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불이 내린 산(갈멜산) (왕상 18:36~40)

  • 잡초 잡초
  • 905
  • 0

첨부 1


- 설교 : 고신일 목사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열왕기상 18장 36~40절) 

<목회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복된 새 아침에 우리를 주인공 삼으심에 감사 드립니다. 찬양 드립니다.
세상에 살며 지친 몸, 죄와 어울려 지낸 추한 몸,
이런 저런 일에 시달려 병든 몸… 가지고 나왔습니다.
용서하시고 치료하시어 새 힘 주시옵소서.
하나님, 하나님 만나기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 왔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처럼 이런 저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기 앉았습니다.
주일을, 예배를 귀히 여겨 왔습니다.
신령한 은혜의 복을 간증하는 특별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럽고 추한 죄, 낙심하고 절망한 근심 덩어리
모두 성령의 불로 소멸하여 주시옵소서.
이 귀한 날,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군대에 나가 있는 이들, 특별히 이라크에 파병되어 나갈 청년도 있습니다.
객지에 나가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취업을 나간 이도 있습니다. 병상의 환자들도 있습니다.
저들이 어느 하늘 아래 있든지 평안함으로 지켜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이 귀한 시간 역사하실 줄로 믿고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 "반갑습니다"
만나면 반가운 사이 이기를 바랍니다. 못 만나면 보고 싶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느 회사가 신문에 낸 광고에 보니 (2005. 4. 22 LG Telecom)
한 사람이 평생동안 일하는 시간 23년, 잠자는 시간 20년,
기다리는 시간 3년, 화내는 시간 5년, 웃는 시간은 겨우 89일이라고 합니다.
누구 기다리게 말고, 화내지도 말고, 웃고 사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에게 [웃고 사십시다. 얼굴에 평안함이 있어 좋습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오늘 한 날도 미소지으며 보내는 평안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디셉사람 엘리야
 
주전 870년 경(2875년 전)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이 죽고
그 아들 아합이 왕이 되었습니다.(왕상16:29)
그때 북쪽에 강대국 시돈이 이스라엘을 무척이나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중 아합은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왕상16:29~31)
그러나 그 결혼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궁중과 이스라엘 곳곳에 이방신 바알을 위한 신당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제단을 다 무너뜨리고, 여기저기에 바알 신당을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이스라엘에 두었습니다.(왕상18:19)
 
마침내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나님인지,
바알이 하나님인지 몰라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게 되었습니다.(왕상18:21)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비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비가오지 않으니까 사방에서 아우성이었습니다. 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 때 등장하는 선지자가 바로 디셉사람 <엘리야>입니다.
  디셉, 디셉사람(Tishbe, Tishbite)
  길르앗에 있는 한 성읍으로 엘리야의 고향이다(왕상17:1).
  디셉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요단 강 동편, 얍복강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리스팁'(Listib)이라는 주장과
  또 하나는 서편인 갈릴리 지방의 '티스베'(Tishbe)라는 주장이 있다.
디셉사람 엘리야
  엘리야의 출신지를 나타내주는 말로 엘리야는 디셉에서 나서
  길르앗으로 이주하여 산 것으로 보인다. 엘리야의 아버지나
  그가 속한 지파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그를 '디셉사람 엘리야'라고 지칭하는 표현은 여섯 번이나 나온다.
  (왕상17:1, 21:17, 28 / 왕하 1:3, 8:, 9:36)  - <비전성경사전>에서 인용 - 

  엘리야의 이름에는 "내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많은 선지자 중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산상에서도 율법의 대표로 모세가 나타났고,
선지자의 대표로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마17:1~13, 막9:2~13, 눅9:28~36) 
 
아합왕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면서 많은 죄를 저질렀습니다.
첫째, 이방의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삼았으며
둘째, 이세벨이 섬기던 바알신을 받아들였고
셋째, 전국 각지에 바알신당을 짓게 허락하였으며
넷째, 바알의 선지자들은 보호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죽였고(왕상18:4)
다섯째, 백성들에게 강제로 바알을 섬기게 하였으며
여섯째, 하나님의 제단은 헐어버렸고
일곱째,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안일에만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아합왕의 죄를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엘리야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숨겨주고
잘 받든 오바댜를 통해 백성들과 왕과
바알 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을 모아 놓고
참신과 거짓 신을 판단하는 전무후무한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왕상18:19, 22, 25~46)
이 사건이 있었던 곳이 갈멜산입니다.
 
