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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골 3:22 ~ 골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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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제가 미국에서 다니던 신학교는 작은 시골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그런 가운데 어떻게 일자리를 구하게 되면 또 한 가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작은 동네라서 제가 신학생이라는 것을 빤히 알고 있는 주인이나 상사 앞에서 혹시라도 학교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다른 동료 신학생들도 꼭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모든 신자들의 직장생활에도 꼭 같이 적용됩니다. 우리가 어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바로 우리 한 사람의 언행을 통하여 기독교회 전체에 대한 평판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신자들이 직장생활에서 지켜야 할 원칙을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노사관계라 할 수 있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산하의 사회 구조를 미루어 볼 때, 초대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 중에 가장 흔한 직업을 통계 내어 보았더라면 아마 하인 또는 노예가 절대다수로 나왔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종이라는 것은 사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는 도무지 직업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월급은 고사하고 겨우 먹고 살 것만 제공받았으며 주인의 기분에만 조금 틀어져도 일방적으로 생사여탈까지 당하는 그런 처지에서 하루살이 목숨처럼 살고 있던 것이 당시 노예들의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초대 교회에서는 바로 그런 종이라는 것이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회 직업이었으며, 그런 직장생활까지도 신자답게 성실히 살 것을 명받았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비록 숫자는 상대적으로 훨씬 적었겠지만, 초대 교회 안에는 또한 그런 종들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들 역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사람들 중에는 집에서는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종이 교회에서는 더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어서 좀 거북한 입장에 있는 교인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주인들 역시 당시의 불신 사회의 주인이 종을 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주인 노릇을 하도록 명받았고 또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직장 생활을 어떻게 하라고 명하셨는지, 오늘날의 우리들 역시 매주 엿새 동안 일하고 있는 직장 생활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는지를 이 시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의 직장은 주님 앞에서 지키는 ‘깨끗한 양심’이 나타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과 23절에 기록하기를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종들을 향하여 우선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앞의 문맥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단 신앙문제는 제외해 두고 그 나머지, 즉 자기가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에 대하여 상전에게 순종해야 함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인들이 너희에게 일 시키는 말들은 다 순종하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처럼 순종해서 일할 때 지켜야 할 자세를 가리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눈가림’이라는 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직장이나 사업에서 가장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나라 남자들이 군대에 갔다 오면서 배우게 되는 대표적인 요령이 바로 ‘대강 철저히’라는 것 아닙니까? 그저 상사에게 야단맞지 않을 정도로, 그저 고객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까지 ‘대강’만 하면, 그 정도로만 ‘철저히’ 해도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적당히 ‘눈가림’만 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불변의 요령이요 비결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만약 그 이상 진짜로 ‘철저히’ 한다면 이것은 천하에 없는 바보요 사업을 밑지게 만드는 길이라는 사고방식이 불신자들의 직장과 사업처에서는 철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사회에서도 그렇다면, 옛날 종이나 노예 되었던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야말로 정말 ‘눈가림’만 해서 안 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이 보지 않는 데서 더 열심히 일한다고 봉급이 느는 것도 아니고 자기에게 자유를 줄 것도 아닌데, 어차피 평생 남의 손에 달린 목숨 부지해 나가기만 하면 그만인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해서 눈가림하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불신자의 경우라면 정말 더 이상 생각조차 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성경 말씀은 뜻밖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바로 깨닫고자 할 때, 이 명령을 제일 처음에 받았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주된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 노동의 대가도 받지 못하고 노동자의 권리라고는 조금도 주장할 수 없던 기가 막힌 직업 아닌 직업을 가지고 살던 종들을 가리켜서, 그들의 주인을 섬길 때에 그 일마저 마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열악한 직장생활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 곳조차 예수님 앞에서 신자로서의 깨끗한 양심과 성실한 자세가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직장이나 사업처에서 사람의 눈을 속이고 꾀를 부리고 남을 등쳐먹으려 하면, 그것은 주인이나 고객의 눈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바로 우리 주님의 눈을 피하고 속이려는 것과 꼭 같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것은 오직 종업원에게 부당한 못된 사장과 나 사이의 문제이고, 우리 생각에는 이것은 신앙과 아무 관계없는 불신 고객과 나 사이만의 문제인 것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 앞에서 각자의 양심에 직결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장 만큼은, 내 사업처 만큼은 양심 좀 어기고 살아도 되는 곳이라고, 양심 문제에 있어서는 면제받은 특별구역 같은 곳이라고 착각하면 결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눈이 다른 곳은 그 어디에든 다 있지만 이곳만큼은 없다고 속단하는 것과 꼭 같은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눈가림하고 거기서 속이면, 그것은 바로 교회 안에서 우리 주님을 속이려 하고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근본적으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라면 