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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정 회복하기(1) (고전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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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구주 대망 2005년 4월 둘째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활짝 핀 화사한 봄이 찾아왔는데도 무기력한 삶을 사는 이웃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춘곤증을 이겨내기 위해 “활기를 되살리기”라는 새로운 연속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의 배후에 자리한 창조적인 힘은 모두 열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위대한 음악이든, 뛰어난 건축이든, 놀라운 드라마든, 탁월한 문학이든 마찬가지입니다. 타오르는 열정이야말로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는 도가니와 같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것도 열정이 없이는 성취된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것도 열정이 없이는 지속된 것이 없습니다. 열정은 바로 새로운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개발하게 합니다. 열정은 새로운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게 하는 힘입니다.

열정은 보통 사람으로 하여금 비범한 사람으로 만드는 추진력입니다. 운동선수로 하여금 모든 신기록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원동력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열정 때문에 일어납니다.

열정은 삶에 힘을 가져다줍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사실 여러분의 삶에 이런 열정이 사라지면 산다는 것이 고달프게 됩니다. 피곤하고 지루하고 단조로워집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열정이 사그라진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목숨만 부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열정적인 삶을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기쁨과 감격에 타오르는 삶을 살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정열과 능력, 감격과 기대에 넘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의 삶이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십시오. “내가 온 목적은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 온 것이다.”(요10:10하, NLT)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가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활기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의미 있는 삶, 생기가 넘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겨운 삶을 살 존재가 아니라 생을 즐기면서 살아야할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은 삶을 즐기지 못할까요? 왜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고백을 할 수가 없을까요? 열정을 가진 삶을 살지 못하고 그저 비실대고 있을까요? “요즈음 어떻게 지냅니까?”라고 물으면 “그저 그럭저럭 지내요”라고 답합니다. 하나님은 그럭저럭 지내라고 여러분을 여기에 남겨두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를 감격적인 모험에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왜 한때는 천장에 닿도록 헬륨 가스가 가득해 있는 풍선같이 되어 있다가 어떤 때는 바람이 다 빠져서 바닥에 뒹굴고 있는 그런 처지로 전락하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에는 온 세계가 내 품에 있는 것처럼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뒤에 대학을 졸업해 보니까 직장하나도 잡을 수가 없었어요. 이태백으로 전락해 있는 이태백정도가 아니라 화백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일류대학을 졸업했고 화려한 성적으로 공부는 했는데 백수가 되면 그건 화백이라고 그러더라고요 “화백”

갑자기 꿈이 사라지고 야망은 움츠려들고 활력을 상실한 처지에 빠지고 맙니다. 왜 그런 자리로 전락하게 됩니까? 그런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미 죽어 있습니다. 생명이 끝나기 전에 생기가 사라집니다. 정리해고와 함께 삶의 모든 활기를 잃어버리도록 하나님은 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독수리같이 날아오르도록 하나님은 의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가 열정을 가지고 모험에 가득한 삶, 능력이 가득한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오늘부터 “활력을 되살리기”라는 새로운 연속설교를 위해서 우리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원인을 분석하는 일을 먼저 해야겠습니다. 활력이 사라진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석해 보아야 우리 삶에 활기를 되살릴 처방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봄을 유난히 피곤하게 만드는, 우리의 삶을 고갈시키는 원인을 먼저 살펴봅시다. 오늘 네 가지 일반적인 원인을 살피고, 다음 주일에는 네 가지 영적인 원인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 활력을 없이하는 생기를 빼앗는 일반적인 원인들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감정적인 요인들, 그리고 관계적인 요인들을 네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봄을 맞이해서 우리를 곤하게 하는 신체적인 요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목사보다 의사가 더 잘 진단을 내리고 처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우리의 삶에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 제거해야 할 심리적인, 관계적인 문제들을 진단하려고 합니다.

우선 문제점을 나열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고 있는 격려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

이 구절은 요즈음 많이 새로 나와서 읽히고 있는 메시지라고 하는 새로운 영어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영적인 모험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우리 주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그 사실을 결코 잊어버리지 마십시오.”(고전 1:9, 메시지성경)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영적인 모험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품만 하다가 졸고 있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벅찬 모험의 나날이기를 바라십니다.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이란 벅찬 모험의 날이 아니면 지겨운 나날의 연속이라고,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해 있습니까?

