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요 20:21~29)

  • 잡초 잡초
  • 545
  • 0

첨부 1


- 설교 : 김명섭 목사

  희망의 달 4월을 맞이했습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춥고 힘들었던 겨울이 지나고 새싹이 움트고 만물이 생기를 발하는 화창한 봄날을 맞이했습니다. 새롭게 4월을 맞이한 성도 여러분의 삶속에 우리 주님이 주시는 복된 소망들이 넘쳐 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주일을 지낸 지 1주일이 되는 부활절 후 첫째주일입니다. 교회력으로는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40일간을 부활절기로 지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마음의 질병 중의 하나가 의심이라는 병입니다. 금방 보기에는 의심이 별로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사실 미움과 증오, 살인 같은 무서운 죄가 의심에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가정불화의 가장 큰 원인도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함으로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의처증, 의부증 이라는 정신적인 질환도 의심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요즈음 병원에서는 친자 확인 검사가 유행한다고 합니다. 침이나 지문에서 DNA를 추출하여 간단한 방법으로 유전자를 확인하는데 부부사이에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자녀가 어느 날 의심이 들면서 내 자녀가 맞나? 고민하다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서로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의심은 사단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무기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의심이라는 병에 걸리면 그때부터 기도도 잘 안되고,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인 관계에도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므로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선교초기에 만주일대를 돌아다니며 교회를 순회하는 채필근 목사님이란 분이 계셨습니다. 가끔 선교부의 돈을 가지고 각 교회에 나눠주고는 했는데 한번은 돈을 잔뜩 넣고 순회하는 도중에 외딴 곳에 이르러 객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손님들로 방이 차 있어서 한 방에 낯선 사람과 함께 둘이 묵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저 놈이 내가 잠든 사이에 돈을 훔쳐 달아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뒤척거리고 있는데 옆에 누운 사람도 마찬 가지로 잠을 자지 않고 뒤척거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세우고난 다음 날 아침 주인이 차려다 준 상에서 겸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은 할 수 없이 서로 마주 앉아 식사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주 앉았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예수 믿는 어른입니까?” 해서 “네, 저는 채필근 목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 “저는 모 교회 장로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밤새도록 서로를 의심하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마음은 사단에게 노출되기 쉬우며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염려와 근심에 휩싸이게 되고 세상을 이길 능력을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드린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도마의 신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인데 그 이름이 불리울 때 사람들의 머리에 어떤 일들이 떠오르냐는 것은 그 사람의 일상생활의 결과인 것입니다. 본문의 주인공 도마는 주님이 부활하시고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실 때 혼자 어디론가 나갔다가 주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돌아와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고 하자 그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그 후 도마는 의심쟁이, 실존주의자, 회의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8일 만에 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에 주님이 그 가운데 들어오셔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시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도마가 온전히 굴복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 속에서 그의 거만했던 고집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내려오는 전승에 의하면 그 이후 도마는 인도에 선교사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주일 전 부활주일을 보낸 우리도 부활신앙이 식어지지나 않았습니까? 부활하신지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에게 주셨던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고백하면서 믿음을 회복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째로,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요한복음14:6)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고(요한복음11:25~26)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 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니까 도마는 그들을 비웃었습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회의주의자입니다. 그는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도마와 같은 사람을 다른 말로 실증주의자라고도 부릅니다. 결코 얼렁뚱땅 어설프게 넘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자기가 의심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분명해 질 때까지 확신을 같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도마야말로 매우 정직한 사람입니다. 그의 태도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설프게 ‘무조건 믿습니다’ 하는 신자보다는 정직한 의심은 거쳐서 확신에 이르는 신자가 훨씬 더 훌륭한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눈에 들어오고 느끼는 것들이 실상이 아닌 허상일지 모른다”고, “노랗게 보이는데 실은 노란 것이 아닌 파란 것인데 누군가의 장난으로 내가 노랗게 보고 있는 것뿐”이라고, “파랗게 보이는데 내 인식 체계가 감각기관이 잘못되어 파랗게 보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데카르트는 고민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확실한 것, 정말 확고한 사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을 하다 보니 한 가지는 확실해졌습니다. 그것은 세상 만물을 의심하는 자신은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I think, therefore I a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입니다.

