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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는 신화가 아닙니다 (벧후 1: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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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성홍모 목사

  오늘의 교회력은 산상변모일이라고 합니다.  교회력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교회력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내려왔고, 교회의 역사와 함께 발전되었습니다.  교회력을 따라 절기를 지키는 것은 오래 전에 있었던 우리 예수님의 지나간 사건에 대하여 기억을 더듬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어가는 생생한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교회력의 한 절기나 축일을 기쁘게 지키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잘 이해하고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인 교회와 함께 존재하고 계시며,  오늘 우리와 함께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어떤 절기를 지킨다고 할 때에 주님이 행하시고 당하신 그 날의 사건으로 몰입하고 들어가면서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여야겠습니다.
교회력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되었습니다.  교회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은 주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안식일을 버리고,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지켰습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주님께서 살아가신 공생애의 사역을 몇 개의 절기로 나누어 1년 동안 지켰습니다.  교회력에는 가장 큰 절기가 있는데,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이 있습니다.  성탄절기에는 12월 25일의 서방교회의 성탄절과 1월 6일 동방교회의 주현절이 들어 있습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4주간의 대림절이 있고 성탄절과 주현절을 맞이합니다.  주현절 첫 번째 주일을 주님의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수세주일로 지킵니다.  성탄절기가 끝나면 사순절로 들어가는데, 성탄절기가 끝나고 사순절로 들어가기 전에 주님의 산상변모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력 안에는 여러 축일들이 있습니다. 주의 수세주일과 산상변모주일, 삼위일체주일, 한국교회는 잘 지키지 않지만, 만성절, 왕이신 그리스도주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축일은 큰 절기를 마치면서 다음의 중요한 절기를 연결시켜주는 과도기적인 날이라고 봅니다.  산상변모일은 부활절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방에 함께 여행을 가셨다가 돌아오면서 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 오르기 전에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고백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과 거기서 백성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밝히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런 귀중한 사건이 있은 후 한 주간쯤 지나서 예수님은 12제자 중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들 세 사람의 제자들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아이가 죽었던 방에 들어갔으며,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중에 베드로는 훗날 이 변화산에서 체험한 것을 소중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3명의 제자들을 데리시고, 변화산에 오르신 것은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눅9:28-29)  예수님이 그 산 위에서 기도하시는 중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얼굴은 해 같이 빛나며,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입으셨던 옷이 희게 변하는데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눈이 부셔 쳐다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용모가 변화되고 입으신 옷이 변하는 것만이 아니라,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는데, 말씀하는 것을 보니 한 사람은 이스라엘의 해방자요, 율법을 받아 전해주신 모세였으며, 또 한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능력이 많았고, 우상숭배에 맞서 싸운 선지자 엘리야였습니다. 이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이 산에 오셔서 주님 예수와 말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들 구약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두 분이 나타나셔서 예수님과 말씀하는 것을 자세히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들 곧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가실 일, 죽으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실 일, 즉 죽으심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율법과 선지자들이 외쳐온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완성되며, 인류의 숙제인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의 소망이요, 구원이신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세 제자들은 기도하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졸고 있었는데,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시고, 구약의 대표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말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제자들은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함께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다 마치셨는지 두 분이 떠나가려고 하셨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변화되신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신령하였으며, 이미 죽어 천국에 들어간 모세와 엘리야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서 그런 황홀경에 빠지면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산을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이 때에 구름이 몰려와서 그들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제자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때에 구름 속에서 한 음성이 들려졌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하늘의 광경을 목격하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가까이 오셔서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제자들이 눈을 들어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는 예수님만 계시고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변화산의 사건은 무엇을 말씀하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변화산에서는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이며, 거기에서 세상을 떠나가실 것이지만 부활하시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을 예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셔서 지금 하늘에 계신 우리 주님과 다시 오실 때에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분이라고 확증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대표자요,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가 나타나신 것은 모세는 시내산에서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신 분이요, 엘리야도 역시 시내산이라고 불리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신 분입니다.  모세는 장차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일으키실 것을 예언한 사람이었습니다. 