새해 들어서 우리 교회는 매주 열 명 이상이 주 앞으로 나와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만나는 축제의 자리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만큼 놀라운 모험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 모험을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모험의 길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여러분이 다 알면 기대감이 생길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애에 무슨 일이 일어 날것인지 미리 펼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해 주셨는지 우리가 알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날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변치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참조 신31:6,8, 창28:15,수1:5)는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왜 없겠습니까. 여러분을 떠나고 여러분을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느낌과 상관없이 하늘 아버지는 여러분을 떠나지도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셨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삶의 열정을 식어지게 만듭니까? 한두 가지 감정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열정을 빼앗는 그 첫 번째 요인은 불분명한 목적입니다.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 틀림없이 열정은 사라집니다. 목적이 없는 삶이라면 누가 노력하겠습니까? 오늘같이 날씨가 끄무레해 가지고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기 싫으면 무엇 때문에 열심히 일어나려고 할 것입니까? 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무엇 때문에 노력하겠습니까? 확실한 목표가 없으면 어떻게 삶의 열정이 새로워 질수가 있겠습니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떠밀려 지나가는 겁니다. 계획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시간을 죽이는 자리에 동참 할 뿐입니다. 

열정과 목적은 함께 갑니다. 목적에 이끌리면 이끌릴수록 삶의 목적이 뚜렷해지면 뚜렷해질수록 우리 안에 열정이 솟구치게 되어있습니다. 목적은 열정을 창조합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그냥 돈 벌어서 먹고살고 아이들 교육시키고 사는 것이 목적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열심히 할 일이 뭐가 있어요. 삶이 초라하게 됩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 잘 먹고 잘사는 것 그것이 삶의 목적의 전부라고 하면 열정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보다 큰 목적과 보다 큰 비전을 위해서 여러분은 창조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이 세상에 두신 이유는 그냥 잔재미를 맛보고 행복을 찾다가 기력이 쇠함과 함께 사라져 가도록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무엇을 발견하기 까지는 여러분의 삶에서 에너지와 활력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더 분명히 알면 알수록 보다 큰 열정에 사로잡힌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이 가슴에 가득해 있다고 하면 잠을 깨는 순간 벌떡 일어 날수 있습니다.

자신의 육체의 생명부지보다 더 고상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이불 밑에서 꾸물거리지 않습니다. 돈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이 있다면 돈 때문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루가 밝아올 때 여러분을 잠자리에서부터 일으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열정에 사로잡힌 하루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방문자 여러분, 여러분의 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아무 것도 그것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돈이나 명성, 섹스나 쾌락이 보상해 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 때문에 여기 땅위에 사는지를 알지 못하면 아무런 열정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의미 없는 움직임일 뿐입니다. 방향 없는 활동일 뿐입니다. 열정이 사라지는 첫 번째 이유는 불분명한 목적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열정을 빼앗는 두 번째의 원인은 균형을 잃은 일정 때문입니다. 피로하게 되면 일하고 싶은 욕망이 사라집니다. 많은 일에 지쳐서 몸이 피곤하면 삶에 대한 열정이 식습니다.

목사님들이 월요일에 아침 7시에 모여서 축구하는 것 보면 대단합니다. 제가 만약 아침7시부터 월요일 아침 7시에 불러내었으면 아주 악명 높은 담임 목사라고, 그런데 아침 7시에 나가긴 했는데 피곤해 있으면 공이 앞으로 굴러 와도 달려가서 찰 생각이 안 나는 겁니다. 그래서 쉬는 것 하고 일하는 것 사이에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 윤봉오 집사님이 교사로서 정년을 하면서 발행한 책“놀 줄 알아야 공부할 줄 안다”정말 새겨 볼 만한 책 제목 같아요.