갈멜산에 지금 가보면 이곳에는 1886년 세워진 까르멜파 가톨릭 수도원인
'엘리야 수도원(Monastery of Elijah)이 있습니다.
수도원 마당에는 칼을 높이 쳐들고
바알 선지자의 목을 치려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안쪽 조각 벽에는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대결 장면들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이번에 제가 찍어온 사진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바알 선지자들이
송아지 한 마리를 제물로 잡아놓고 그들의 신을 부릅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 했지만
소식이 없었습니다.
26절에 보면 바알 선지자들이 단 주위에서 뛰놀 듯 했습니다.(26절) 
아이들이 뛰놀 듯, 무당이 춤추듯 몸부림을 쳤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엘리야는 저들을 향해 "큰소리로 부르라 너희들의 신이 묵상하는가 보다,
외출했나보다 잠이든 것 같으니 깨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안타까운 그들은 큰소리로 자기들의 신을 부르다가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하여 피가 흐르게 했습니다.(28절)
물론 저녁때까지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왕과 백성들을 가까이 오게 하고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기 시작했습니다.(30절)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 수대로 열두 돌을 취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곡식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seah, 곡식을 되는 히브리인의 단위로 1세아는 약 7.6ℓ에 해당된다)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12통의 물을 붓습니다.(33~34절) 
 
이는, 아합 왕으로 인해 무너진 제단의 회복,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무너진 단을 수축하길 원하십니다.
 
[여호와의 단]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만나던 교제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영광 중에 임재 하셔서 백성들의 예배를 받으셨고,
백성들은 거기서 그 영광스런 하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제단 그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용서가 있었습니다. 죄사함의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단이 다 무너졌습니다.
왜 여호와의 제단이 무너진 채로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바알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엎드림의 자리가 여호와의 전에서 바알의 전으로 옮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왜 무너진 제단 수축을 먼저 했습니까?
예배의 중요성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때문에 제단을 먼저 쌓았습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첫 번째 행위이며, 하나님을 뵈옵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이 시간 우리도 우리의 예배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을 만나는 제단이 무너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는 얼마만큼 소중합니까?
예배가 일보다 소중합니까? 예배가 인간관계보다 우선합니까?
봄철만 되면, 가을이 되면 인간관계가 예배보다 중요한 사람이 많아집니다.
결혼식, 동창회 모임, 등산하느라 주일을 범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우선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배의 단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배는 능력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그 관계를 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예배가 바르게 세워지고 예배가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우리 기둥교회 예배가 두려움이 있고
설레임 감격과 감동이 있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면서 졸고, 시계만 보고 언제 끝날 것인지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의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리 없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먼저 무너진 단을 쌓고 예배를 준비했습니다.
초대교회도 전도하고 나면 제일 먼저 한 일이 예배 드리는 장소를 마련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전도하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예배 드리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여 예배 드리는 교회를 지었습니다.
요즘에도 교회를 지면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교회를 짓는 일에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지 의심스럽습니다.
 
예배에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정성된 마음, 단정한 복장으로, 정한 시간 전에 나와서
예배를 준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헌금도 주머니에서 즉흥적으로 내지 말고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깨끗한 돈으로 봉투에 담아 기도제목을 적어서 드려야 합니다.
기도하며 준비하여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요즘 교인들을 보면 예배에 대한 태도가 너무나 안 좋습니다.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신발도 목욕탕에서나 신는 슬리퍼 같은 것을 신고 옵니다.
여름이 되면 맨발에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이 있는데…
교회에 왜 오는 지 모르겠습니다.
새 옷을 입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갖춘 단정한 차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식장에 가려 해도 예식에 맞는 옷차림이 있습니다.
잔치를 하는 집에 대해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단정하지 않게 예식에 참석하는 것은 무례입니다.
장례식에 가려 해도 장례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슬픔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러 가면서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고 붉은 넥타이를 매고 가면 안됩니다.
이왕이면 검은색의 옷을 입고, 단정하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예의를 갖추어 예배에 맞는 복장과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 전에 나와서 기도하며 준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이 "기둥교회 주차장이 모자라서 못가겠다"고 말합니다.
예배 전에 오면 주차장에 자리가 많습니다. 늦게 오니까 문제지요.
부천대 주차장, 리베르떼 주차장… 등에 주차공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차하고 조금만 걸어오면 됩니다.
극장은 멀어도 주차하고 걸어서 가면서
왜 교회에 올 때는 꼭 교회 주차장에 주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는 최선을 다해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 듣고 헌신을 다짐해 보십시오.
그런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불이 임할 줄 믿습니다.
 
