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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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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 종천 목사
 
바다처럼 넓은 강을 달리던 여객선 하나가 갑자기 풍랑으로 인하여 파손의 지경에 다다릅니다. 그 배에는 금광에서 금을 캐가지고 오는 광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배가 파손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구명보트가 동원되고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구명보트에 탈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승객의 1/4에 불과했습니다. 배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됩니다. 사람 살리라는 아비규환의 소리로 온통 얼룩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갑판으로 나왔습니다. 구명보트를 타지 못하는 사람들은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이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것들을 버리기 시작합니다. 급기야는 목숨 걸고 구했던 금덩어리까지도 다 버려두고 맨몸으로 해엄을 쳐 강가를 향하여 다가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사람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배에 탄 사람들이 버리고 간 금덩어리를 모조리 모으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전대를 만들어 허리에 차고는 갑판위로 나옵니다. 배에 모든 사람들이 다 탈출하고 점점 가라앉는 배에 그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멀리서 구명보트를 타고 있었던 사람들이 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마지막 남아있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그들은 밧줄을 던집니다. 그는 다행히 밧줄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배를 향하여 가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 구명보트에 도착하기 전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나중에 그를 건져보니 그는 결국 금덩어리를 허리에 두른 채 그 무게로 인하여 헤엄쳐 갈 수도 없었고 배에 가까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욕심을 다스리지 못해서 결국 욕심의 포로가 되어 욕심에 정복된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항로를 믿음이라는 배를 타고 항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순간 세상에 황금덩어리가 우리들의 안전을 보존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구원의 생명줄을 붙잡아야 하며 그것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우리 인생의 목표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물질 혹은 명예 혹은 인간관계,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삶의 가치와 존재들, 과연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최종적인 나를 구해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또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그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 준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형이 있었는데 그 장자의 권한을 사용하여 동생에게는 한 푼도 남겨주지 않고 형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지게 됩니다. 너무 억울하고 섭섭해서 예수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기적을 일으키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면 형이 재산을 나누어 주리라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사정을 자세히 말씀드리니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하셨습니다. ‘너 참 안됐다’ 하고 위로해 주고 또한 그 원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꾸짖는 투로 ‘이 사람아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눠주는 사람으로 아느냐’ 하고 힐난하시며 ‘삼가 탐심을 버리라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 하고 오히려 훈계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얘기를 한 가지 더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밭의 소출이 너무 풍성합니다. 그 부자에게 고민이 생겼어요. 이렇게 많은 소출을 어떻게 할까? 정말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넓은 사람 같으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졌으니 내 창고에 들이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내 주변 사람들의 몫으로 나누어 주어 그들과 같이 풍족하게 나누고 은혜를 누리겠다고 하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이 사람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 마음에 생각을 합니다. 