  그러나 도마의 경우는 내가 믿지 못 하는 이유는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에 보면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 한지라”고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가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왜 유독 도마만이 그 자리에 없었겠습니까? 그는 예수님이 참혹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어디론가 가서 깊은 슬픔과 걱정 속에서 방황하였던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제자입니다. 요한복음 11:16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유대로 가시려고 할 때 다른 제자들은 머뭇거리고 주저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이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도마는 용기 있는 신앙인입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하던가, 보지 못한 것들을 보았다든지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의심할지라도 확실한 것을 받아들이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요한복음14:4~5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지라”고 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길을 모르면서도 감히 그 누구하나 물어 볼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달랐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까?”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직한 회의, 양심적인 의심은 신앙생활에 나쁜 것이 아닙니다. 즉 이해를 구하는 신앙이 되어야지 맹목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신앙은 주님께서 말씀하셨기에 믿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어떤 분은 꿈에 또는 기도 중에 환상으로 예수님을 보았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예수님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나의 구주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삶을 주장하고 계시며 저 천국 까지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신앙은 성경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지금 나의 사건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마와 같은 회의적인 믿음에서 탈피하므로 말씀을 믿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 째로,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에 보면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도마는 예수님의 손에 박힌 못 자국과 옆구리에 깊이 패인 창 자국을 직접 자기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의 처절한 상처를 확인하자 도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는 귀한 고백 이었습니다. 의심이 컸던 도마였기에 그의 신앙고백도 그 만큼 크고 철저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벤허>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벤허는 미 육군 퇴역장군인 왈레스 (Lew Wallace) 라는 소설가가 쓴 작품을 영화화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왈레스가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는 아주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친구인 봅 잉거솔 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만약에 당신이 성경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명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예수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왈레스는 예수를 반박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왈레스는 반 기독교도이며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소설을 쓰기 위해서 예수를 알아야 했고 예수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했습니다.

  그런데 왈레스는 성경을 읽은 지 2년쯤 되어 예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조롱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my lord and my god..." 후에 그는 “나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내 책의 중심이 되었고, 내 마음의 중심이 되었소“라고 고백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유명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벤허의 마지막 장면은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약한 상태에서 바라보았던 도마! 그가 예수님의 못 박히신 손과 옆구리를 보는 순간 그의 완고했던 고집과 교만이 다 깨어져 버렸습니다.

  마틴루터는 일찍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인칭 단수의 my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주님이요, 인류의 구주로 말하는 것과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구주로 말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 자신의 구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체험해서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남군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죤 고든(John B, Gordon)이 상원 의원직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상원의원직을 위한 지명 투표가 있는 날, 한 때 고든 장군 밑에서 일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장군의 정치적 입장을 반대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고든 장군이 상원의원이 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서명 투표가 있는 날 이 남자는 얼굴 표정이 일그러진 채로 고든 장군의 지명을 반대하는 표를 가지고 단상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단상에 앉아 있는 고든 장군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 얼굴은 그 옛날 잘 생긴 고든 장군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흉측해진 얼굴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 남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고든 장군을 반대하려는 입장을 즉시 바꾸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고든 장군을 반대해선 결코 안 돼! 나는 고든 장군을 지명하는 투표를 던져야만해!” 그런 뒤 이 사람은 고든 장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장군님의 얼굴에 깊이 패인 상처를 잠시 잊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마가 예수님의 손바닥에 깊이 패인 못 자국을 만져보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참혹하게 일그러진 창 자국을 만졌을 때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도마처럼 내 대신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의 상처를 기억하며 그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약한 상태에서 바라보았던 도마! 그가 주님의 못 박히신 손과 발, 옆구리를 만지는 순간 그의 완고했던 고집과 교만이 다 깨어져 버렸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는 고백 속에 진정한 자유가 주어졌으며 그 이후 주님에 대한 섬김이 대단 해졌습니다 그가 주님께 온전히 굴복하므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 째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25절 말씀에 도마는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고 보고 듣고 만질 수 있어야하는가? 입니다 그러나 또한 내가 일이 잘 되어야 만이 내가 기도하는대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어져야 만이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참 신앙은 내가 실패하였을 때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으며 고난 중에 있을 때 그 신앙은 더욱 빛날 줄로 믿습니다. 참된 신앙은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 보이고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믿음만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파스칼은 “믿음이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쓰시기 어려운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믿음 대신에 자꾸 다른 것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식을 내세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어떻게 죽은 자가 되살아날 수 있는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분은 자기 경험을 내세웁니다. 예전에 다 해 보았는데 입니다. 또 어떤 분은 자기 생각이 중심이 되어서 자기 생각만을 내세웁니다. 그래서 내 생각에는 하다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상식도, 경험도, 자기 생각도 아닌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 지식, 내 경험, 내 생각, 내 능력을 뛰어넘는 줄 믿습니다. 참된 믿음은 전적으로 주님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중 30%인 6천만 명이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 국가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해 아시아 최대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제일 큰 교회가 수루바에 있습니다. 예배당 좌석 수만도 2만5천 석인데 그 교회 목사님인 아브라함 알렉스 목사님의 간증이 있습니다.

목사님 가정에 뇌성마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연약한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지만 목사님 가정에 그런 아이가 태어났다고 이슬람교도 들이 비웃는 손가락질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믿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된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 바라보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매일 기도하기를 한 달, 두 달, 석 달...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리라“고 하면서 넉 달이 지났을 때 아침에 기도하러 방에 들어갔더니 아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나 앉아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목사님은 제한이 없는 하나님의 능력, 한계가 없는 믿음의 능력을 힘입어서 한없는 축복과 기적 속에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도마의 신앙고백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회의주의자, 의심쟁이 도마를 찾아와 만나주신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만나 주시므로 참된 믿음을 회복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