 우리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의 유연성있는 태도 곧 관용하는 삶의 여유 없이는 누릴수 없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경기도 성남에 아주 가난한 여집사님이 계셨읍니다. 그 여집사님은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어렵게 살아가는 분인데 직업은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는 분이었읍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인데도 매일 얼마나 기쁨과 은혜로 살아가는지 그분을 보면 곧 감동이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년에 수십명씩 그 집사님에게 감동되어 교회롤 오는 분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같은 환경에서 그렇게 기쁨과 감사로 살 수 있느냐고 감동하여 교회로 인도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느라고 애를 쓰는데 여집사님이 400만원을 헌금했읍니다. 목욕탕에서 번 돈으로 말입니다. 자, 이 분의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읍니다. 이것은 남편이 토닥거려주는 사랑도 아니요, 물질로 채워지는 기쁨도 아니며, 오직 성령이 주는 기쁨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그로써 그는 이같은 기쁨과 간증과 찬송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늘 샘솟는 삶의 비결은 외적인 조건이 충족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안에 든든히 서게 될때 가능합니다. 주밖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하고 누린다해도 진정한 기쁨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안에서만이 기쁨이 가득한 삶이 가능해집니다. 개인적으로 기쁨이 충만해지고 기쁨이 가득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주 안에 든든히 우리 자신과 교회를 세워갈 수 있어야 합니다.

2. 좋은 관계를 유지하야 합니다.(2)

우리들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가장 빈번한 이유는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한때 친밀한 인간 관계로 기쁨을 나누던 사람들이 사소한 문제로 갈등을 가지며 서로 상처를 입히고 등지게 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립니다. 평안, 위로, 행복 등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빼앗깁니다. 그중에서 우리안에 있는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손실입니다. 이것은 교회생활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때 교회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주의 일을 감당하던 교우들이 서로 외면하고 얼굴을 붉힐 때 우리는 교회생활의 보람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런 문제가 빌립보 교회내에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빌4:2을 읽어보십시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아마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내에서 헌신적으로 수고하던 두 여성 지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3절에서도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갈등을 빚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결국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의 마음에 충만하던 기쁨을 삼켜버렸고 빌립보교회 공동체에 상처를 남기고 모두를 근심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까지도 감옥에서 그 사실을 알고 근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5절에서 바울은 인간관계의 갈등의 처방으로 관용을 강조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관용'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부드러운 절제'라는 뜻입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싸움이 되지 않도록 자기 절제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관용하는 사람입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결코 경직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부드럽고 온유하여 이웃을 용서할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친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관용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말씀의 뜻을 두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주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오시는 날 우리가 주앞에 서서 심판을 받을 때 우리 자신이 무엇보다 주께 우리의 허물에 대해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그때 주께서 그러면 너는 너에게 필요한 관용을 얼마나 이웃들에게 베풀며 살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또 하나 가능한 해석은 우리가 죽어 곧 주님 앞에 서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동시에 우리의 인생의 결산의 날이라면 그날 부끄럼 없이 이웃들과 관계하며 살았음을 주께 보고하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간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에 앞서 먼저 '너는 내가 네게 맡겨준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는 삶을 위하여 우리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관용하는 삶의 자세를 보이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날마다 기쁨이 샘솟는 삶을 살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염려에 붙잡히지 말아야 합니다.(6)

인간관계의 갈등 못지 않게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있다면 염려거리들입니다. 본문 6절에 사용된 '염려'라는 단어는 본래 "마음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지고 찢어지면 걱정이 생깁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마음이 표류하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는 상태-그것이 바로 염려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염려들을 무엇으로 극복할수 있단 말입니까? 한마디로 그 성경적 처방이 기도입니다. 염려할 모든 것을 기도할 모든 것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냥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붙들고 간절하게 지속적으로 기도하다 보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염려는 극복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 그 자체는 전혀 상황을 바꿀수 없습니다. 일단 염려 그 자체를 중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6절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어떤 어머니의 아들이 군인으로 입대하게 되었는데 너무나 염려와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아들에게 이미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처럼 다른 아무 일도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떤 분이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댁의 아들은 앞으로 둘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후방에 배치되거나 전방에 배치될 것입니다. 후방에 배치되면 별로 염려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고 전방에 배치되면 조금은 염려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전방에 배치되어도 둘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전방에서도 안전한 곳에 있게 되거나 위험한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안전한 곳에 있게 되면 물론 염려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위험한 곳에 있게 되면 조금은 염려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곳에 있게 되어도 둘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부상당하거나 부상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상당하지 않는다면 염려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부상당하면 물론 염려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부상당해도 둘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회복되거나 회복되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회복된다면 염려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댁의 아들이 죽는다면 더 이상 염려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용없는 염려랑 하지 마시지요"이렇게 말했답니다. 염려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염려대신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가 상황을 바꿀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할 때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다시 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7절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이런 상태를 일체의 물결이 잔잔해진 고요한 호수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호수앞에 서면 호수 깊은 곳까지 다 들여다보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한 마음이 그렇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더 이상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잘 판단할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지혜로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게 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이 이렇게 기쁨이 가득해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였기에 기쁨을 회복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디에 살든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에 그가 있는 곳이 천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기에 교회를 기쁨이 가득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참 기쁨으로 가득찬 공동체로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럴때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는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기쁨이 충만한 집으로 만드는 일에 여러분 모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