그래 내가 내 창고가 작으니 부수어서 큰 창고를 만들고 거기다가 모든 것을 들이고 많은 것을 비축했으니 내가 여러 해 먹고 마시고 누리고 즐기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만약에 오늘밤 너의 생명을 내가 취하여 가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애써 생각해내고 생각해 낸 것이 ‘그래 창고를 부수고 더 크게 지어서 마음껏 드리고 일평생동안 먹을 것 마음대로 누리고 쌓아두었으니 마음껏 지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생명을 취하여 가면 그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삶의 일들은 우리의 소유의 넉넉함에 달려있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믿음 가운데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는 삶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와 같은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잠시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먼저 생각해 보고자하는 것은 우리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 역시 내일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내 생명이 어디로 달려가고 있으며 얼마나 긴가 그리고 마지막 날이 언제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그날 밤에 자신의 생명이 다한다고 생각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고를 부수고 지어 거기다 비축하고 맘껏 먹고 마시고 누리자라고 이와 같은 생각을 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날 밤 자기의 생명이 다한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 그날 밤에 자기의 생명이 다한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오늘밤까지 내 생명이 있으니 내가 남아있는 생명의 기간 동안 선을 베풀고 내가 생명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귀한 일을 하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가 여기 앉아계신 성도님들께 이런 말씀 묻고 싶습니다. 만약 성도님들의 시간이 오늘이 마지막 시간이 된다면 우리 성도님들은 오늘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 성도님들이야 이미 마음에 계획하고 교육 받으신 대로 ‘정말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내 생명이 오늘 마지막이라고 한다 해도 나는 사과나무를 한 그루 심는 마음으로 똑같이 살아야겠습니다’라고 대답하시리라 믿습니다. 당연히 그러셔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내 생명이 오늘 마지막이라니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총결산하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들을 오늘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마 전화라도 한통 걸어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제가 별거 아닌데 이렇게 여러 가지로 베풀어주시고 이렇게 여러 가지고 도와주시고 여러 가지로 배려해주셔서 제가 이제까지 지내 옴을 감사합니다’ 하며 우리에게 조그만 은혜라도 베풀어주셨던 신세라도 졌던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가야할지 혹은 우리 마음속에 슬픔을 끼쳤던 또 내가 마음에 상처를 끼쳤던 또 마음에 서로 간에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드려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동안 마음에 많은 어려움만 끼친 것 같습니다’ 하고 부담을 덜고 용서를 받고 용서를 해주는 이와 같은 부담 없는 마음으로 갈 준비를 할 것인가 하는 생각들을 하실 것입니다.

혹은 그간에 있었던 우리 삶의 업적과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 최선의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들을 이루기에 하루 동안 애를 쓰시리라 생각을 합니다. 저는 종종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여 주님 앞에 나오는 성도님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라도 주님 앞에 나와 마지막 순간에라도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참 감사한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조금 더 일찍 나오셨더라면 조금 더 힘이 있을 때 조금 더 능력이 있을 때 주를 위해서 아름답게 헌신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기쁨과 은혜를 끼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또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연장시켜 주셔서 기쁨과 감사와 하나님께 대한 감격의 삶을 살아가게 하실진대 우리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으로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일 것입니다. 무엇인가 자신의 삶의 길이가 어찌 되었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잘 마무리하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을 합니다. 잠언 27장 1절을 보면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을 살아본 지혜자는 말합니다. 너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도대체 우리 인생에는 하루 동안에도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명에는 무엇인가를 그렇게 쌓아두고 마음대로 누리기 위해서 허덕거려야 할만큼 그렇게 길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삶이 대단히 길다면 이것저것 다해보고 그래 이게 옳아라고 생각하며 그 일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삶은 그리 길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꼭 해야 될 일을 위해서 그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써도 삶의 시간은 짧습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을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아침에 자욱하다가 낮에 해 뜨면 없어지는 안개처럼 우리의 삶은 짧고 제한되어져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우리 생명이 어느만큼 보장된다면 그야말로 기대하는 것이 보장된다면 우리는 이러저러한 계획을 세워서 마음껏 누려볼 수 있을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장례가 참 많습니다. 일 년에 저희 교회 장례가 한 150가정 정도 있습니다. 적어도 주당 3가정 정도 되는 경우지요. 저도 장례를 참 많이 치르는 목사 중에 하나인데 장례를 많이 치르다 보니 제게 있어서 한 가지 마음속에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거리가 그렇게 길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삶과 죽음의 간격이 그렇게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도 같이 악수하고 인사하고 같이 웃고 같이 이야기 했는데 갑자기 오늘은 전혀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더란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간격은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아요.