그 어디에서나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듯이, 직장과 사업처에서도 늘 주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깨끗한 양심과 성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의 직장은 주님께로부터 받는 ‘물질 축복’이 결정되는 곳인 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골로새서 3장 24절과 25절에 기록하기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유업의 상」이라 함은 바로 신자가 주님께로부터 받게 될 이 땅의 기업의 축복과, 또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누리게 될 천국의 상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 남의 밑에서 종살이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지금 그 육신의 상전을 마치 주님께 하듯 성실한 양심으로 섬기면 그 보답은 바로 주님께로부터 직접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직장생활에서 「불의」를 행하면 그에 대한 보응 역시 하나님, 즉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고」 항상 그 중심을 보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불의에 합당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직장생활 역시 궁극적으로는 그 육신의 상전을 섬기는 곳이 아니라 바로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세상 직장을 ‘주님을 두려워하는 양심과 성실함으로 일하라.’고 명령하셨으니, 과연 그렇게 일했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상’과 ‘보응’을 내리시는 분도 역시 실제적으로는 육신의 상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 당시 종이었던 신자들에게 있어서 「유업의 상」이라고 할 때에는 아무래도 내세에 누리게 될 상급에 해당되는 퍼센티지가 훨씬 더 많았고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인 노사 구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의 자본주의에서 사업생활을 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이 말씀이 적용될 때에는, 그래도 이 땅에서 누릴 기업의 상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직분을 통해 봉사할 수 있는 것도 상이고, 가정에서 이전보다 더 화목하고 평화스럽게 살 수 있는 것이 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승진하고 사업의 수익이 느는 것 역시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기업의 상임에 분명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직장을 통하여 주님께서 내게 이 세상에서의 물질 축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곳은 정말 매일같이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매사에 주님을 대하듯이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은 주님 앞에 하듯이 하지 않으면서, 월급만은 주님께서 이 직장을 통하여 더 올려 주시고, 이익만은 주님께서 이 사업처를 통하여 더 풍성하게 내려 주시기를 바란다면 그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께 하듯 사장을 위해 일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듯이 고객을 맞이한다면 그런 직장생활에 축복이 넘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불신자들의 사업 구호에도 ‘고객은 왕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저 구호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고객을 왕처럼 대해 주는 서비스 좋은 가게에는 그 누구나 한 번이라도 더 자주 가게 되는 것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고객을 왕처럼만 대해도 그런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면, 고객을 주님께 하듯 대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거래처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신용’이 생명입니다. 어떤 물품을 어느 날까지 납입하도록 계약을 한다든지 얼마의 금액을 언제까지 지불하도록 약속을 했으면, 비록 그 때문에 당장은 손해를 보는 일까지 생기더라도 일단 그것을 먼저 지켜야만 앞으로 더 많은 주문을 받을 수 있고 더 큰 대부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거래처 사람들을 주님을 대하듯이 신실하게 대하고 바이어(buyer)들과의 약속을 주님께 지키듯이 철저히 지키면서 회사와 공장을 운영한다면, 어떻게 그런 기업에 주님께서 ‘유업의 상’을 쏟아 부어 주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매사에 ‘각 사람이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유업의 상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종과 노예로 살아야 했던 초대교회 신자들까지도 끝까지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성실히 행하게 하신 후에 결국 천국의 유업으로 완전히 갚아 주셨습니다. 하물며 그들보다 몇 배 몇 십 배 더 좋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더욱 열심히 일하고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불의’를 행한 자에게는 ‘불의의 보응’으로 갚아 주시고 오직 ‘주를 섬기듯이’ 일한 자에게는 그 행한 일에 대하여 조금도 손해되지 않도록 정확히 계산해서 금세와 내세에서 완전히 갚아 주시는 주님 앞에서 늘 근면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그 응분의 상급을 이 세상에서의 물질 축복을 통하여서도 풍성하게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신자의 직장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심을 뚜렷이 발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골로새서 4장 1절 말씀에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찌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초대교회에는 바깥 사회에서는 종, 혹은 노예까지 거느리고 있는 주인들, 즉 ‘상전’된 자들 역시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사회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런 노예 제도란 것이 잘못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신자의 참된 의무는 이 세상의 모순된 사회제도 자체를 개조시켜 완벽한 유토피아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상 속에서도 천국 소망을 보여주는 빛이 되고 천국 행복의 맛을 내어 주는 소금이 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 당시 신자로서 세상의 상전이 된 자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최선은 바로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푸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만 해도 신자로서 돋보이는 상전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자기 종이나 노예들에게 「의나 공평」을 베푼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조차 되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소위 가장 현명하다고 이름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까지도 ‘노예는 말할 수 있는 도구다.’