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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핍박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행 5:4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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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재신 목사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사도들을 잡아다가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행 5:40절에 보면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라고 했습니다. 즉 매로 때리고 채찍질하여 엄히 경계하여 또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위협하며 풀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풀어놓는 순간에 이 사도들의 태도를 우리가 주목해 봅시다.
  사도행전 5장 40-41절에 보면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자로 여기심 받은 것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합당한 자로 여기심이라는 말은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과 핍박을 받는 일에 자격을 논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모르지만 이것은 역설적인 교훈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핍박을 받았다면 그 믿음이 그 만큼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를 위해 고난 받을 수 있는 자격자입니까?

  첫째로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핍박은 절대로 아무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깨어있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에게 임합니다.
  죽은 믿음 잠들어있는 믿음에는 핍박이 임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하게 믿으려고 하면 세상이 환영합니다. 그런 믿음에는 결코 핍박이 없습니다. 핍박이 없어서 좋을까요? 그 만큼 그의 믿음이 세속화 되고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하인이 주인과 더불어서 사냥을 갔습니다.
  주인이 활을 가지고 날아가는 꿩 한 마리를 겨냥해서 쏘았습니다. 날아가던 꿩 한 마리가 화살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꿩이 날아갑니다. 주인은 또 날아가는 꿩을 향하여 활을 겨눕니다. 그러자 하인이 물었습니다.
  “주인님 날아가는 꿩도 중요하지만 떨어진 꿩을 빨리 주어 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주인이 하는 말이 “그건 이미 죽은 거야 내버려 두어도 그건  내 것이야 그러나 살아있는 저것은 내버려 두면 내 것이 될 수가 없다” 라고 하며 주인은 계속 살아있는 꿩을 향하여 화살을 겨누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핍박 없다고 안심하고 안도감을 느끼기 전에 내 영혼이 살아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영혼이 살아있고 내 믿음이 온전하게 움직이는 믿음이면 사단의 공격 목표가 됩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 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마귀의 공격 제1번입니다.
  믿음이 살아있다는 것은 성령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사탄의 공격 목표 제1호입니다.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기 전에는 결코 공회에 끌려가거나 제사장들에게 위협을 당하거나 또는 채찍질 당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받고 나더니 그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됐을 뿐 만아니라 사탄의 주목거리, 사탄의 공격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충만을 받은 다음에 공회에 끌려가기도 하고 채찍질을 당하기도 하고 환난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속에 성령 충만하므로 핍박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핍박이 올때는 “내 속에 성령이 계시기 떄문에 지금 마귀가 나를 공격하고 있구나” 라고 깨달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 째 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마귀의 공격 목표인 것입니다.
  일하지 않으면 핍박도 없고 어려움도 없습니다. 환난과 고통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땀 흘린 자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도 없습니다. 선수가 경기에 출전하지 않으면은 땀 흘릴 필요 없습니다.
  힘들게 연습  할 필요도 없는 것이구요. 그러나 출전하게 되면 연습 해야죠 땀 흘려야죠 그러나 땀흘린 만큼 영광이 주어지게 되는 것을 아시기 바람니다.
  일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일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일하다가 핍박을 받고 일하지 않는 사람 핍박이 없다고 생각할때 부지런히 일하여 스스로 하나님 앞에 고난을 받는 그런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설겆이 하지 않으면 그릇깰 일 전대로 없습니다. 그러나 설겆이를 하게되면 그릇을 깰 때도 있습니다. 그릇 깨는 것이 무서워서 설겆이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쓸모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마귀에게는 핍박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일하시고 그에게 축복하시고 그와 함께하시는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람니다.

  네번째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마귀의 시기 질투를 받아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5장18-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주님은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그 말은 세상이 너를 핍박하면 그 말입니다. 그것은 너를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를 미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을 또 미워합니다.
  여러분 주님 사랑하십니까?
  주님 사랑하면 마귀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것은 영적으로 좋은 일입니다. 마귀에게 기쁨을 받지 마십시오. 마귀가 기뻐하는 일을 하지 말라 그런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29장에 보면 형제간의 불화로 고향집을 떠나 외삼촌 집에서 숨어 살던 야곱이 라헬을 좋아하였습니다. 창29:20에 보면 그를 연애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라반은 내 딸과 결혼하려면 7년 동안 온전히 봉사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내를 얻고자 하여 7년 동안을 봉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표현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29:20보면은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동안 라반에게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7년은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라고 한 것은 사랑 안에서는 아무리 큰 어려움도 7년이 수일 같이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고난도 달게 받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나의 신실한 믿음의 관계에 있어서는 환난도 기쁨으로 되어지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이 스트레스 받고 압박을 받으면 하루도 수천 년처럼 여겨집니다.