삶의 리듬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땅을 바라보면서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하라고 하셨지만 하루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천하만사가 때가 있고 모든 목적은 이룰 기한이 있습니다. 일할 때가 있고 쉴 때가 있습니다. 애쓸 때가 있고 그냥 즐길 때가 있습니다. 놀지 않고 일만하면 쉬 고갈되고 맙니다. 쉴 때를 갖지 못하면 소진되고 맙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일만 하면 일중독이 되어서 쉽게 열정이 사라집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엄청 착한 분들이 있어서 계속 줄려고 만해요. 항상 섬기려고만 합니다. 언제나 나누려고만 합니다. 돌보려고만 합니다. 희생하려고만 합니다. 다른 사람만 먼저 생각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위한 시간도 필요합니다. 재충전을 위한 시간도 필요합니다. 살면서 즐길 시간도 필요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다가 보니까 제가 좀 뜨끔해 져요 울산에 와서 10년이 되었는데 저 MBC 동산에 지금쯤 꽃이 활짝 벚꽃이 피었는데도 10년 있으면서 한 번도 제대로 놀러 가본 적이 없거든요. 제가 못한다고 해서 답이 틀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정답대로 못하는 제가 잘못이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저는 업무상 바른 대답은 여러분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의 열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쉬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목회사역을 하기 위해서 나선 사람들이 가족만 챙기는 것을 보면 쳐다보입니다. 참 시대가 많이 바뀌었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들도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것은 잘못은 아니겠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가족을 돌보지 않고 이웃만 살핀다고 하면 그건 잘 못하는 것입니다. 친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삶의 균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공업도시 울산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강조차 손상해 가면서 일에 몰두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두 가지 중요한 원인을 들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불안은 사람으로 하여금 과로하게 합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 중에는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있는 대로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언제나 지나친 경쟁심에 사로 잡혀서 일등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게 몸부림칩니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자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띠고 우리가 빈둥대고 있는 것도 보시고 기뻐하신다니까요. 일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자기도 그렇게 못할 뿐 아니라 식구들이 그렇게 빈둥대는 것은 봐주지 못합니다. 자는 것은 괜찮다는 겁니다. 차라리 자는 것은 괜찮다 그런데 왜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그렇게 빈둥대면서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나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그럴 때도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일을 척척해 나가는 능률이 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창조적인 일을 해야 되는 사람들은 보면 게을러터진 것 같은 모습이 있을 때도 있는 거여요. 그걸 열심히 하라고 자기 기준으로 볶아대면 좋은 창조적인 소질이 다 말살대고 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엄마 여러분 아이들이 게으름을 피울 때도 좀 관용하면서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걸 못 봐주는 엄마들은 대체로 일중독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 아들이 엄마를 안 닮았으면 누구를 닮았겠습니까? 아빠를 닮았겠지요. 그런 아빠도 여러분 먹여 살리질 않습니까? 기다려 주십시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시127:2) 아침부터 저녁 늦도록 굶어 죽을까봐 애쓰는 것이 소용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자녀에게 적절한 휴식의 시간을 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대한민국 다른 도시가 부러워하는 울산에서 굶어죽는다는 것 그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래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으로 인해서 그렇게 자신을 학대하듯이 들볶아서는 안 됩니다. 쫓겨나면 어쩌나, 실패하면 어쩌나, 무시당하면 어쩌나 이런 두려움이 우리를 과로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 우리를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게 하는 만드는 요인은 돈 때문입니다. 물질주의 때문입니다. 남이 사는 것 나도 사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의 노예로 전락되어 갑니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전4:4, 표준새번역) 심하면 자기에게 필요하지도 않는 것을 남이 사니까 사기도 합니다.

건강에 좋다는 말이 나돌면 입증되지도 않는 것들을 산다고 사람들이 모두 바쁩니다. 물이든 음식이든 운동기구든 기능성 옷이든 화초든 할 것 없이  게다가 이런 것들은 모두다 상식을 초월하는 값을 지불해야합니다. 물이 물 값을 해야지 왜 그렇게 비싸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우리 집에도 이런 것 들여놓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기도 한다니까요. 그 식구에 그렇게 큰 냉장고가 필요합니까? 사람은 머리를 써야 됩니다. 우리식구가 몇이며 우리가 집에 손님이 얼마나 오는지 그래서 얼마만한 사이즈가 적절할 것인지, 그 좋은 머리가지고 생각도 안하고 남이 산다고 따라 삽니까?

두 가지, 불명확한 목적과 균형 잡히지 않는 삶이 여러분의 삶에서 열정을 소진시킵니다. 그러면 세 번째의 장애는 무엇일까요?

3. 세 번째로 해결되지 않는 갈등은 여러분의 삶에서 열정을 앗아갑니다. 이런 말 이 있지요? 딱 보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사는 것이 재미가 없어져요. 집안에 있으면 더 원수입니다. 그렇지요? 직장에 있으면 직장에 출근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이 얼씬거리면 그때부터 죽을 맛이고 사는 재미가 없어요.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왕따로 찍혀서 괴롭히는 아이가 보이면 공부고 뭐고 사는 것이 즐겁지가 않습니다. 아침에 잠자고 일어날 때면 아주 가뿐한 기분으로 오늘 하루가 멋진 하루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문 열다가 아마 부딪히는 것 같아요. 티격태격 두 사람이 싸우다보면 그날 하루는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되어버립니다.

혹시 그런 기분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은 없습니까? 오늘같이 봄비가 내리는 날 좀 늦게까지 누워있고 싶었는데 아침부터 마누라가 빨리 교회에 가야 된다고 늦어서는 안 된다고 12시 예배에도 늦으면 어떻게 하냐고 막 다그쳐서 오면서 차타고 오면서 한판하고 나면 교회 나와서 앉아 있어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겁니다.

