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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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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영복 목사

“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인류 역사의 가장 큰 사건 세 가지를 말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사건(성육신)과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죽었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건, 부활의 사건입니다. 특히 그 중에 부활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모든 것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다시 산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희망이 넘치는 이야기입니까?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사람의 머리도 점점 더 명석해지지만 그런 것들이 이 세계를 희망적인 세계로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더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음을 볼 때 정치나 과학을 통해서 생명의 소식을 듣기는 어려워 진것 같습니다. 결국 이 세계는 기독교의 부활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어디서도 희망과 생명의 복음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절망의 깊은 밤이 오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세계를 향하여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라고 힘써 외쳐야 하겠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이적 가운데 최절정이요, 가장 중요한 이적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이적 7번째이고 예님의 지상생에 마지막 주간 바로 직전에 있었고, 분량도 제일 많고 열매도 크기 때문입니다.

이 7가지 이적은 예수님의 구주이심을 완전히 시각적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건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모든 인간의 절망을 십자가를 통하여 극복하신 후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 곁에 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깊은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들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뵈옵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그들에게 다가오신 부활의 주님을 알아 뵈옵지 못한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이 세계가 안겨 준 절망으로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이 생명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을 뵈옵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왜 주님을 알아 뵈옵지 못했을까요? 그러던 눈이 가려진 제자이 또 어떻게 주님을 뵈옵게 되었을까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그의 말씀을 들었고, 그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으며, 그의 인격과 온후한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때 예수님을 통하여 희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가 보여주신 어떤 가능성은 절망의 밤을 헤매던 제자들에게 있어 그것은 큰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시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배반당하시고 체포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임을 당하시자 그들은 전보다 더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시면서 그들의 희망도 함께 묻히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난 어느 날, 두 사람은 엠마오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저희와 함께 동행하셨으나 "저희의 눈이 가려져서" 주님이신줄 알아 뵈옵지 못하였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간 제자들은 부활하신 분을 보면서도 그분이 예수신 줄 모르는 것은 아직도 그들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때의 처참하고 침울한 분위기였으며 아직도 분노와 의심으로 차 있었기 때문이었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날이 밝아왔다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두 제자가 이같이 실망의 나락에서 처음 나사렛 예수를 따라 희망에 부풀어 나섰던 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침울한 가운데 길을 가는 때, 그들에게 한 미지의 동행인으로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화제는 그 며칠 사이에 일어난 예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의 근심스런 안색을 읽으면서 부활하신 분은 "너희가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은 이야기가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면서 최근 며칠 사이에 거기서 된 일을 당신만이 모른단 말이요?" 예수께서는 "무슨 일이요?" 하고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접근해 오는 미지의 동행인을 두 제자는 "눈이 가리워져"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혹시 내가 그러한 삶을 살고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왜 눈이 가리워져 그렇게 가까이 모시던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을까요?

1) 그들의 마음이 절망과 좌절의 비통함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채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보이었습니다.

그들이 지녔던 그렇게 부풀었던 희망과 지금 맛보고 있는 쓰디쓴 좌절의 아픔 이외에 아무 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가까이 모시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저들의 마음은 몹시도 비통했던 것 같습니다.

저들의 비통함은 예수님에게 잘못된 기대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귀중히 여기는 성경을 바로 보고 메시아가 어떤 분인가를 바로 깨달아 알았어야 할텐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정치적 독립)’이라는 현실의 베일로 그들의 눈이 가려져 고난 당하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구속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 고난 당하는 메시아란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만 수난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의 메시아 기대를 제자들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만 보고 틀림없는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맥없이 돌아가시자 깊은 좌절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눈이 가려져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절망에 의해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지므로 해서 더욱 눈이 어두워졌던 것입니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떡과 잔을 통하여 자기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는 것을 상징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라는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잠시 후에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잘못된 기대에만 부풀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이미 예언했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밝히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깨닫지 못하므로 예수님의 죽음이 현실화되자 놀랐고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3) 제자들은 사흘이 지나 일어난 여인들의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소식을 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가능성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인들의 소식을 듣고 제자들 중 몇 사람이 가서 확인하고 온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 저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시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고난 당하여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전혀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일에 대하여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이들의 눈이 가려진 것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은" 탓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저들은 인간적인 욕심에 눈이 가리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하게 되었고, 성경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분명하게 지적된 사실조차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뜨고도 부활의 주님을 뵈옵지 못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잘못된 욕망으로 그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비밀이 밝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활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제는 밝혀질 것은 다 밝혀졌고, 드러날 것은 다 드러 났으며 전파될 만큼 다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버리지 못한 욕망으로 인하여 눈이 멀었고, 저들의 욕망으로 눈은 가려져 있습니다. 육이 죽어야 영의 삽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고,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죽이지않고는 영의 눈이 열려지지 않습니다.

