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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관심, 우리의 관심 (행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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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무 목사

  철책선에서 근무하는 전라도 출신의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야간에 경비 근무를 서게 되었는데 그 날의 암호는 ‘열쇠’였습니다. 몸이 피곤했는지 그만 졸고 있는데 새벽 순찰을 도는 순찰장교와 맞닥뜨렸습니다. 장교가 대뜸 암호를 물었습니다. 졸다가 갑자기 깨어보니 ‘열쇠’가 생각이 안 나더랍니다. 그래서 “쇳대!”라고 했답니다. 장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다시 “암호?” 했더니 역시나 “쇳대!”라고 대답했답니다. 적군으로 오인 받은 병사는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는 죽는 게 너무 억울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쇳대도 긴데...” ^^
  오해가 불러온 사건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제 어머니도 쇳대란 표현을 많이 쓰셨습니다. 이것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을 해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보여 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도 오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을 보면 실은 동기가 좀 불순했습니다. 이기적이고 세속적이었습니다. 능력 있는 분을 따라서 우리가 한번 출세해 볼까 하는 숨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훌륭한 분으로, 때로는 메시야로 고백하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멋진 고백을 해도, 그분을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왕위에 앉을 것이고 그 때 우의정, 좌의정도 해보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서 모종의 다툼도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고, 너희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잘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고 며칠이 안되어 빌라도에게 체포당해서 심문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니 제자들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저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어찌 맥없이 허망하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해서 제자들이 가졌던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낙심해서 엠마오 시골로 내려가기도 하고, 갈릴리 바다로 고기잡이하러 가기도 하고, 다락방에 숨어 숨조차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사흘이 지났는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 마음에 다시 희망이 용솟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부활했으니, 그분이 진정 메시야구나. 이제 우리를 로마에서 해방시키겠구나!”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사도행전 1장 6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의 말씀을 새번역으로 다시 보면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잃어 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유대나라도  강대국 틈에 있어서 늘 침략을 당했습니다. 바벨론과 앗수르, 애굽과 로마의 침략을 당했는데, 지금도 로마의 지배하게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로마의 압제에서 자유롭게 해 주시고, 해방시켜 주셔서 독립된 민족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오는 메시야가 다윗과 같은 시대의 영광을 다시 찾아 주리라고 구약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유대는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우리나라도 남의 나라를 먼저 침략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워낙 착한 민족이기도 하지만 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늘 공격을 당했습니다. 왜구나 명나라, 당나라, 몽고족 등에 의해서 침략을 많이 받았습니다. 유대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침략당하는 나라들의 소망은 강력한 국력을 가지고 독립된 국가를 이루는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예수께 물은 것입니다. “허물어진 나라를 세울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닙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사뭇 달랐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만이 아신다. 그건 너희들도 모르고, 천사들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너희들이 알 바도 아니다. 먼저 너희는 성령을 받아라. 그러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의 관심을 ‘하나님의 나라’로 돌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역의 출발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고, 또한 비유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 보화를 발견하는 농부와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라는 등의 말씀을 많이 들려 주셨습니다. 

  신약성경을 찾아보니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총 51번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현실적인 나라, 세속적인 나라, 정치적인 나라라고 여겼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나라요, 능력의 나라이지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닙니다.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너희 가운데 있노라고, 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우리 마음속에 평화가 있으며 그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요, 기쁨인 것을 말하며,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오인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2절에 보니까 낙심한 제자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나눈 이야기 가운데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에 지배당하고 있으니까 우리를 로마에서 구원할 사람으로 기대했는데 그만 그가 십자가에서 맥없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제자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또한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오늘 제자들의 관심은 세속적인 데에 있었습니다. 자기 욕망의 극대화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만나서 복 받고, 출세 한번 해서 뭔가 권력을 잡아 보려는 데에 그들의 관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확장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해답이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사도행전 1장 3절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를 기다리라는 말씀이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데, 권능을 받는다는 말은 능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제 너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의 증인이 될것이라는 말씀이십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신학적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영역입니다. 이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이 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곧 우리 가정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직장의 동료들을 다 전도해서 그들 모두 예수의 제자가 되고 다 주님의 일을 하며 그 원리 안에서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곧 그 직장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지금도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완성이 되겠습니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님이 재림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외형적인 조건에 있지 않는, 능력으로 임하는 나라입니다. 사랑의 능력이 있고, 용서의 능력이 있으며, 복음 전도의 능력이 있는 나라, 바로 주님은 그 나라에 대한 관심이 있으실 뿐이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너희에게 권능이 임하면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증인’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건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건을 보았고, 재판장에서 바로 저 사람이 그 사건의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증인입니다. 그의 증언에 따라 살인혐의가 확정될 수도 있는 결정적인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중요하기에 증언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증언으로 인해 불리한 사람들의 협박을 받을 수도 있고, 위험한 상황에 빠질수도 있습니다. 

