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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섬김 (창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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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원호성 목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먹고 사는 의식주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상품보다 서비스로 경쟁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이유로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합니다. ‘서비스’란 말을 교회 용어로 바꾼다면, 아마 섬김이란 말이될 것입니다. 굳이 현대 사회의 변화 추세와 비교할 필요 없이 원래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의 섬김을 통해 진정한 기쁨과 감격, 그리고 행복을 주어야 할 분명한 목적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교회의 시작이자 터전이 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전 생애를 통해 최선의 섬김을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또 한 사람의 섬김의 모델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에 근거해서 진정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교회와 또 우리들 각 사람의 섬김의 자세는 어떠한지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진실해야 합니다.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진정한 선지자란 평판을 받았던 Aiden Wilson Tozer(1897-1963) 목사님의 저서인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는 중간자적인 삶을 살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영적인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진실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었느냐 하는 양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느 한 사람에게 하더라도 얼마나 진실하게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부족을 대표하는 족장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지위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행색으로 보아 영락없는 나그네들에 불과한 사람들을 자신의 장막으로 들여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생면부지의 나그네들을 마치 주님을 대하듯 대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한 립 서비스로 친절만을 베푼 것이 아니라 저들을 진심으로 선대하는 섬김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데, 바로 본문 2절의 ‘몸을 땅에 굽혔다’란 대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오직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사람이건, 전혀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이건 간에, 누구를 막론하고 단지 입술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주님을 대하듯 진심으로 섬김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감동이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나그네들에게 감동을 주는 섬김이었습니다. 본문을 유심히 보면, 아브라함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그 마음까지 세밀하게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나그네들로 하여금, 깨끗이 씻을 수 있도록 물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긴 여행길로 인해 고단해진 몸을 편히 쉬도록 배려합니다. 이후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내 입장, 내 관점에서 상대방을 섬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고,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파악하고, 바로 그것을 제공함으로써 나그네들의 마음까지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섬김, 그리고 우리 교회의 섬김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라도 자기 위안, 자기만족을 위한 섬김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사람의 마음까지 감동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입장과 생각, 교회의 입장과 관점을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과 생각, 그리고 관점의 편에 겸허히 설 때에 비로소 감동을 선사하는 섬김을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이 보여준 섬김의 진실함과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는 섬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섬김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아브라함의 섬김의 태도를 보게 됩니다.

본문 5절의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의 말씀은 아브라함 자신이 나그네들의 종이기를 자청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전까지 보여준 아브라함의 섬김도 대단한 것인데, 이제는 저들의 종이 되기를 자청 한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길가는 나그네를 섬기는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한다면, 선뜻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눅 5: 12에 보면, 예수님이 한 문둥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면서 그의 몸에 손을 대신 치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씀만으로도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 구태여 진물과 고름투성이의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하찮은 노예(종)나 하는 일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든 육신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철저히 소외된 채로 살아온 그의 상처 입은 영혼까지도 긍휼히 여기시고 완전한 치유를 이루시기 위해 문둥병자의 종이 되길 자청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먼저 친히 사람의 종이 되어 이 땅에 오시어 썩은 냄새가 나고, 죄악에 물든 사람들 가운데 오셔서 저들의 종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는데,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어찌 사람의 종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의 종이, 아내의 종이, 자녀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 동료의 종이, 이웃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특별히 새신자와 초신자들의 종이 되어야 하며, 교회안의 교회안의 노약자들,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 그리고 청년과 청장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민족과 사회 안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마치 농부와 같습니다. 생명을 심고 자라도록 하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농부처럼, 일상에서와 교회에서 최선을 다해 허리 굽히는 섬김을 다할 때에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는 생명의 열매까지도 풍성히 거두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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