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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보다 절대적인 사랑 (고전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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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성찬 목사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

결혼한 지 2년째 된 남편이 하루는 편지를 한 장 받았습니다. 뜯어보니 생일 축하카드였습니다. 카드를 읽고 난 남편은 아내를 쳐다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여보, 지금이 4월이고 내 생일은 7월이 아니오? 어떻게 석 달이나 먼저 생일 축하카드를 보낸거요?” “나도 알아요. 그런데 백화점에서 발견한 이 카드가 맘에 쏙 들게 이쁘고 또 글귀도 좋아서 샀어요. 당신 생일인 7월까지 기다리면 그 카드를 누가 사가 버릴 것 아녜요? 그리고 내가 지금 사가지고 집에 와서 어딘가 깊이 보관해놓으면 석 달이 지나가는 동안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그냥 미리 보내드린 거예요” 사랑스러운 아내의 너무도 천진난만한 대답에 남편도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같은 말도 사랑이 함께하게 하면 큰 유익이 있습니다.“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언 15:23)(인터넷정보클럽-같은 말도 하기 나름)

본장을 흔히 사랑의 시편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시정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시는 아닙니다. 시제로 엮어진 논리요 철학이요 신학입니다. 사랑이란 귀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고 값어치 있는 것이며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류 시인  오닐은 말하기를 "청춘은 한  때요,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나 사랑은 세계를 얻는 보석이다"고 했습니다.

로마의 시인 베르질 니우스는 "사랑은 만사를 이긴다"고 했습니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람바레네의 성자 슈바이쳐 박사는 "내 사랑의 행위가 남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사랑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핀들레이는 사랑은 교회에서 능력의 첩경이다 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사랑은 우리의 주라 친절을 공급하고 불행을 추방하며 우정을 선물하고 원한을 용서하면서 사랑은 사공이라 동지라 사랑은 신과 사람사이를 갈라놓은 구렁이에 다리를 놓으며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중보자이다 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기에 어떠한 말 보다 절대적입니다.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은 땅과 하늘의 모든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고뎃) 이러한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으니 사랑은 모든 말보다 절대적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말은 위대한 도구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유명한 웅변가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어떤 말이든 그가 말하기만 하면 셰익스피어의 문장 보다 더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웅변으로 말미암아 기울어진 그의 조국을 구하는 큰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그가 처음 연사로 청중들에게 조국을 위하여 일하자고 외쳤을 때 그의 웅변을 들어줄 청중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웅변술을 연마하여 다시 단상에서 조국을 위하여 일어나야 할 것을 외치고 있을 때 군중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뜨기 시작하여 그의 연설을 다 마치고 단에서 내려올 때에는 거기에 청중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데모스테네스는 아직도 자기의 웅변술이 미숙하다고 하면서 다시 공부하려고 떠나려고 했을 때 흩어졌던 무리들은 복장을 단장하고 총칼로 무장하고 광장에 다시 모여 들기 시작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연설은 들은 무리들은 더 이상 연설을 듣고 있으면 조국이 멸망할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가 전쟁터에 나갈 준비를 해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의 처음 연설은 듣기에 지루 하다고 흩어졌던 자들이 그의 웅변에 마음들이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치 혀로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아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운명을 구하는 큰 역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 데모스테네스는 그의 말솜씨를 전 아테네(Athens)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북쪽의 마케도니아(Macedonia)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알렉산더가 새롭게 창기병을 무장해서 온 세계를 정복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데베(Thebes)를 일거에 정복하고 스파르타(Sparta)를 함락시키고 계속 군사를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냅니다. "너희들, 나와 화친해서 새로운 제국을 만들든지, 그렇지 않으면 멸절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 그 때 데모스테네스는 그 화려한 웅변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 아테네는 비록 적은 도시국가지만 한 번도 원수의 말발굽이 이 아크로폴리스(Acropolis)를 디뎌본 적이 없다. 백만의 페르시아의 대군이 그처럼 우리에게 져서 패퇴했거늘, 기껏 북쪽 오랑캐 마케도니아 정도야!" 그가 말할 때마다 젊은이들은 손에 힘을 주면서 전쟁해야 된다고 외쳐댔습니다.

그 때 백전노장인 포키온(Phocion)이라는 장군은 화려하지 않지만 중심 어린 마음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피를 토하듯이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습니다. "여러분, 나는 평생 전쟁터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여러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처럼 흉맹스러운 세력을 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저와 화친하지 않으면 그 거대한 군대는 우리 도시국가인 아테네를 영원히 멸절시킬 것입니다. 나는 전쟁의 참화를 너무나 잘 아는 장군입니다." 그는 간절하게 애끓는 마음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니까 아테네 사람들이 "그래, 화친하자."라고 바뀌었다고 합니다.