라는 정의를 내렸을 정도이니, 다른 모든 상전들이 자기 종들을 조금이라도 사람처럼 취급해 줄 수 있는 여지란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특히 ‘의나 공평’이란, 사람들 중에서도 자유민, 로마 시민 등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고차원의 개념이었는데, 그것을 자기가 부리는 짐승이나 도구 같은 존재에 불과한 노예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도 안 될 소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신자된 상전들만은 그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네들에게도 역시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하늘의 상전’께서 원래는 도무지 ‘의나 공평’으로 대접받을 만한 대상이 될 수 없었던 자신들을 그처럼 선하게 대해 주신 은혜를 먼저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신자 상전들은 자기의 종들에게도 그처럼 대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22절에서 종들에게 말할 때에도 「너희 육신의 상전」이란 언급이 있었습니다. 이 「육신의」라는 수식어는 그 종 된 신자들의 입장에서도 진짜 상전은 따로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 후에 24절에서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그 진짜 상전을 명확하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 땅의 상전들이 잠시 그들의 육신은 제어하고 있다할지라도, 진짜 하늘의 상전이 그들의 금세와 내세를 주장하고 계심을 깨닫고 있을 때, 바로 그 영원한 주인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서 종의 직분까지도 오직 성실한 마음으로 행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상전이든지 종이든지 양쪽 다 자기의 진짜 주인은 꼭 같은 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되어야지만 상전으로서든지 종으로서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과 처지에서 올바로 처신하고 최선의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과 생활의 주인은 항상 어디서나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기 쉬운 곳, 하지만 가장 똑똑하게 상기해야 할 곳이 바로 직장생활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곳이야말로, 또 하나의 주인 즉 ‘육신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 즉 ‘하늘의 상전’을 잊게 만드는 시험이 가장 강하게 일어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장이 내 밥줄을 거머쥐고 있는 진짜 주인처럼 보이는 곳이 바로 회사입니다. 내 수입과 생활과 여생이 어떻게 될 지를 결정하는 그 주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여겨지기 지극히 쉬운 곳이 바로 내가 벌이고 있는 사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유일한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 곳이 교회 안이라고만 착각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집의 주인이시요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다.’라는 표어를 걸어 놓고 사는 곳이 자기 가정으로만 제한되어서도 아니 됩니다. 일주일 중 엿새 동안, 그리고 하루 일과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각자의 직장 생활이야말로 ‘과연 내가 모시고 살고 있는 단 한 분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가장 분명하고 솔직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인 줄을 기억하고서, 사원 신자는 사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자기의 주인 되심을 고백하고, 사장 신자는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 꼭 같은 예수님이 자기의 진짜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섬길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일찍부터 알기는 했지만 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 내리는 것을 보면서 ‘저 흰 눈처럼 우리 영혼도 깨끗하게 씻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만 알다가, 그 눈을 보면서 ‘오늘 출근하시는 교우님들의 길을 지켜 주시고 장사하시는 교우님들의 가게에 손님이 떨어지지 않도록 특별히 도와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줄 알게 될 때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성도들에게 바른 헌금 생활을 가르치고 스스로 본을 보이고자 하는 것은 비교적 일찍 시작했지만, 성도들이 주일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바치기 위하여 주중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작정한 헌금을 바치기 위하여 매주일의 매상을 얼마나 초조한 심정으로 세고 있는지 그 형편을 구체적으로 알게 될 때까지는 훨씬 더 오래 걸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여러분께서 신앙생활 좀 바로 해 보고자 할 때, 교회 안에서나 가정에서 뿐 아니라 바로 엿새 동안의 일터에서 그 얼마나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런 장님 같은 목사와는 달리 처음부터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주님께서 그 최악의 조건 속에서 매일 고된 노동을 하고 살았던 초대 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그 노예 생활까지도 바로 내게 하듯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살맛 없고 재미없고 아무 보람도 없는 일을 직업처럼 여기고 일해야 했던 그들에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활까지도 바로 당신을 대하듯이 하면 바로 그 직장생활조차 큰 은혜와 축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물며 여러분에게야 무슨 다른 말씀을 해 주시겠습니까? 한 주일 사는 동안 직장에서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며 한 푼을 더 벌기 위해서 악전고투하는 여러분을 오늘도 잘 아시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들 그 생활 역시 나를 대하듯이 해 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직장 생활을 그저 비정한 곳이라고, 지겹고 짜증나는 곳이라고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업처가 먹고 먹히기 위해서 살벌하게 경쟁하며, 잘 속이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곳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이야말로, 여러분께서 엿새 동안 우리 주님을 가장 자주, 가장 가까이 만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이야말로 여러분께서 예수님이 바로 곁에서 보고 계시는 줄 알고 선한 양심을 발휘해야 하는 곳이며, 바로 그곳이야말로 성실하고 충성되이 섬긴 자가 주님께서 주시는 금세와 내세의 상급을 받아 누리는 곳이며, 바로 그 곳이야말로 여러분이 예수님만을 진짜 내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 아닌지가 완전히 판가름 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직장 생활을 통하여 여러분의 진짜 주인의 이름이 여러분의 사장이나 여러분의 고객에게 어떻게 보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업을 통하여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평판이 여러분의 거래처나 여러분의 직원들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 - 바로 이 명령을 따라서 각자의 양심과 성실성을 깨끗하게 발휘하고 각자가 세상에서 받을 물질 축복의 문을 터뜨리며 각자가 정말 예수님만을 유일한 주님으로 믿고 있음을 진실하게 증명함으로써, 자신의 직장과 사업을 통하여서도 매사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내려 주시는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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