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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을 주신 예수님 (사 57:19~21, 눅 24: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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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목사

  ‘불리틴’이라고 불리는 1947년에 발행된 과학 잡지가 있습니다.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에 참여한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시카고대학 중심의 과학자들이 만든 잡지입니다. 이 잡지는 ‘지구종말시계’라는 것을 만들어 표지에 실었습니다. 이 시계를 ‘운명의 날 시계’라고도 하는데 물론 실제 시계는 아닙니다. 핵전쟁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사라지는 시점을 자정으로 정하여 핵실험, 핵무기 등을 살펴 분침을 조정한 가상적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자정 7분전에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1953년에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을 했을 때에 2분전으로 자정에 가까워졌습니다. 1991년 미국과 러시아가 전략무기감축협상에 서명했을 때에 17분전까지 늦춰졌습니다. 다시 1995년에 14분전이 되었다가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경쟁적으로 핵실험을 할 때에 9분전이 되었습니다. 지난 뉴욕의 9.11 테러 사건이 났을 때 7분전이 되었습니다. 이 시계는 지금까지 모두 17차례나 조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극도의 평화가 있으면 이 시계는 뒤로 물려집니다. 그러나 1분전에도 평화할 수 있고, 10분전에도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핵무기 외에도 세계의 평화를 뒤흔드는 요소들이 무한히 많이 있습니다. 이 세계는 평화하지 못한 숨은 여건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평안’의 사전적 의미는 무사하여 마음에 걱정이 없음을 뜻합니다. 평화란 평온하고 화목함을 의미하며 전쟁의 반대 개념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평강, 평화, 평안, 화평, 안녕 등의 다른 말로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은 같은 단어를 그 때 그 때 맞게 번역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이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이란 예수님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참 평화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테는 “그 분의 뜻 안에 참 평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도 평안하지 못하여 찾은 평안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에 하늘에서 천사들이 찬송하였습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 예수님의 오심은 평화를 선포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평화란 예수님이 오실 이 땅에 절실한 요구였습니다.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가장 주시기를 원하신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평안하뇨?”라고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준 평화가 있느냐?”고 하신 물음입니다.

  랍비의 창세기 주석인 ‘창세기 랍바’에는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무엇을 창조하셨는가?”라는 질문에 “고요, 평온, 평화, 휴식”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도 마지막 날에 평화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하신 일 가운데 하나는 평안을 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부활하셨습니까? 평안을 확인하시고,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잘 간직하고 있는지 확인하시고 다시 평안을 확실하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무서워 떨며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그들에게 선포하십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 보다 더 좋은 순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후에 평강을 선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뭘 주시려고 평강을 얘기하셨을까요?

첫째, 두려움을 없이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놀라고, 무서워하며, 두려워하여”.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의심이 일어나느냐”. 요한복음 20:19에는 같은 내용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놀라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평강과는 먼 상태입니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강은 필요합니다. 두려움과 평강은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디모데후서 1:7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라고 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예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안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무엇입니까? 두려움이란 영어로 FEAR입니다. False(그릇된), Evidence(증거), Appearing(나타나는) Real(현실)이라고 합니다. 즉 두려움이란 ‘현실로 나타나는 거짓 증거’라고 조이스 마이어는 ‘단순함이 주는 기쁨’이란 책에서 말합니다. 두려움이란 거짓입니다. 두려움은 거짓된 현실입니다.

  인간이 두려움을 가진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숨었습니다. 이전에는 두렵지 않았지만 죄가 사람을 두렵게 만든 것입니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두렵게 합니다. 하나님만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도 두렵게 만듭니다.

  죄는 한 마디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입니다. 두려움은 한 마디로 “하나님 없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항상 두려움에 쌓여 삽니다. 아기들이 생후 8개월이 되면 특유의 불안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이 것을 의학적으로 “아기의 애도”라고 합니다. 이 때가 되면 아기는 어머니가 자신을 잠시만 떠나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기의 애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실은 어른이라고 하지만 나이 먹은 어린 아기 같아서 사람은 누구나 이런 떠남의 두려움이 다 있습니다. 아기의 애도가 아니라 ‘인간의 애도’이지요.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기적을 베푸신 후에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새 애써 노를 저었지만 풍랑 때문에 배가 건너가지 못하고 호수 한 가운데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밤중에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실 때에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용감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물위를 걸어갑니다. 그러나 갑자기 예수님 가까이 가서 물을 보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 멀리 있을 때는 빠지지 않았는데 가까이 갔을 때에 왜 빠졌을까요? 멀리 있을 때는 마음이 예수님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갔을 때에는 마음이 예수님 멀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분리된 마음이 그로 하여금 빠지게 한 것입니다. 마음이 멀어진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후회야말로 기쁨과 평안을 앗아가는 첫 번째 도둑입니다. 두려움이 두 번째 도둑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기쁨도 평안도 빼앗아갑니다. 우리가 가난을 두려워한다면 돈이 우상이 될 것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성공이 금송아지가 될 것입니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인간관계가 신이 될 것입니다. 두려움보다 더 큰 적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두려움을 없이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18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느니라”. 두려움이란 인간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공포감은 사람들이 일부러 가지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공포 체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안 해도 체험할 일 많은데 왜 그걸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은 체험할 것이 아니라 극복할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에 하나님의 이름만 가지고 갔습니다. 그는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을 가지고 나왔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두려움을 없이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려워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에는 107회, 신약에는 42회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말씀에 의지할 때에 두려움을 없애는 것은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말씀에 동참할 때에만 절대 공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의심을 없이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고 하십니다. 그냥 하신 것이 아니라 질책하신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의 의심이 평안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의심은 평안을 서서히 훔쳐가는 좀도둑입니다.