정말 수많은 장례를 치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인생은 한번 왔다가 가는 것 정한 것이고 언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온대로 가는 것도 아닌 순서가 없는 것이다 하는 것을 늘 똑같은 생각이지만 해보게 됩니다. 저희 교회 예배 가운데 입관예배도 있고, 발인예배 소위 말하는 천국환송예배도 있습니다. 또 장지에 가서 드리는 하관예배 이렇게 여러 종류의 예배도 있습니다. 특별히 천국 환송예배 때 고인의 양력을 간단히 써놓고 자녀들이 와서 그것을 읽으면서 그 부모들을 회고하는 이런 시간들이 있습니다. 언제 태어나서 누구와 결혼을 하고 또 어떻게 자녀들을 낳고 또 어떻게 예수님을 믿어 어떻게 봉사하고 헌신하며 이 세상 사시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들으시고 하늘나라 가셨다 이런 것이 대개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을 때마다 참 눈물을 흘리며 부모를 회상하고 가슴 아팠던 일들, 감사한 일들, 애잔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회상하는 이와 같은 내용들을 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짧은 몇 마디 속에 그의 삶이 요약되더라는 것입니다. 돌아보면 긴 삶 같았는데 또 한 번 돌아보니 그저 말 몇 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우리의 짧은 삶임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장 확실한 길을 찾아 바로 그 일에 우리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시편 39편 5절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 앞에 설 때 손바닥 만큼이에요. 이 손바닥만큼의 삶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는데 정말 우리가 든든히 섰다 해도 그것도 별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을 볼 때 나는 내일 일을 모르니 오늘 내가 이 순간 내 삶이 거두어진다 해도 내가 하나님 앞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람들 앞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를 생각하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생명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 39편 6절을 보면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정말 우리는 분주히 애쓰고 수고하고 내가 무언가를 모아보고자 했는데 애써서 무언가를 이루어 봤더니 나중에 그것이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나는 그것을 누리기도 전에 이 세상 떠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부자는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고 관리를 위해서 고민했던 물질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몸이 아픈 분들을 위해서 병원을 심방할 때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것 가지고도 우리의 생명을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늘 느끼고는 합니다. 오다가다 병원에서 얼굴을 알 수 있는 사회의 명망가의 모습을 볼 때 도 있습니다. 일정시간 후에 신문에서 그가 이 세상 떠났다는 내용을 볼 때가 있습니다. ‘아, 그래서 병원을 오셨나보다’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세상의 어떠한 가진 것도 세상의 어떠한 명예도 우리의 생명을 하루도 더할 수 없음을 보게 됩니다. 생명에 관한한 우리는 아무런 권한과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던 삶의 목표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공들여 쌓았던 인생의 탑이 어느 날 내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우리의 허탈감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물질 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추구하던 최고의 가치 어느 날 내게 힘이 되어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감당하시겠습니까? 나를 돕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은 마음이 변합니다. 마음이 안변해도 여건이 변해서 도울 수가 없습니다. 마음도 안변하고 여건도 그대로이지만 언젠가는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 우리를 돕지 못할 때도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결국 같이 있을 때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때 서로의 마음을 통할 수 있을 때 사랑하고 애잔히 여기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물질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에요. 여기에 대한 이의는 아무도 가질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렵게 사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게 편합니다’라고 생각하실 뿐 계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옳은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 생명 하나가 이 세상에 나오는데 얼마나 많은 애씀이 있습니까? 그 어린 생명하나 이 세상에 탄생하기 위하여 10개월이 다되는 긴 기간 동안에 그 엄마가 조심스럽게 그리고 또 그 엄마가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고 애쓰는 과정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또 그 아이를 기다리는 아빠의 마음을 우리는 알지 않습니까? 기대하며 또 마음속에 소망하며 또 믿음을 가진 경우에는 기도하며 기다리지 않습니까? 저는 목사니까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안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 교회도 헌아기도도 있고 또 어린 아이들을 데려와서 목사가 품에 안고 기도해 드리면 우리 성도님들이 마음에 기뻐하시죠.