  증언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용기’입니다. 용기가 없으면 증언을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고 복음의 증인이 되려면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전도’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전도 한 명 하지 못하는 사람은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참된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증인’이란 단어는 헬라어 ‘마르투스’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마르투스’는 ‘순교하다,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증인은 순교자입니다. 순교할 각오를 하고 피 흘리기까지 그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바로 증인입니다. 그래서 증인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순교의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유명한 언덕이 있습니다. 몽마르뜨 언덕입니다. 프랑스에 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들러 보는 유명한 곳입니다. 저도 10년 전에 가 보았습니다. 각국의 화가들이 그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저도 초상화를 한 장 그려 왔는데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는 별로 안 닮았습니다. 아마 그 언덕에 들른 사람들은 저와 같은 초상화 한 장씩은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이 몽마르뜨 언덕의 ‘몽’이란 말은 ‘산’이란 뜻이고, ‘마르뜨’란 말은 ‘순교하다’라는 뜻이랍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순교했습니다. 그 죽은 사람들을 기념하는 언덕이 바로 ‘몽마르뜨’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복음을 위해서 증인으로, 순교할 사람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을 희망하고 하나님 나라를 동경하는 꿈만 꾼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희가 많은 환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대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증인의 삶이고, 순교자 된 삶입니다. 죽는 순교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순교자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세속적인 세상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 곳에 관심을 갖고, 목적을 품고 살아가시겠습니까?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문학가인 캠브리지 대학의 C.S 루이스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늘을 겨냥하고 사십시오. 그러면 땅을 덤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땅을 겨냥하고 사신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땅의 복도 함께 받습니다. 그러나 땅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과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들도 후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갑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그들의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그제야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진짜 이해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8장 12절에 보면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 집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증언하기 시작했다는 얘기입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 20장 14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라면 내 생명까지도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복음전도를 위해서라면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쁨으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오늘 교회의 복음전도를 통해서, 여러분의 개인적인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건물이 커진다고, 기독교 단체가 많아진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외형적인 모습이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마음속에 천국이 임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 갈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갔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 미국)이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유명한 브라운 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한 사람이고, 목회자의 아들이었지만,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적으로 위선자와 같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불신자들과 어울리면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번은 뉴욕에 가서 믿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타락한 삶을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저녁 한 모텔에서 자기 옆에 누워 있던 친구가 죽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바둥바둥 애쓰며 살아가다가 한순간에 생명이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그는 이제 세상의 세속적인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그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한 지 12일 만에 선교를 위해 버마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버마에 도착했는데, 그 당시 버마의 선교도 한국의 선교만큼이나 어려웠습니다. 갖은 핍박을 받습니다. 그 곳에 간 지 얼마 안 되어 첫 아들을 잃고, 아내도 몇 년 안 되어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지하 감옥 토굴 속에 갇혀서 1년이 넘도록 구더기들과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6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해서 드디어 한 사람을 전도 했답니다.