  의심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적 의미에서 의심한다는 말은 두 생각을 지닌다(to have two thoughts)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1:6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라고 합니다. 흔들리는 것, 뿌리가 없는 것, 마음이 분리된 상태는 평안과 멉니다.

  마태복음 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승천하실 주님을 보고 경배합니다. 그런데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의심은 40일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의심이 40일 동안만 지속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지금도 그리고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한자의 사자성어 가운데 ‘의심암귀(疑心暗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라는 말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지도 않은 귀신이 나오는 듯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의심이 있으면 갖가지 무서운 망상들이 잇달아 일어나 불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도 예수님을 의심하다보니 예수님을 보고도 “귀신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의심이 왜 생깁니까? 보고도 못 믿으니까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안본 것이 믿어지겠습니까? 본다고 믿어집니까? 말씀을 못 믿으면 기적을 보아도 못믿습니다. 이 말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오던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왜 의심했습니까? 믿음이 적어서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커지면 의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사탄은 시험하는 자입니다. 의심하게 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 사탄이 있으니까 의심도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사탄은 쉴 새 없이 의심을 주는 것입니다.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에는 사탄이 시험하는 단계를 네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우리 안에서 욕구를 일으킵니다. 둘째는 우리 마음에 의심을 일으킵니다. 셋째는 우리 삶에 거짓을 하게 합니다. 넷째는 우리 믿음에 불순종하게 합니다. 사탄의 유혹은 항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게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사탄을 믿게 만드는 유혹을 합니다.

  의심을 이기는 비결이 있습니다. 레이몬드 에드맨은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하신 말씀에 대해 어둠 속에서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적 메마름이나 의심 같은 것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의 마음의 의심은 영적 메마름 때문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의심하지 마셔요”라는 시가 있습니다.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의심하지 마셔요. 당신과 떨어져 있는 나에게 조금도 의심을 두지 마셔요. 의심을 둔대야 나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으나 부질없이 당신에게 고통의 숫자만 더할 뿐입니다”. 의심은 결국 고통만 가중합니다. 고통을 가중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의심하면 의심한 만큼 스스로 고통을 당합니다. 의심하면 그만큼 손해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하십니다. 마음의 평강은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게 합니다. 마음의 평강이 없을 때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마음이 나뉘고, 의심합니다. 이런 때는 결코 예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평안은 주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내겐 아직 문제없고 평안하기 때문에 예수님 없이도 살 수가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평안은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평안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입니다. 이사야 9:6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합니다. 오실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평강의 왕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입니다. 참 평강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참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면 그 때부터 참 평안이 있고, 참 기쁨이 넘칩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의심이 멎습니다. 이 때부터 사람 사는 맛이 납니다.

  한 여인이 꿈을 꾸었는데 시장에 가서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그 가게 주인은 다름 아닌 신(神)이었습니다. 여인이 주인에게 무엇을 파느냐고 묻자 신은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팝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인은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행복과 지혜,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가게의 주인인 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 못 찾으신 것 같군요. 부인, 이 가게에선 열매를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을 팔지요.”

  그 씨앗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알면, 믿으면 평화와 사랑과 행복과 지혜, 모두 다 얻습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마음이 그 분 안에서 쉴 때까지 분주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분 안에서 비로소 평안을 느낍니다. 그분 안에서 모든 필요가 충족됩니다. 그분 안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안에서 그 분의 평안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솔로몬이란 이름은 ‘화평한 자(peaceful one)’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왕의 덕에 화평을 누린 왕입니다. 아버지 때에 가장 강한 나라를 이루었고 그 아들인 솔로몬은 아버지가 이루어놓은 많은 것을 누린 왕이었습니다. 우리도 아버지 덕에 화평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결론

  베드로는 이 평안의 과정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다”고 했을 때에 그는 물위를 걸어 용감히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물결을 두려워했을 때 의심하다가 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셔서 손을 내밀어 다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는 순간, 비로소 평안을 얻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을 잡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의심이 사라집니다. 영원한 평안이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평강이었습니다. 부활은 평강을 주시는 새 생명이었습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구름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우리가 찬양합니다. 주님이 손잡고 가실 때 평강이 있습니다. 주님이 손잡아 주실 때 시험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주님이 손잡아 주시면 평강을 주십니다.

  아론의 축도라 불리는 아론의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의 얼굴이 항상 우리에게로 향하여 우리에게 평강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론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평강 가운데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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