2. 부활의 주님이 어떻게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까?

이렇게 미련함과 절망으로 눈이 어두워진 제자들을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함께 걸으시면서 저들에게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므로 저들의 눈을 밝혀주셨습니다. 눈이 밝아진 제자들은 비로소 부활의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저들의 눈을 밝혀 주셨을까요?

1)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절망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동행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긴 대화를 통해서 그들의 신앙의 문제를 해결 해주었습니다.(심방) 죽음을 통해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저들에게 나타나 저들과 함께하시므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구원의 섭리가 사실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후 40일 동안의 머무심은 제자들에게 있어 놀라운 은총의 기간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구원의 역설들이 한꺼번에 이해되고 믿을 수 있었던 은총의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고난과 부활의 사건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절망한 우리 곁에 항상 계셔서 우리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임을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 아시기를 바랍
니다.

2) 제자들과 함께 하신 주님은,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메시아는 영광 가운데 오셔서 신적인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갖고 있던 제자들에게, 메시아가 고난을 받아야만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믿을 수 있도록 나타나서 자세한 설명을 그에게 주십니다.(상담)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역설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고난은 제쳐놓고 축복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자기 안에서 관리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물을 대표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물을 대표하 실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그 만물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므로 만물이 받아야 할 죽음의 벌을 대신 하셨습니다. 이 대속함 없이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보통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온 인류의 죽음입니다. 만물의 죽음입니다. 죄를 범한 온 인류를 살리기 위하여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상하게 이런 사실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역설적인 비밀을 처음으로 듣게 된 제자들은 귀가 번쩍 열렸을 것입니다. '아, 이런 비밀이 있었구나' 라는 깨달음이 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비밀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 감상적으로만 바라보고 눈물만 흘려서는 진정으로 그 십자가가 간직한 구속의 비밀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세계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온갖 죄악을 이미 그 십자가가 소멸(消滅)하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가려진 눈으로, 부활의 희망은 보지 못한 채 절망의 밤을 헤매어 다닐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고난의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구속의 은총임을 깨닫고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3)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 하셨다고 하였습니다.(설교)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의미,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 위에 세운 구리뱀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사야서에 나타난 수난(受難)의 종이 누구를 가리킴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을 것입니다. 다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지만 예수님이 설명해 주실 때 저들은 그 속에 간직된 놀라운 구속의 비밀을 비로소 처음 깨달아 안 것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수 없이 보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들을 어느날 갑자기 깨달아 알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서 그 말씀을 들을 때 놀랍게 깨달음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구원의 역사의 주인 공이신 예수님 자신이 말씀들을 들려주실 때, 그들의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깨달음의 감격이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활의 빛에서 볼 때 비로소 모든 말씀들이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신약 성경을 통해서 구약 성경을 볼 때 비로소 그 모든 말씀의 비밀들이 밝히 드러나게 됩니다.

4) 끝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모시고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았을 때 손님인 그가 갑자기 떡을 가져 축사하시고 떼어 저들에게 나누어주실 때 저들의 눈이 밝아져 비로소 주님을 알아 뵈올 수 있었습니다.(성찬)

예수님은 말씀으로 저들의 절망으로 냉각되었던 마음을 뜨겁게 불을 붙여 놓으신 후 떡을 떼어 주시므로 저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던 일들을 하나 하나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마지막 만찬의 자리가 생각 났을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라고 하셨던 얼마 전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면서 그들은 비로소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미련하고 우둔한 제자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게 저들의 어두웠던 마음을 밝혀 주시고 저들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육신의 눈이 어두웠던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마음의 눈이 멀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므로 저들이 눈이 떠진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삶은 34절에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눅 24:34)고 확신에 찬 간증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부활한 주를 만난 삶의 내용은 어떤 것이 되엇습니까?