  신18:15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다고 하면 하나님은 선지자 중의 선지자로 한 사람을 세우실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는 예수님의 선구자로 엘리야가 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시신을 찾을 수 없었고, 엘리야는 산 채로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들 두 분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오신 것을 보면 그들의 받았던 소명과 사역은 결국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학수고대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후서입니다.  베드로후서는 사도 베드로가 저작한 서신입니다.  베드로는 이 서신을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1:1)라고 하셨습니다.  이 서신을 쓰는 이가 바로 예수님의 수제자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오늘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본문 1:16에서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하시면서 17절에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라고 하시면서 18절에서 분명하게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건을 직접 목격한 제자 베드로가 쓰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독교는 신화가 아닙니다.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16절 말씀에서 베드로의 강력한 주장을 볼 수 있습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권능과 다시 오심을 알려주었는데, 이것이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서신을 기록하고 가르치는 베드로는 주님의 위엄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제자요, 주님이 보내어주신 사도입니다.  베드로는 처음 4 제자중의 한 사람이며, 의욕이 앞서므로 실패할 때도 있지만, 수제자였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을 증언하기 위하여 목숨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구세주가 되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대제사장에게 잡혀 들어가 엄청난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그것도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 거지를 고쳐주었는데, 그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온 시내가 떠들썩해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무리들이 공격을 받을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면서 앞으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이 외쳤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그들이 체험하고, 알고, 믿는 바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걸었습니다.  사도 요한도 베드로와 같은 목격자요, 증언자였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도 고대로터 내려오는 그리스 로마 신화들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를 보면 황당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신들이 사람과 결혼한다느니, 거인 족이 있었다느니, 저런 허무한 이야기를 가지고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이 유치하기 이를 데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라, 승천이라 하는 것이 신화가 아니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이나 무신론자들은 기독교회도 교묘하게 꾸민 신화로 보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요즈음 "기독교를 몰아내자"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는 단체까지 생겨났다고 합니다.  소위 안티 기독교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기독교회를 무너지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란 유대교에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섞어서 만든 것으로 엉터리 종교라고 몰아붙입니다.

  저들 중에는 기독교인 운동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무릎 꿇고 기도드리는  의식-'세레머니'(Ceremony)도 싫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회를 선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인이 보는 앞에서 그런 세레머니를 하느냐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주는 것은 교묘하게 만든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화를 창조한다는 말은 좋은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우리 축구팀이 월드컵 4강신화를 창조하였다"는 말은 위대한 업적의 의미로 사용하는 예로 신화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봅니다.

  신화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공상적인 성격을 가진 허구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화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거짓말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이란 분은 다만 고상한 인격을 가지진 선생님이셨는데, 제자들이 선생님을 존경하여 예수님이 로마 군대에 잡혀 죽게 되자 그의 생애를 미화시키고, 신격화하였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거짓으로 신화를 지어내고 그런 신화를 전하다고 죽었다고 하면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거짓말을 해놓고 그 거짓말을 합리화하다가 그 거짓말 때문에 자기 스스로 순교 당하였다고 하면 인생의 가치를 모르는 억지인 것입니다.  그런 억지를 부리면서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여 기독교회를 폄하하고 깎아 내리려는 사람은 혹시 거짓말을 해놓고, 그것을 합리화하려다가 죽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12명 제자들이 다 미친 사람도 아니요, 어리석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도 않았는데, 부활하였다고 한번 거짓말을 하였는데, 그 거짓말을 합리화하려고 다 죽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인생은 거짓말을 변명하기 위하여 죽을 정도로 무가치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변화산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며, 그가 변모되신 것처럼 우리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3:20에서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낮은 몸이지만, 장차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변화산에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에도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려진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은 시2:7의 말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인류의 메시아가 되신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은 이사야 42:1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는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도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실 메시아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변화산에 올라가서 용모가 달라지고 옷이 빛나며, 광채가 나는 변모의 사건을 통하여 힘을 얻으시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룩한 산 변화산에서 우리 주님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 놀라운 일, 영의 세계에 속하는 위대한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제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하셨습니다.  깊이 기도하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19절 말씀에서 우리에게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어두움 속에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은 반드시 성경 말씀으로 조명해야 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연구할 때에는 사사로이 하지말고, 성령의 밝은 조명과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예언의 말씀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임을 알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신 것처럼, 사도 베드로가 변화된 것처럼, 우리의 인격과 삶이 변화되고, 성숙해져야만 됩니다.  우리들이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읽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변화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영광과 존귀를 아는 사람, 우리 주님의 능력을 알고 체험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헤매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개인적인 체험보다도 더 우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확신하지 못하면 그가 어떠한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고 해도 바른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날이 새려는 시간에 놓였으며, 샛별이 떠오르는 것처럼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았기에 이제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 오직 소망을 주님이 예비해놓으신 저 천국에 두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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