집안에서 생긴 갈등일 수도 있고 직장에서 아니면 학교에서 일어난 인간관계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와 문제가 생기면 그것 때문에 삶의 에너지가 방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발생한 갈등으로 인해서 열정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일들은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피해갈 장사가 없습니다. 기쁨이 넘치는 삶의 열정을 유지하려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합니다.

요즈음 들어서 주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진 분들은 없습니까? 아직도 주님과의 첫 사랑에 빠져 있는 분은 없습니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온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사람이 다르게 보이고 자연이 다르게 보이고 봄 마다 피는 꽃이지만 올해는 유달리 아름다워 보이는 차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사랑은 이웃과의 건강한 관계를 갖게 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자기의 분노 때문에 죽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질투 때문에 죽는 법이다.”(욥5:2, 표준새번역) 분노와 질투 두 가지는 우리 삶에서 열정을 죽이는 대적입니다.

분노는 이미 옛날 옛적에 일어난 그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주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까맣게 잊고 지냅니다. 어쩌면 이미 죽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미워하고 있는 한 계속 그들은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어쩌면 욥기 18장이 말하듯이 그것이야말로 “자기 분노로 스스로를 찢는”(욥18:4,한글KJV)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계속해서 그 지나간 그 일을 생각하는 한 여러분 자신은 상처를 계속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여러분이 아직도 분노하고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젯밤에 너무 분해서 잠을 못 이루는데 그 사람은 잘 자고 있다니까요. 여러분이 그렇게 잠 못 자고 있는지 모른다니까요. 그런데 왜 여러분이 그 사람 때문에 온밤을 휑하게 세워가면서 그렇게 미워합니까?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가서 만나십시오. 만나서 이야기를 하십시오. 이야기를 한다고 확 풀리지를 않더라도 여러분이 할 것을 하면 괜찮습니다. 여러분 편에서 할 일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그대로 말하십시오. ‘하나님 보셨지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나 화해하려고 찾아 갔고요. 딸기를 사서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동서가 안 받아줍니다. 나는 이제 동서 문제가지고 내가 붙들고 있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알아서 하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내가 더 이상 붙들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용서합니다.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더 이상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내가 불편해서 안 되겠습니다.  나는 항상 기뻐하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여러분을 억울하게 한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봐 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냥 여러분 편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용서할 마음을 주십시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그런 기도가 드려져야 기도 생활이 새로워집니다. 온갖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면 자기 삶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엉뚱한 것들을 붙들고 기도해 보았자 기도하나 안하나 삶의 차이가 납니까? 실제로 나를 힘들게 만드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상대방의 반응여부와 관계없이 그렇게 기도하면 여러분의 삶에 샘솟는 기쁨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갈등은 우리의 삶의 열정을 앗아갑니다.

4. 네 번째로 살필 열정을 삼키는 또 다른 관계의 문제는 함께 하는 지원자가 없는 삶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바른 관계를 갖질 못하면 활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친구도 필요하고 부모사랑도 필요하고 같이 사는 소그룹에서 지원그룹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잘 들어 줄 수 있고 그래 “맞다, 맞다”해 주는 격려해 주는 사람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혹한 처벌의 형벌 방법 하나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독방에 가두는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하고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인간(人間), 사람인 사이간 자가 아닙니까? 사람사이에 살아야 사람 구실도 할 수 있고 사람 사는 재미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나쁜 죄를 지은사람은 독방에 가둡니다. 그건 엄청난 형벌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누군가 나만을 쳐다보고 사랑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같이 살다가 어떤 때는 먼저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배우자의 사별이라는 것이 사람들이 겪는 스트레스의 가장 첫째자리에 온다고 그러지요. 겪고 나면 갑자기 내가 더 살 이유가 있는가? 정말 살 가치가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까지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살아남은 사람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세상을 살아서 무엇을 하랴고 낙심하지만 하나님은 목적이 있어서 우리를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과 더블어서 함께 지내도록 하나님은 의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예배하는 예배는 사람이 함께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예배의 열기가 살아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만 만나서 헤어지는 것을 하나님은 의도하지 않았어요. 소그룹으로 집집이 만나서 교제하도록 구역모임을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였습니다.