엘리야는 드릴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엘리야는 새로 수축한 단에 소를 잡고 거기에 각을 떠서
물을 가져다 부어 도랑에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단이 세워진 그곳은 산꼭대기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가물어서 물이 없을 때였습니다.
사막지역인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 비가 오지 않아 물이 천금같이 귀한 때인데
그 귀한 보물 같은 것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물이 아닙니다. 희생제물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예물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이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천금보다 귀한 보물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돈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작은 동전조차도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셨습니다.
부자는 많은 것을 넣었지만 남아 있는 돈이 많이 있었지만
과부는 비록 동전 두 개지만 그것이 재산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같은 돈이지만 가치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귀한 것, 보물 같은 것, 희생의 제물을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마6:19)
20절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6:20)
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6:21)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우리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가 36~37절입니다.
아마 이때 기도하는 엘리야의 눈물이 갈멜산을 적시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도록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 엘리야에게 큰 기대를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엎드려야 할지,
아니면 바알에게, 우상단지 앞에 엎드려야 할지 머뭇머뭇 거렸습니다.
그 머뭇머뭇 거리는 사람들에게 엘리야가 한 말이 21절입니다.
21절에 보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왕상18:21) 했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결단하라고 소리쳤습니다.
머뭇머뭇하지 말고, 하나님인지 바알인지 망설이지 말고… "선택하라" 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참이냐 거짓이냐…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영어에 '선택'이라는 단어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choice'이고, 다른 하나는 'decision'입니다.
'choice'는 '많은 것 중에 하나를 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decision'은 '해결, 결정, 결단'의 뜻이 더 강하지만
거기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만 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택하라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 따르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결단하면서 나머지를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결단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때문에 나머지를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한번 그림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몸에 피를 내가며
소리 소리 지르고 춤추었지만 불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엘리야 혼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것을 지켜 본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사람들의 마음에는 대중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의 힘이 대단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편임을 믿었습니다.
 
엘리야 같은 믿음을 가졌던 시편기자의 고백을 함께 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118:6)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118:7)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만군의 여호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엘리야처럼 믿고, 엘리야처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능력을 행하십니다.
 
엘리야는 믿음의 기도를 간절히 드렸습니다.
37절 보세요.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왕상18:37)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으면 아합왕으로 부터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응답이 되어도 좋고 안되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의 기도는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36절에 보면 엘리야는 세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1) 백성들로 하여금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2) 내가 주의 종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3)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38절 다같이 봉독합니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왕상 18:37)
 
"엘리야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쌓은 제단에 불로 응답하사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런 역사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축원합니다.
믿는 자의 기도에 응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낙담하셨습니까?
여러분, 목숨 걸고 기도하셨습니까?
목숨 걸고 기도하지도 않고 응답이 없다고 낙담합니까?
목숨을 걸고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좀더 기다리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응답인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몸에 가시가 있었습니다.(생선 드시다 걸린 가시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몸에 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어려우면 바울은  "몸의 가시를 옮겨 주옵소서"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고후12:8)
그러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고후12:9)
그것이 오히려 네게 은혜야. 그 아픔 때문에, 그 가시 때문에
더 기도하게 되고, 전도하게 되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 매달리게 되니 그것이 은혜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시때때로 가슴을 후비며, 두드리며, 울렁이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바랍니다.
불태움을 받는 믿음의 단을 쌓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밤부터 수요일까지 밤과 새벽만 (낮에는 일하시고, 일 가시고…)
완전 숫자 7번… 밤 4번, 새벽 3번… 부흥회를 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부흥은 영적 생명과 생기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흥은 영적 침체에 빠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원만치 못한 사람들이
영적인 건강을 회복하는 기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 기회에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자신을/믿음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어부가 나가기 전에 그물을 점검하고 꿰매듯이…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믿음의 승리를 하기 위해
이번 부흥회를 통해 영적인 그물을 꿰매야 합니다.
엘리야가 제단을 쌓은 것처럼 우리도 믿음의 단을 다시 쌓아야 합니다.
정성을 드리며 부르짖어… 눈물로… 기도하며…
갈멜산에 쌓았던 엘리야의 제단을 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제단에 성령의 불로 역사 하실 줄 믿습니다.
 
응답의 불, 소멸의 불로 역사 하시면
엘리야가 기도한 후에 가물었던 땅에 단비가 내렸듯이…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은혜와 축복의 단비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가정도, 믿음에도…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불을 끌어내렸던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평생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불필요한 것, 고쳐져야 하는 것, 새로워 져야 하는 것
성령의 불로 태움 받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거룩한 주일에 갈멜산에서 불을 끌어내린 엘리야의 기도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이 되게 하여 주셔서
응답의 불, 소멸의 불로 역사하시는 성령을 체험하며
가물어 메마른 심령에 축복의 단비를 내리시는 은혜를 받게 하시고
그 복을 간증하며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5년  4월  24일 주일낮설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