제가 이 아이들을 안고 기도할 때, 어린 아이들일수록 더 그런 것을 느끼는데 그 조그만 아이들이 정말 파다 파닥하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아요. 생명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 조그만 아이들은 울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커야 우는 것 같아요. 좀 파닥파닥 거리고 빠져나오려고 그러면 조그마한 아이들은 제가 힘을 줘서 꽉 안으면 꼼짝 못해요. 그러면 제가 꽉 안고 기도를 해드리는데 정말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 힘도 없는 아이하나가 세상에 나오기 위하여 엄마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생을 하고 기다리며 생명의 산고를 위하여서 고통을 정말 기쁨으로 바꾸고 이제까지 왔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 기르는 수고는 얼마입니까? 그러나 자라는 보람 때문에 그 대가를 충분히 받을 만큼 고통을 치러도 그것이 자녀를 키우는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어린아이 생각하면 새벽기도 못 나올 분은 없는 것 같아요. 어떤 분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저는 죽어도 새벽에는 못 일어나요. 그런데 죽어도 못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여도 못 일어난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닌 것 같아요. 그런 분들도 어린아이가 새벽에 울면 다 일어나는 것 같아요. 밤에 자다가도 일어나고 새벽에도 일어나고 아이가 칭얼대면 일어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이러한 육신적인 생명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육신과 더불어 그 육신이 거하고 있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생명이라는 것은 육신, 즉 살과 뼈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에 거하고 있는 영혼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입니다. 밥을 먹고 운동을 한다고 해도 해결될 수 없는 영혼의 문제, 그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영혼생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릴 때 글씨를 알지 못했어요. 개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글씨가 써있어도 그것이 뭐라는 것인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식당 아니면 이발소, 목욕탕 혹은 또 서점, 문방구 뭐 이런 것들이 있어도 우리는 그곳이 뭐하는 곳인지 알지 못해요. 글씨도 읽지 못하고 개념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자라면서 글씨도 배우고 그 내용이 뜻하는 개념도 배우면서 우리는 머릿속에 생각을 합니다. ‘아! 이발소는 머리 깎는 데야. 목욕탕은 목욕하는 데야. 식당 밥 먹는 데야. 문구점 노트나 연필 같은 것을 파는 곳이야. 아니면 서점 책 파는 곳이야’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적절히 이용할 줄 압니다.
우리가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내 앞에 영혼의 세계가 펼쳐지고 내 눈앞에 보여져도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영혼에 대해서 알게 되고 영혼에 대해서 마음속에 습득하게 될 때 우리는 그때부터 영혼의 세계에 대한 앎이 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인가 마음에 이루고 접근함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전에는 몰랐지만 그럼에도 존재하고 있는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되고 구원의 백성되어 그 영혼의 세계를 소유하고 알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허락해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늘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전에는 그런 것들이 우리 눈에 어른 거려도 우리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그와 같은 것을 알고 느끼고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교회 처음 나오신 분들도 여러분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들에게 영원한 세계에 대한 눈이 떠지고 영원한 세계를 소유하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고 예수 믿어 영원한 구원과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것 감사하고 그 감사한 것을 어떻게 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하나님의 은총의 성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을 위해서 살아갈까 하는 마음을 가지게도 됩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측치 못했던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큰 변화는 내 마음에 변화가 이루어져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이러저러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가는 변화무쌍한 삶 속에 내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순간 우리에게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면 우리인생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방법을 알게 됩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분명히 아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확신하는 것에 대하여 그대로 행하며 살게 되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분명히 아는 것은 확실히 말하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자신 있는 것에 대하여 본인이 마음에 평안을 느끼며 대비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저는 목사로서 확실하게 예언 한 가지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예언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예언한다고 하니까 사이비가 되기로 했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제 점점 더워질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뭐 이런 정도 예언 못하겠습니까? 이제 겨울 지나고 봄이 왔고 여름이 올 테니 점점 더워질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제 옷을 사도 여름옷을 사지 겨울옷은 안삽니다. 더워질 것을 아니까 대비해서 여름옷을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겨울옷 사시는 분들은 내년 겨울을 위해서 재고품 싸게 살 수 있으니까 사실지 모르지만 정상적이면 여름 제품을 사게 되는 것이지요. 확실히 아니까 준비하고 무엇인가 대비한다는 것입니다.

