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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부장의 믿음(1)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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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만 목사

칭찬에는 힘이 있습니다. 순간적인 칭찬 한 마디이지만 그것이 마음에 담기면 에너지가 되어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칭찬은 바보를 천재로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을 보면 그는 결코 천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담임  선생님은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적힌 성적표를 받아든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낙담해하는 아들을 오히려 달래며 "아들아, 너는 다른 아이와 다르단다. 네가 다른 아이와 같다면 너는 결코 천재가 될 수 없어"라고 칭찬하며 격려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칭찬과 격려로 아인슈타인은 변하였다고 합니다.

칭찬의 말 한 마디가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줍니다.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칭찬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당연한 것일지라도 칭찬하고 작은 변화일지라도 인정하고 한 일이 비록 잘못되었을지라도 과정을 칭찬하면 칭찬은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 냅니다. 결점이 있을지라도 칭찬하면 그 결점은 장점으로 보완되고 적절한 때 칭찬은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줍니다.

우리 옆 사람을 바라보면서 칭찬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성경 속에서 크게 칭찬했던 두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과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백부장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예수님이 백부장의 말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러한 칭찬을 받은 백부장이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성경 속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러한 칭찬을 받은 백부장은 아마 평생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자부심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며 살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께 칭찬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왕이면 칭찬 받고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칭찬 받겠다는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칭찬 받겠다는 욕심이 없으면 공부 열심히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참다운 신앙인이 예수님의 칭찬에 대한 거룩한 욕심이 없다면 그것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욕심을 갖는다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가 되어 생명력을 나타낼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칭찬 받겠다는 거룩한 욕심을 가지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이 백부장을 칭찬하신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연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온 이유는 자기를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가족이 병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께 나온 것도 아닙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와 간구한 이유는 자기의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백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대장입니다. 특별히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가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파견된 백부장이라는 것은 높은 신분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인은 그저 재산의 일부였습니다. 그 당시의 종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인이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하인을 도와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직접 예수님께 나와서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자기의 가족이 병들었다면 얼마든지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겠죠?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팠다면 예수님께 나올 수 있었겠죠?
그러나 별 볼이 없는 사람, 무시해도 되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 받는 사람을 위해서 그는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우리가 전주에도 김요석 목사님 이야기를 했는데 김요석 목사님은 한센 병을 위해서 헌신하신 훌륭한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정말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며 헌신하시는 목사님이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돌아보지도 가까이 가지도 않는데 그분은 그들과 만지며 그들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북한에 용천 역의 열차 폭발사고로 1300명의 사상자가 난 것으로 보도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많은 가옥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안 믿더니 벌 받았다고 불난데 부채질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 줄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도움을 손길을 주께서 많이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될 줄 압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의 빵을 열심히 굽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끼의 식사가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작은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열심히 구우십시오. 더 많은 빵을 구우십시오. 이것이 바로 백부장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칭찬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한국 땅에 오시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자기 교회에 모시려고 안간힘을 다 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지금 정말 나타나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예수님께 먼저 안수 받으려고 예수님의 손은 아마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찾아 갔지만 나를 환영하며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그때에 사람들이 말합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셨습니까? 언제 예수님이 주리신 적이 있습니까?”
그때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5)그렇습니다.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라는 사람을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그가 어떤 날 겨울에 말을 타고 가는데 벌판에 웬 사람이 서서 오돌 오돌 떨고 있었습니다. 말에서 내려가지고 "무얼 도와드릴까요?" 그랬더니 "제가 추워요."그래서 자기 옷을 벗어서 입혔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문둥병 환자 한센 병자였습니다. 그가 벌벌 떨면서 "떨려요." 그래서 "그렇습니까?" 문둥병 환자인걸 알면서도 자기는 이제 추워졌습니다. 남을 덥게 하고 자기는 추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아! 이제 따뜻합니다." 하더니 품에 안겼던 분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오는데 "이제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았다." 주님을 만나 뵌 것입니다. 그는 너무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많은 유산이 있는 그런 부잣집 아들이지만은 모든 특권을 다 내버리고 수도사가 되고 성 프랜시스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백부장처럼 하인을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백부장의 칭찬의 이유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내가 가서 하인을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대답합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백부장은 로마의 권력자입니다. 예수님은 식민지 백성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가 가서 하인을 고쳐 주겠소.” 라고 말씀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여”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로마 백부장의 주인은 로마 황제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주’라고 부르는 것을 누가 황제에게 보고하면 백부장의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백부장은 아무에게나 ‘주’라고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칭찬 받은 백부장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잠언 18장 12절에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탉 두 마리가 한 마리의 암탉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곧 승부가 나서 약한 놈은 힘센 놈에게 쫓겨 덤불 속에 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힘센 수탉은 의기양양하여 높은 담에 날아올라 활개를 치면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나 그 수탉을 채어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덤불 속에 숨어 있던 약한 수탉은 이제 아무 두려움 없이 암탉과 같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굴과 겸손은 다릅니다. 비굴한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갖추고 있지만 낮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굴은 자격지심에 의해서 약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겸손은 당당합니다. 그러나 당당함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비굴은 당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무조건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겸손은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합니다. 그러나 비굴은 해야 할 것을 피해서 도망합니다. 

백부장은 당당합니다. 그러면서도 겸손하였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늘 말씀하십니다. 겸손해라 목사는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조금만 잘나가면 겸손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은데 속으로는 교만한 모습을 많이 봅니다.

저는 운전 습관 중에 경고 등에 주유 불이 들어오면 주유를 하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에 논산 훈련소에 찬양단들과 함께 방문하러 가다가 주유 경고 등에 불이 들어 왔는데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 경고 등을 무시하고 호남고속도로를 가다가 그만 시동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뒤에 일행들이 있어서 그 차로 톨게이트로 나가서 주유를 하고 다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겸손의 경고 등을 켜시고 다시 한번 점검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교만하여 너무 도도하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교만하여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고 내가 주인 되어 살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과장된 겸손 가운데서 포장된 교만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는가?
혹시 나는 비굴한 것을 가지고 겸손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시 나는 겸손하면 손해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기를 부리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종지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당하면서도 늘 겸손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백부장이 칭찬받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생각하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실천해야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 주위에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됩시다.
둘째는 겸손한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예수님께 칭찬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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