웅변의 힘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의 여운형 같은 이도 유명한 웅변가요 혁명가 였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몇 분만 이야기 하면 상대를 설복 시켰다 합니다.  그러나 웅변이 나라를 구하고 또 사람의 마음을 흥분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자기의 영혼을 구원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더욱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 할 수 없습니다.

  방언이나 천사의 말은 웅변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방언, 내가 모르는 이상한 현상, 내 기도를 끌어가고 힘을 주는 방언을 가진다 할지라도, 아니 사람의 언어를 완전히 떠난 천사의 말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 중심에 이 아가페의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고 합니다.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방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내가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있는 기사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예루살렘에는 명절을 맞이해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에 살던 사람들도 왔고, 또 유럽에서 살던 사람들도 왔고, 아프리카에서 살던 사람들도 왔습니다. 그들 모두는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행하신 큰일들을 세계 각국의 언어들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유럽의 말로 하고, 또 더러는 소아시아의 말을 하고, 또 더러는 아프리카의 말로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방언의 은사입니다. 특별히 외국에 나가서 선교하는 사람들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참으로 요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4:18에 보면 사도 바울도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보다 한층 더 높은 영으로 하는 것이므로 방언을 하는 자신도 통역의 은사를 받지 아니하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은 무용지물 이다 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방언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임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는 그 말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 유익이 없으나 방언을 하는 자신에게는 자신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 쓰이는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개인적으로 기도하는데 끼어 기도하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4:5절)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여 모든 사람은 방언을 받아야 된다느니, 방언은 구원받은 표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여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구원조차도 못 받은 자로 낙인을 찍는다거나,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덜 신령한자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각자에게 필요하고 적절한 은사를 나눠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전12:12절 28절까지 각종 은사를 말한 다음 29절에 보면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꼭 방언을 말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못한다고 해서 나는 은혜를 못 받은 것이 아닌가 구원을 못 받은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중에 받을 사람도 있고 못 받을 사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 죄악 된 세상과 우리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방언은 사람에 따라서 다양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앞에 설 때에는 더 이상 방언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하나님과 대화할 필요 없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공통된 언어로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일시적인 것으로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폐하여질 것입니다.

지상에서 쓰는 사람의 방언뿐만 아니고, 하늘에서 쓰는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사의 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12장 보면 사도 바울은 세째 하늘, 곧 낙원에 이끌려갔던 신비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천사들이 쓰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황홀한 말이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바벨론 나라 벨사살 왕이 귀인 천 명을 모아놓고 잔치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용하는 금 대접과 은 대접으로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는 금, 은, 쇠, 목 등으로 만든 우상들을 찬양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비상한 일을 보여 주십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손가락만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벽에 글자를 씁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벨사살 왕의 얼굴이 파래지고 다리가 떨려서 소리가 날 지경이 되었습니다. 박사들과 술객들과 점쟁이들을 다 불러놓고 그 글을 해석하면 나라의 셋째 치리자로 삼아 자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걸어주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태후가 와서 다니엘을 소개했습니다. 다니엘이 그 글을 해석했습니다. 그 글자는 하늘나라 글자인데,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알려 주시니 다니엘이 왕에게 해석합니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단 5:25)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단 5:26)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단 5:27)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단 5:28)

다니엘의 해석대로, 그날 밤에 메대 사람 다리오가 벨사살 왕을 죽이고 자기가 임금이 되었습니다.

땅의 사람은 하늘의 말을 모르는데, 다니엘은 은사로 알았습니다.

천국의 말, 천사의 말을 하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사람의 방언을 하고, 만국 어를 다하고, 천국의 말을 할지라도 아가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리 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시끄럽기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구리와 꽹과리는 그 옛날 이교도들이 이방신전에서 주로 사용하던 악기들이었습니다. 잠자는 신들을 깨우거나 또는 악령을 쫓기 위해서 그들은 구리를 두드리고 꽹과리를 울리면서 소리 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음악도 사랑이 없으면 인격을 결여한 도구요 아무 의미 없는 소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말 보다 절대적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내가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라면 '천사의 말'은 천국의 언어 또는 욕지거리가 담긴 우리 죄인들의 말과는 달리 선하고 아름다운 용어로 가득한 아름다운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유리 거울 위에 물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전혀 세상에 때묻지 않은 채, 우리의 귀에 들려져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큰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말속에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줄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변이 부족하고, 표현력이 없고, 어눌하다 할지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이 담긴 말을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평안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잠히 사랑 하십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사랑은 소리가 없어도 오고 갑니다. 어느 병원에 말없이 빨간 사탕 하나를 전하고 가는 전도자의 사랑이 그 어떤 말보다 참 사랑의 표가 되었다합니다. 할머니의 계란 한 톨을 쥐어 주는 사랑이 천만 마디 말보다 나은 사랑의 모습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마음, 따뜻한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말 한 마디라도 사랑이 담겨져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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