  선교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버마에 하나님의 나라가 그를 통해서 확장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850년 최초로 버마어로 된 성경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도니람 저드슨 한사람의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 버마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기 시작 했습니다. 건물을 하나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심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헌신과 희생인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한 대형교회 목사님이 미국의 한 신학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답니다. 한국 학생이 무려 천 명이나 공부하고 있는 그 신학교는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 유명한 교수를 모시고 싶은데 돈은 백만 불 이상이 들고, 재정은 부족했습니다. 마침 방문한 목사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부탁을 들은 목사님도 한국에 돌아왔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교회도 큰 교회지만 백 억짜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와 줄 여력이 없었습니다. 기도하면서 고민 하다가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집사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집사님을 우연한 기회에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부담스럽지 않게 “사실은 미국에 갔더니 한 신학교에서 어려움을 호소해 와 도와 주고 싶은데 한 9억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집사님 사업은 어떻습니까?” 라고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IMF니까 다 힘들죠. 하지만 하나님 은혜 가운데 저희 회사는 작년에 조금이나마 이익을 봤습니다. 적자는 안 봤습니다.”라고 그 집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집사님 혹시 신학교를 위해서 헌금하실 수 있겠습니까?”하니 집사님이 잠깐 생각하다가 “제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돈을 버는 것인데 제가 헌금 해야죠. 주님이 쓰시겠다는 데 제가 못 드릴 일이 없지요”하며 선뜻 약속하고 내주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찌 보면 우리는 세상의 삶을 위해서 무엇이든 쌓을 수 있습니다. 물질을, 건물을, 재산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 허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쌓은 것들은 영원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9․11테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100층이 넘는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 버렸듯이 세상의 거대한 나라들도 한순간에 허물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앗수르 제국도, 바벨론도, 애굽도, 로마도 모두 망했습니다. 거대한 나라들이 오늘날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어느 한순간에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만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이렇듯 영적인 것을 위해 투자할 때 이 땅에서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관심을 가지시겠습니까? 주님의 관심이 여러분의 관심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세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욕망과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살아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모든 제자들이 다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500여 명의 형제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예수님의 승천 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120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약속된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희생했던 사람들은 120명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외면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저 예배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남은 삶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드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쇠하지 아니하고 허물어지지 않는 영원한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80세 된 어떤 노인 한 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를 찾아와서 그림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아주 잘 그린 그림을 보고 화가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 그림 누가 그렸습니까?” “12살짜리 아이가 그렸습니다.”라는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세상에 이런 신동이 어디 있습니까? 그 아이를 내게 데려오세요. 내가 세계적인 화가로 키우겠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80세 된 노인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 12살짜리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그 노인이 자기에게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좀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그는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쳐 버렸기 때문에 여운만 남기는 안타까운 신세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아파트를 몇 채 가질 수 있고, 땅을 많이 가질 수도 있고, 현금을 많이 보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다 허물어집니다. 동남아에 쓰나미가 휩쓸고 나니 남아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재산은 고사하고 자기 생명마저 날아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투자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 진정한 증인의 삶이 가장 생명력 있고, 기념될 만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니”하고 말씀 하십니다. 여러분! 증인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인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지난 며칠 동안 교황의 서거와 장례 소식으로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아주 화려하고 웅장하고 거대했습니다. 바티칸시티가 참 대단해 보입니다.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 성당을 가 보면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습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렸다는 천장의 그림들을 쳐다보다가는 목이 부러질 것 같습니다. 그 높은 곳에 어떻게 그처럼 세세한 그림을 그렸는지 모릅니다. 미켈란젤로가 천장 그림을 그리느라 몇 년을 매달려 있어서 그 그림을 다 그리고 나서 목이 굳어졌다고 합니다. 그 엄청나고 웅장한 건물에서 교황의 장례식이 치러지는데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은 저리 가라입니다.
하지만 그 웅장한 건물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 나고 폭격 한 번 맞으면 다 쓰러져 잿더미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복음전도를 통해서, 우리의 교회전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드리는 전도를 통해서, 죽음으로 순교하는 삶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살아있을 때도 전도하지만, 죽을 때도 전도하며 죽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전도하며 죽는 것인지 아십니까?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고 목사님, 나 좀 살려 주세요. 나 죽으면 안 되는데..” 그러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죽으십시오.  “권사님, 집사님!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부활의 새벽에 만납시다.”이렇게 인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둠의 새벽이 지나가고 부활의 새벽에 만나자는 마음으로 눈을 감으면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니까 참 편안할 것입니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어떤 분들은 통장에 있는 돈 다 못 쓰고 가는 것에 한이 남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고, 돌아가실 때가 되면 선교 헌금 하시길바랍니다. 내가 드린 선교 헌금으로 선교사 한 사람 파송해서 몇 명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소임을 다한 것입니다. 인생을 의미 없이 보내지 마십시오. 장기 두다가 세월 다 보내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 자신을 드리고, 헌신하고, 증인된 삶을 통해서 주님 나라의 상금을 쌓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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