저는 주일날 우리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기 위해서 이렇게 비 오는 날 교회에 나오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지만 저는 주일날만 이렇게 나오는 분들을 우리교회에 정식 멤버로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들을 제대로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사람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요일, 금요일 주말에 함께 모일 수 있는, 세 사람도 좋고 네 사람도 좋고 크기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 만날 수 있는 소그룹에 속할 때 여러분은 비로소 울산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할 때 삶의 열정은 식어집니다. 할 일도 많고 즐길 일들도 많이 남아있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하면 사는 즐거움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까 신앙고백하면서 뭐라고 했지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마음이 통하고 가진 것을 서로 나누고 맛있는 것을 서로 나누고 재미있는 것을 함께하고 이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이 교제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합니까? 주일날 예배만 참석하고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기위해서는 구역모임에 다 소속이 되어야 됩니다. 소그룹모임에 자리를 같이 해야 합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전4:9-10, 표준새번역)

혼자서 발버둥을 치는 대신에 둘이서 서로 도우면 만사가 쉽습니다.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일으켜 주면 일어나기가 한결 수월합니다. 그럴 때 날마다 필요한 삶의 열정과 힘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눈빛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열정을 상실하는 주요한 원인은 첫째는 예배의 자리에 자주 빠지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구역모임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에 빠지고 구역모임에 빠지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장기 결석을 하고 있는 교인을 심방하고 나서 어떤 분이 이렇게 보고를 했더라고요. 그 마음이 점점 강퍅해 집니다. 스스로 보아도 아무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변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생각해도 교회에 안 나가고 구역모임에도 빠지며 몇 달 살고 나니까 이제는 누가 가까이와도 마음을 열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었다고 그런 고백을 합니다. 땅이 지면이 굳어지면 봄비가 아무리 내려도 스며들지 않습니다.

잘 타오르는 장작불이라도 한 가지만 가져다가 마당 가운데 두면 연기를 내면서 꺼져갑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다른 불 사이에 가져다 넣어보십시오 잘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서로 교제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열정이 타오르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생각에 ‘저 사람만 없으면 구역예배에 잘 가겠는데’ 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잘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의도하셨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혹시 그 사람이 잘 안타는 재목일수 있어요. 그러나 한번타기 시작하면 무섭습니다. 기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한번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해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원하셔서 여러분을 그 그룹 내에 두셨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이번 한 주간 동안 서로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어요. 누가 여러분을 격려해 주길 원하십니까? 누가 여러분의 격려를 필요로 하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무기력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열정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누군가를  꼭 필요로 합니다. 누군가는 우리를 꼭 필요로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자리에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 모두 누군가의 의미가 될 때 우리의 삶은 갑자기 생기가 솟아납니다. 삶의 열정이 새롭게 타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언젠가 오래전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의기소침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나빠지면 마음도 약해지잖아요. 그런데 어떤 초신자분이 그러더라고요. “목사님, 목사님은 건강해야 됩니다. 우리 모두 목사님을 쳐다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까 정신이 확 들데요.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때 우리는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 친구목사님이 한 달에 한번 모이는 자리에 안 왔더라고요. 그래서 전화를 했더니 사모님이 받으셨어요. “사모님, 사모님에게도 안 목사님은 소중한 분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잘 보살펴서 다음에는 나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는데 한 달 뒤에 나와서 아파있을 때 그 한마디가 참 감동적이었다고, 우리 모두에게도 당신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말씀드린 것을 정리합니다. 무엇이 우리 삶의 열정을 빼앗습니까?

1. 불분명한 목적은 생의 열정을 앗아갑니다.

2. 균형을 잃은 일정은 삶의 기쁨을 앗아갑니다.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쁜지    균형을 유지해야합니다.

3. 해결되지 않는 갈등, 풀지 못한 인간관계는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4. 함께 하지 못하고 함께 나누지 못하는 삶은 삶의 열정을 파괴 합니다.

꼭 이번 주말부터 소그룹에 속하길 바랍니다. 여러분 주위에 몇 몇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으면 여러분은 삶은 달라집니다.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그 눈빛이 사람들을 새롭게 만듭니다.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기 원할 때는 지원하는 여러분을 지원해 줄 수 있는 소그룹이 꼭 필요합니다.

혹시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는 사람은 목적이 이끄는 삶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에서 문성진 목사님은 벌써 두 주째 자랑하고 있습니다. 요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영어로 읽는데 너무 좋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보는데 참 좋다는 겁니다. 삶의 목적이 새로워지면 삶의 의욕이 생기고 열정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춘곤기라고 대책 없이 당하고만 있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인지 찾아내어 대책을 세우십시오. 여러분의 열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열정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 우릴 열정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과의 관계를 두고 질투하시는 분이십니다. 관계회복을 위해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없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하신 분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당신의 목숨을 주기까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늘 아버지께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께 소중한 존재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도 자신이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양팔을 벌리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끝까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열정을 가지고 사는 것이 황홀한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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