  고난의 현장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 기도 해보신 분은 잘 아실겁니다. 한 끼를 하더라도 대개 아침부터 시작해서 12시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12시가 왜 그렇게 안 오는지 시간이 안 갑니다. 그러나 무슨 오락을 한다든지 재미있는 시간을 즐기고 있다고 해 보십시오 이거 언제 이렇게 시간이 다 갔냐! 라고 아쉬워합니다.
  오늘 바라기는 여러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그렇게 주관적으로 기쁨과 축복의 시간이 느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짧게 느껴지고 어떤 사람은 길게 느껴집니다. 은혜받는 사람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힘들고 어렵고 핍박과 박해가 고통스러워도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기쁨과 축복이 될수 있으며 알지 못하는 희열과 환희와 행복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핍박도 달게 받았습니다.

  주를 위해 능욕 받는 자들에게 어떤 일이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보증 수표가 됩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 말합니다. 바울은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의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 거저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으면 아무 공로 없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믿고 구원받은 후가 문제입니다. 구원받는 것하고 천국 들어가는 것하고 물론 같은 말이지만 그 의미상으로는 다릅니다.

  여러분 지금 다 구원받았습니까?
  모두가 다 아멘할겁니다. 맞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나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그걸로 끝납니까? 아닙니다. 그걸로 만약 끝난다면 지금 천국으로 직행해서 가야됩니다.
  예수 믿는 순간에 세상 떠나서 천국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믿는 순간 즉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예수 믿고 나서부터 천국 갈 때까지 시간의 여유를 주셨습니다. 그 시간의 여유가 내가 예수 믿고 후에 살아가는 세상의 삶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 믿는것 까지는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 이것은 거의 소홀히 생각합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될 것인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믿는 것과 예수 따르는 것의 차이
  예수를 믿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예수님은 마 16: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나를 믿으려거든 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따라오려거든 .... 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말씀은 신앙생활의 초보자들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예수를 좇는 것은 예수와 함께 예수가 당한 고난을 받고 예수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에게 이젠 됐다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는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는데까지는 관심을 갖습니다마는 예수를 따라가는 일에는 관심을 거의 갖지 않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를 자랑하면서 예수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지 않아도 다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러나 20세 이상된 남자로서 부적격 사유가 없는데도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지 않으면 그는 불법자가 되는 것처럼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주님은 한 가지 의무를 지워줍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라가야할 주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환난과 고난의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말씀하시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과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은 또 디모데에게 “너는 고난을 받으며 전도의 일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도 베드전서 4장 12절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험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9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고난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받을 지라도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해 놓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해 놓고 사는 사람은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목숨을 하나님께 부탁해 놓고 산다면 죽는 것이 두렵겠습니까? 환난이 겁나겠습니까? 여러분의 일생을 하나님께 맡겨놓고 사십시오. 여러분은 환난과 시련에도 조금도 두렵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니까 겁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불가피합니다.
  성경은 고난과 영광이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고난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것은 영광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고 예수님은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영광을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많은 환난과 고난이 있어도 예수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아도 고난과 그 박해는 영광과 축복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게 바로 신앙생활의 축복입니다.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 어떤 행복이,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 어떤 기쁨이 있습니다. 환난이 오고 핍박이 와도 남편이 예수 믿는다고 박해를 해도 부모가 예수 믿는다고 핍박을 해도 재산을 빼앗아 가도 주님과 나 사이에 바로 이 비밀스런 관계를 유지하게 되어질 때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이런 행복감이 기쁨의 감정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하게 여기심을 받은 것에 대하여 기뻐하면서 돌아가서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외치고 또 외친 것처럼, 야곱이 7년 동안을 무보수로 봉사하면서도 자기의 아내를 얻고자 하는 사랑 때문에 오히려 기쁨으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핍박받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요 고난 받는 그 자체가 바로 성령 충만하다는 증거요, 그리고 주의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요,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사도들처럼 주님 주시는 참 기쁨을 맛보시면서 즐거움으로 신앙 생활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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