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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우리들의 소망이시다 (요 11: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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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한용근 목사

  오늘 예수님은 베다니라는 마을에서 발걸음이 멈추셨습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베다니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이 베다니라는 마을의 뜻은 “괴로움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특이한 지역의 이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요, 예수님께서 태어난 곳인 베들레헴은 “떡 집”이라는 의미로 영적으로 볼 때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다니는 아주 절망적인 의미를 지닌 “괴로움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의 첫 부분을 읽어보면 정말 베다니라는 마을은 “괴로움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베다니 마음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고 했습니다. 3절에는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6절에는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은 계속해서 베다니에 병든 자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살 수 있는 병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이 걸려 죽어가는 인생이 베다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다니는 주님께서 사랑하고 아끼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오빠 나사로가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성경에는 그들의 누구의 자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볼 때에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세 오누이가 함께 의지해 가면서 인생을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부모 없이 어린 세 오누이가 인생을 살았으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들의 인생이 얼마나 괴로움과 고통 속에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는 그 두 자매가 아버지처럼 의지하였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오빠가 이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빠는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오빠는 그들 곁에 꼭 있어야할 존재였습니다. 그 나사로가 오늘 베다니 마을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지니고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삶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절망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절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술과 담배와 마약과 섹스와 온갖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절망이라는 죽음의 병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혹시나 당뇨나 암과 같은 불치병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종합검진을 받으려고 해도 혹시 암과 같은 병이 있을 것 같아 두려워서 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 살고 있는 것은 육체적인 질병의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정말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미움은 때로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자살은 자신을 너무나도 미워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면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에는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악한 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분노 때문에 서로 쟁투하고 싸우고 시기하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형태의 괴로움이 있든지 여러분의 마음이 불편하고 기쁨이 없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병에 걸린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 이제 괴로움을 넘어선 슬픔과 완전한 절망이 찾아 온 것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어떤 희망이 있겠습니까? 죽기 전에는 그래도 살 수 있다, 죽기 전에는 그래도 살려 보자라는 희망이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다음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희망과 소망이 없었는지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마르다는 주님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그의 동생 마리아도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고 합니다. 33절 말씀에 보면 이 죽음의 현장에 마르다도 울었고, 마리아도 울었고 모인 모든 사람들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조차도 이들의 모습을 보시고 35절에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이었습니다. 눈물의 집이었습니다. 죽음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말처럼 주님께서 조금만 더 일찍 오셨다면 이 베다니가 과연 괴로움의 집이 되고, 눈물의 집이 되고, 죽음의 집이 될 필요가 있었느냐?하는 것입니다. 3절 말씀에는 나사로를 가리켜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5절에도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아주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주님이 사랑하신다면 보다 빨리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죽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18절을 보면 베다니는 주님께서 계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동네도 아니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걸어가야 하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불과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되는 길이었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주님은 그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지만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그곳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죽을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아셨지만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그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그가 죽자 그곳은 슬픔과 괴로움의 집이라는 베다니가 된 것입니다.

  나사로는 이제 죽었습니다. 그의 시체를 보면서 어느 누구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에 따라 돌무덤에 그를 안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벌써 죽은 지 사흘이나 되었고, 사흘이나 된 시체에서는 썩은 냄새가 코를 진동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썩어가고 있는  시체에서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산 자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죽었기 때문에 소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절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4절 말씀을 보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40절에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로가 죽었으니 인간의 방법이 모두 멈춰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방법으로 그를 살려 보겠다는 생각이 멈춰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오직 네 방법과 네 생각을 포기하고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를 향한 인간적인 희망과 그를 향한 인간적인 방법이 모두 포기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능력에 의지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나사로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다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확증했습니다. 다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인간의 방법이 이제 그의 죽음과 함께 멈춰진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방법이 멈춰진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법을 포기하고 주님께만 의지해야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며, 믿음의 체험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주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주님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직도 인간적인 방법이 그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은 나사로의 희망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가 새로운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어떤 지혜나 능력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그의 출발점이 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자신 안에서 역사해야 합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잡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지혜와 자신이 알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총 동원해서 그물을 바다에 던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물고기 잡는 것에 실패한 그 날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그분의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의문을 던질 수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목수가 아닙니까? 당신이 바다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바다는 내가 더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5:5)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인생의 노하우를 포기했습니다. 오직 그는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40절). 42절에서도 주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결정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방법이나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지식을 선택할 것인가? 믿음은 언제나 이와같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있지만 그리고 말씀을 듣지만 주님의 능력과 권세에는 의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그들의 인생의 문을 여는 열쇠요 해결 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38절에서 우리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시고, 주님께서 통분이 여기셨다는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통분이 여기다라는 말씀은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은 주님을 분노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다니라는 마을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다니는 “괴로움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괴로움의 집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마태복음 1:21절에는 천사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놀랍게도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괴로움과 죽음과 슬픔의 눈물이 있는 베다니라는 괴로움의 집”에 구원자로서 그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오늘도 육체적인 무덤 속에서 죄로 그 영혼이 죽어 있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그 무덤 속에 갇혀 썩어져 가고 있는 수 많은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그곳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6:11)고 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마음이 강퍅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음성은 그 영혼을 살리기 위해 부르시는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나사로라는 사람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이요, 죽음에서 나온 사람이요 영적으로 볼 때 묶여 있는 것이 풀려 자유함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에서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이제 묶여 있는 모든 것들이 풀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감겨져 있고, 뭉쳐져 있고, 풀어지지 못한 마음의 모든 찌꺼기들과 인생의 문제들이 풀어져서 영적인 기쁨과 인생의 평안함과 자유함 얻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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