강가에 가 본적이 있습니다.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생명있는 물고기들을 봅니다. 경쾌히 움직임을 봅니다. 생명 있는 것은 힘이 있고 그 힘 있는 것은 경쾌한 움직임을 가져다주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 분명히 영원한 생명을 알고 그 생명을 믿고 소유하게 되면 우리 삶에는 힘이 생기고 경쾌한 삶의 유연한 움직임이 있게 됨을 봅니다.

사람의 즐거움은 근본적으로 자존감과 평안에서 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정말 중요한 존재다.’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되고 하나님의 은총의 백성이 되어 내가 아무렇게나 살아서도 안된다는 나 자신에 대한 자존심과 자긍심과 자존감이 있을 때 우리들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우리 마음속에 평안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평안함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백성으로 이와 같은 기쁨과 즐거움과 은혜를 누린다면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총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헌금 좀 많이 해서 천국장부에 많이 쓰여 있어서 나중에 천국에 가서 찾아 쓸 수 있겠다라는 개념이겠습니까? 아마 그런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누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나 부에 대해서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라는 것은 부자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에 대한 올바른 개념과 사용을 원하셔서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일맥상통한 것은 괜히 부자라고 질시하고 괜히 부자면 안된다라는 것도 아니고 또 부자여야만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 솔로몬, 욥이나 요셉은 모두 부자였습니다.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이 비난받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가 비난받은 것은 그가 어리석은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그는 그의 인생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가지고 지혜롭고 선한 일을 위해서 사용하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그는 자기 자신에게 쌓아두고 누리고자 했지만 생명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 결국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2절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29절에는 ‘먹고 마실 것을 구하지 말고’, 30절에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살라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 목숨에 대해서 염려한들 우리가 한 치인들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고 마실 것에 매달려도 인간은 늘 그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아시는 주님께 맡기고 우리 삶에 성실과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하여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우리 삶의 성실과 진실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요로운 자로 만들어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삶의 진실과 삶의 성실은 매우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진실과 성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며 주님의 은혜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부요한 자입니다.

오늘은 제가 이 말씀드리고 맺을까 합니다.
언젠가 제가 외국에 나갔을 때 비행기를 탔습니다. 굉장히 조그만 비행기였습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가는데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니 큰 비행기는 아니었습니다. 아마 큰 도시에서 큰 도시로 간다면 바로 가는 비행기가 있겠죠. 그런데 그렇지 않고 사람도 많지 않으니 언제든지 조그마한 비행기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큰 비행기는 큰 도시를 거쳐서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빨리 가려고 직항 노선을 탔는데 비행기가 매우 작았습니다. 제가 가방하나 메고 가서 가지고 탔는데 그 가방도 못 들고 들어가고 비행기 입구에서 따로 내놓게 해서 비행기에다 실고 맨몸으로 들어가는 이런 비행기였습니다. 사람도 몇 명 안 타고 음료같은 것을 나눠주는 수레같은 것은 전혀 있을 수가 없고 음료수 한잔 주는데 쟁반에 담아서 한잔씩 주었습니다. 물론 프로펠러 비행기였습니다. 요즘 시대에도 그렇게 프로펠러 비행기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정말 마음에 근심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굉장히 많이 쏟아지고 바람도 많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기가 막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가 흔들리니까 마음속에 좋지는 안잖아요. 타고 가다보면 기류 때문에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하는데 안내방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류 때문에 그렇다, 폭풍 때문에 비행기가 흔들린다, 괜찮다, 벨트 잘 매라 등 방송이 나오는데 그런데도 계속 흔들리는 것입니다. 방송이 두 번째 나오고 세 번째 나오고 그러더니 사람이 한참 이 얘기 저 얘기 몇 사람 안 되지만 얘기하더니 일절 얘기를 안하고 방송도 안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맡기고 가는 수밖에 없는가 보다 하고 앉아 있는데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잖아요. 