C. H. 도드라는 유명한 학자가 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자이긴 하지만 중생 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깊이 연구하면서 이렇게 유명한 말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부활신앙은 교회 안에서 막연히 생긴 믿음이 아니다. 막연히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부활신앙은 교회를 존재하게 만든 믿음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부활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이 지상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부활을 믿지 않는 것보다 믿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 가운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은근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니까 이런 주장을 하는 거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해? 다만 아내의 권유에 밀려 억지로 교회에 나오다 보니 약간 믿기는 하지만 그게 있을 법한 일이겠어? 그냥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존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사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내가 그러리라고 믿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가지고는 구원을 못 얻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놀랍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사는 삶이 되었습니다.

예수 처형을 목격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은 부활의 주를 만남 후,새로운 용기를 얻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동안 우리를 흔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모두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아도 우리를 흔드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평상시에 굉장히 믿음이 좋은 것 같아 보여도 어떤 때는 지진이 흔들리듯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무나 악하고 더럽고 예기치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앞날을 생각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확신을 가진 사람은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습니다.(고전 15장 58절)

2) 과거를 씻고 새 출발을 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도들은 부활한 주를 만난 후 숨고,무서워하고, 절망에 빠졌던 과거를 불식하고 새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새로운 출발을 하였습니다.

3) 참 생명을 발견한 삶을 사는 것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을 향하여 무덤에 갔으나 생명을 발견하였다. 시체가 있는 무덤을 향하여 올라갔으나 빈 무덤, 생명이 가득찬 부활의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4) 가치관의 전환이 이루어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삶에 있어서의 우선순위, 삶의 중요도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어진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만 왕의 왕이 되시는 것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살 동안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주의 일이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는 주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왕 한번 세상을 살 바에는 나를 구원해 주신 부활의 주님을 좀더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평범한 일상생활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내들이 집안에서 청소하고 자녀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등 자질구레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일들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의 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도 주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삽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영광 위에 살고 싶습니다. 우리 가정도 주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싶습니다.' 이런 기도와 함께 모든 일을 하면 그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직장에 나가서 아침부터 상관의 눈치를 봐가면서 하루 종일 견디는 것도 보통 스트레스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모두가 주님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와서 이렇게 하는 것이 죽지 못해서 하는 줄 압니까? 다 주님을 위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거예요. 여기서 벌어서 헌금도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벌어서 내 자식들도 키우고요. 다 주의 일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부활하신 주님을 향해서 항상 열려 있으면 내가 하는 평범한 일 모두가 다 주님의 일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참 부활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하면 일상생활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에 전심을 다하려고 노력을 한다는 것입다. 전도를 하는 일이라든지,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이라든지, 이 세상에의 불의를 견제하기 위한 어떤 운동을 하는 일이라든지, 교회 와서 봉사하는 일이라든지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이런 일에 전력을 다해서 열심히 하려고 시간 내고 마음을 바치고 애를 쓸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주의 일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이 온 우주의 주가 되시고, 장차 우주 만물 가운데 충만하게 되실 것을 믿는 사람은 그분이 기뻐하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의 일을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난 체험은 제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같이 부활한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오늘 우리가 가진 절망이 클수록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절망한 때일 수록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향하여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 때입니다.

오늘 이 절망적인 세계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부활 하신 주님뿐입니다. 냉각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실 분도 주님뿐입니다. 이제 이 부활의 주님께 소리 높이 찬양을 드립시다. 믿는 자는 예수와 같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반대의 길 밖에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영생의 길입니다 (히 1:20). 이 영생의 문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닫혔던 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에덴 동산에서 내어 쫓고 회전하는 불칼로 막았습니다 (창 3:24).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이 닫혔던 영생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예수님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의 표를 지니면 그 앞에 영생의 문이 열립니다.

우리가 분명히 믿기는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강림 하실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 우리 살아남은 자들이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리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며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확실히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에게 산 소망을 주시며, 믿는 자들에게 신앙의 확신을 주며, 인생의 새 출발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시고, 부활의 확신을 가지므로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여러분의 눈이 밝아져 희망에 넘친 새로운 삶이 여러분 속에 이루어지시기를 부활하셔서 이자에서 찾아오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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