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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이 그렇게도 믿어지지 않는가? (행 2:37-41, 벧전 1:17-23, 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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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전원준 목사

지금으로부터 98년 전, 그러니까 주후 1907년에 평양에서는 길선주 목사님의 주도로 대부흥회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침 장대현교회에서도 집회를 갖게 되었는데, 15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길 목사님은 아주 열심히 그리고 정열적으로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터지지 않았고, 성령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길 목사님은 그 원인이 목사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는 아간과 같이 나쁜 놈입니다. 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 친구 하나가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으면, 내 재산 좀 잘 처리해 주게. 내 아내는 아는 게 없어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일세!’ 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재산을 정리하면서 1천만 원이 넘는 돈을 착복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길 목사님이 자신의 죄를 털어놓으면서 회개하자, 회중석에서도 자기 죄를 통회 자복하는 기도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평양의 대부흥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예수께서 붙잡혀 심문을 받고 있을 때, 그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으니, 그 광경을 직접 바라보고 있던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무튼, 베드로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을 때, 그 얼굴을 뵙기가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했을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후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주님 말씀이 생각나서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에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울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전해준 소식을 듣고 주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을 찾아갔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입으셨던 수의까지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주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여러번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어있는 무덤과 수의까지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했으니, 얼마나 한심하고 괘씸한 일입니까?

그러니,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을 때에 예수님께 얼마나 죄송하고 미안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한없이 울면서 회개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수제자로 자타가 인정했던 사람이었는데, 그처럼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였으니, 그 스스로도 자신의 죄를 도저히 용서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께서는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아예 과거에 대한 것은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장차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것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 서로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전도의 사명과 중요성을 깨우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토록 크고 넉넉하신 사랑을 보여주시자, 베드로는 그야말로 완전히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마음속에 남아있던 세상적인 욕심과 미련을 완전히 버렸습니다. 그가 아시아에 있는 여러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고 권면한 다음에 말하기를 ‘예수를 믿음으로써 모든 이기심과 증오서 벗어나 영혼이 정결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이미 그 자신이 그런 상태로 변화가 되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제는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벧전1:22)’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고 사랑하셨으니, 그런 사랑을 입은 베드로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베드로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설교했을 때에, 그 누구든지 감동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있는 말씀을 보니, ‘베드로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여러분, 모두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죄의 용서를 받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1.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지난 죄를 회개하고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를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부활은 육체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중생은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부활과 중생이 같은 뜻으로 사용될 때가 많습니다. 요컨대, 부활과 중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까닭에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고 죄를 지으며 살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회개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죄의 회개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베드로는 설교하기를 “여러분은 모두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회개란, 내 의지와 욕심대로 살던 생활이 잘못되었음을 뉘우치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본능적인 욕심에 따라 살던 옛 생활습관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따를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시기하게 마련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는데, 사람이 갖고 싶어 하는 대상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가 남보다 먼저 차지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욕심을 부리다 보니, 이 세상에서는 다툼과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삶을 살면, 다시 말해서 세상욕심으로 가득차 있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 예수를 믿어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경우, 그 인생의 목적이 변하게 됩니다. 땅 위에 있는 썩어질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보화를 바라보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다툴 일이 없습니다. 정말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면, 명예에 대한 욕심도 없을 것이고, 물질 욕심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누릴 수 있는 줄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고 이루어주시는 대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삶을 온전히 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면서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쩌다가 은혜가 다 떨어져서 세상욕심이 그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경우, 하늘의 보화는 아주 멀게만 느껴지고, 당장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그들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에는, 그 마음에 하늘의 소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돌아가시자, 그들은 모든 소망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육신의 눈이 현실적인 문제로 멀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이신 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실을 좀 더 확실히 알아보고자 하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을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쳐주면서 “예언자들이 성경에 기록한 모든 말씀이 그렇게도 믿어지지 않더냐?”고 한탄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세상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눈길이 세상을 향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욕심과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눈이 멀어 주님이 함께 하셔서 도와주시고 있는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복이 되고 은혜가 되는 길을 가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주 어려운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데, 정말 기적처럼 일이 잘 해결된다든지, 아니면 천사와 같은 사람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일을 도와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면 그 반대로, 잘 나가던 사업이 부도가 나거나, 믿었던 사람에게서 사기를 당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죄와 잘못을 깨우쳐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회개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에 찔림과 감동을 받고 예수를 새롭게 믿어봐야겠다는 결심과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입니다. 다시금, 현실주의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또는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자 노력한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당장 이익이 된다거나 즐거움이 되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치우치거나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둘이 배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조난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며칠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저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아왔습니다. 주님, 이번에 한 번만 저를 구해주신다면, 이후로는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기로 굳게 다짐합니다.”

그때, 다른 친구가 “잠깐! 저기 육지가 보인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을 듣자말자, 기도하고 있던 그 사람은 기도를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회개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이지, 우리 인간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은 우리 주님을 심히 모독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목숨이 위태롭다고 해서, 존경하며 따르던 스승을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믿음대로 살기가 힘들다고 해서 하나님을 등지거나 배신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어지럽고 험난한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기가 힘들다는 것, 우리 하나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소망을 땅위에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낙심 되는 일이 있다고 해서 세상으로 치우쳐 살게 될 때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신앙인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다면, 그런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자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일에 따라 정의와 공평함으로 심판하신다(벧전1:17)’고 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 곧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항상 경건하게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죄에 빠져서 타락하게 되는 것은 힘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거룩하게 되는 일은 항상 쉬지 않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게 될 때에는, 악한 마귀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찾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집회와 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의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기도회에 날마다 빠짐없이 참석하여, 서로 교제하면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고, 사도행전 2장 4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찬송을 자주 부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만 읽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반복되는 일이 많아서 따분할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마귀의 밥이 되지 않으려면 교회와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눈먼 한 소년이 친구들과 함께 방패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연은 하늘 높이 날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애야! 네 연이 어디 있니? 땅에 떨어졌는지, 하늘로 날아가 버렸는지, 너는 어떻게 알고 연을 날리고 있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제 연이 지금 하늘 높이 나르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한 그 사람이 다시 묻기를 “넌 볼 수도 없는데, 어떻게 네 연이 하늘 높이 날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잡고 있는 이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것을 보아서 제 연이 하늘 높이 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조심스럽게 줄을 잡아 다니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누구의 손을 잡고 있습니까? 혹시 한쪽 손은 주님을, 그리고 다른 손은 세상과 손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어떤 쪽으로 더 쏠리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잡아 다니는 힘이 더 강력해서 그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지만, 세상에서 아무리 강력하게 우리를 잡아끌지라도, 우리 맘이 주님을 향하고 있으면, 마귀는 결코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고 있으면, 성령님이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 손을 꼭 잡고 바른 길로 인도해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부활의 소망과 기쁨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가까이하고자 애쓰면, 주께서 일러주신 모든 진리를 잘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은혜가 넘치는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부활의 주님을 더욱 가까이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지금보다 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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