마음에 긴장되는 분위기죠. 그런데 계속 비행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계속 흔들리는데 사람들이 침묵과 정적만 흐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마음속에 생각하기를 그래도 이 사실을 위해서 기도는 해두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어쨌건 이제까지 지내온 것 감사합니다. 이제까지 살려주신 것도 감사하고 또 분당중앙교회 목사로 봉사 할 수 있었던 것도 감사하고, 또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면 감사하고, 또 이 세상에 더 있으라 하시면 그것도 감사하고, 또 여러 가지 기도하고 이제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한참 흔들리더니 너무너무 심하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방송이 나오는데 도저히 못 가겠어서 다시 공항에 돌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돌아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우리는 느끼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어쨌든 비행기가 돌아가서 그 폭풍 속에서 다시 그 시작했던 공항으로 돌아왔습니다. 내릴 때 보니까 차창 밖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비가 억수로 내리는 것 같아요. 폭풍우, 아주 심한 폭풍우였습니다. 직원들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산 씌어주고 우산 한 개씩 줘서 비행장으로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른 비행기를 세워 놓고 그 도시로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줘서 비행기를 바로 탔습니다. 그 비행기는 굉장히 큰 비행기였습니다. 수백 명 타는 비행기인데 그 비행기는 다른 곳을 거쳐서 제가 목적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곳을 거쳐서 목적한 곳으로 그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마음속에 깜짝 놀랄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 조그만 비행기는 흔들리고 떨어질 것처럼 했는데 큰 비행기 타고 가니 사람도 굉장히 많이 탔는데도 비행기가 이륙을 하더니 차악~ 하고 뜨더니 힘있게 나가고 구름 속으로 탁 올라가더니 환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거기서 두 가지를 느꼈습니다.
‘야! 힘 있는 게 좋다.’라는 것입니다. 그 비행기는 크고 힘이 있으니까 그까짓 비 쯤와도 문제없이 쫙 뚫고 쭉 가더니 구름 속으로 착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느낀 것은 여러분 비행기 타셨을 때 혹시 구름에 올라갔을 때 느끼는 점 있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없고 밑에는 구름만 있고 위에는 밝고 훤하고 잔잔하잖아요. 여러분 비오는 것 눈오는 것 바람 부는 것, 다 구름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제가 느낀 것은 일정수준 위로 올라가면 이렇게 변함없이 편안해지는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정말 편안했습니다. 그 구름아래서 폭풍우가 치는지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올해 우리 교회 표어 중에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한 수준 높입시다’입니다. 다시 한번 따라서 합시다. ‘한 수준 높입시다.’ 그렇습니다. 한수준 높이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전에는 막 마음이 볶여요. 내가 예수 믿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볶이고 아이들이 속썩이면 또 마음 볶이고, 또 인간관계 때문에, 또 물질 때문에 또 여러 가지, 또 일들 제대로 안 풀리면 마음 바상 바상해지는데 어느 순간 우리 믿음이 커지면 ‘괜찮아, 그러다가 또 좋아질거야. 뭐 어려움 통해서 우리가 괜찮아지고 어려움 통해서 자라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고 이제는 웬만한 것쯤 기도하면 되지, 이런 것쯤 우리가 이제까지 늘 있어왔던 것 아니냐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 지지 않습니까? 언제 폭풍우 치고 바람 불고 눈보라 몰아쳤는지 우리들이 편안해 질 때 있지 않습니까? 힘있게 힘있게 우리의 삶을 진행해서 어느 수준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은혜의 생명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영원한 은혜의 생명을 소유하면 우리 삶의 힘이 생기게 됩니다. 그 힘을 가지고 우리 삶의 세계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진입하게 되면 거기에는 불안도 없고 걱정도 없고 낙심도 없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누리며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 속에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는데 이제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죄짓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고통하고 괴로운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제 우리의 모든 힘이 부족하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능력에 힘을 받아서 우리가 우리 상황을 차고 올라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 다음부터 우리들에게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그리고 이 자리에 초청을 받아 오신 우리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죄의 근원을 다 씻어주시고 그 주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주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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