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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금 같은 신앙을 얻는 길 (욥 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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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한규 목사

< 성도에게도 고난은 필요합니다 >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당합니다. 성도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면 가끔 불평도 생깁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가?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데 그런 원망과 불평을 자세히 보면 “나는 이렇게 믿음이 좋고, 완벽하게 살고 있는데 하나님 정말 그럴 수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불평할 만큼 잘 믿고 잘 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의 부족한 모습을 생각할 때 오히려 현재의 고난조차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 시야를 가질 때 비로소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성도에게 고난이 있을까요? 그 고난을 통해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큰 고난을 당해도 믿음과 감사만 잃지 않으면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아도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서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고난도 필요하구나! 정말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고난이 있어야 성숙도 있고 성공도 있게 됩니다. 위대한 일은 대부분 실패와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미국에서 사회 복지법이 만들어진 것은 대공황이 극에 달하던 1935년이었습니다. 말은 맨몸으로 달릴 때보다 등에 적당한 짐을 졌을 때 더 빨리 달립니다. 사람도 적당한 시련이 있어야 인생의 가속이 붙습니다. 바람은 배를 전복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배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무엇보다 고난과 실패를 통해서 자기에게 한번 크게 실망해보아야 겸손히 주님만 의지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런 육아법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이와 즐겁게 놀던 아빠가 갑자기 아이를 홱 던져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섭니다. 그러면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믿음의 배신을 통해 엄청난 쇼크를 받게 됩니다. 그때 조금 후에 아빠가 말합니다. “얘야! 이처럼 아빠도 잘못할 수 있다. 사람을 믿지 마라. 믿을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키웁니까? “얘야! 나만 믿어라! 내가 다 준비해 놓겠다.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살라.” 그러면서 아이들 고액과외를 시키고, 대학 등록금까지 다 대주고, 결혼할 때는 집까지 장만해줍니다. 그러면서 그 10분의 1도 선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불면 모든 공든 탑이 한꺼번에 날아가는데 하나님께서 내 자녀를 지켜주셔야 한다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처럼 정작 중요한 것은 빠뜨리고 부모가 다 준비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잘 사는 미국에서도 대학 등록금 대주는 부모는 거의 없고, 결혼할 때 집을 사주는 부모도 거의 없습니다. 18살이 넘으면 다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게 부모가 다 해주면 자녀들이 강한 대장부가 될 수 없습니다. 성숙하게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고난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사람에게는 성공 체험도 필요하지만 고난 체험도 필요합니다. 고난을 잘 극복하면 한 차원 더 성숙하게 되고, 한 차원 더 깊은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 정금 같은 신앙을 얻는 길 >

오늘 본문 10절 하반부 말씀을 보면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정금 같은 신앙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정금 같은 신앙을 얻는 원리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서 욥은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이 말씀은 사람은 사람의 앞길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요새 점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왜 점쟁이들은 자신들의 그 탁월한 점 실력으로 로또나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해서 곧 거부가 되지 않습니까?

점쟁이들의 점치는 곳으로 들어가려면 대개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야 하고, 다 무너질 듯한 집의 낮은 대문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결국 그 말은 점쟁이들이 자기 앞가림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 앞날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중요한 것은 그 점치는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축복받을만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욥의 말은 나는 내 앞길을 모르고 하나님은 내 앞길을 아신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을 아신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의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찾아서 반성하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고난의 이유를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때 더욱 중요한 것은 고난 중에 나를 향한, 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성도에게 고난은 축복의 전주곡이고, 축복이 잠시 고난으로 위장한 것이고, 훈련과정으로 주어진 연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서 욥도 자신의 고난을 ‘연단’이라고 믿고, 그 단련이 끝난 후에는 정금 같은 성도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도 다 그런 연단과정을 거쳤습니다. 물론 그 연단과정이 다 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로 훈련하고, 어떤 사람은 물질로 훈련하고, 어떤 사람은 배우자로 훈련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로 훈련합니다. 그러나 어떤 훈련과정이든지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허락하신 훈련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감당할 때, 하나님은 그를 가장 보배로운 인생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만 잃지 않으면 추락하는 때가 강한 날개가 생기는 때입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갔다 오면 왜 사람이 변합니까? 군대에서의 낮아지는 체험과 훈련을 통해서 강한 날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육이오 때 훈련되지 않는 병사들은 대개 총알받이가 되었지만 훈련된 병사들은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은 지금은 힘든 것이지만 최종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그 가운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본문 11-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욥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말씀을 먹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말씀대로 살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순리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순리란 ‘이치를 따른다’는 듯입니다. 순리대로 살면 큰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분란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가지면 큰소리가 나고 하모니가 깨집니다. 그래서 말씀의 반대는 욕심입니다. 욕심대로 살면 상처가 넘치게 되지만 말씀대로 살면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욕심대로 살면 골칫덩어리가 되지만 말씀대로 살면 복덩어리가 됩니다.

욥은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했습니다. 본문 13~1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뜻이 일정하고, 하나님이 한번 작정하신 것을 꼭 이루신다는 말씀은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돌리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해야 합니다. 가끔 내가 원하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속이 상합니다. 그러나 그때 더 좋은 일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더 좋으신 뜻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의지가 강한 것은 좋지만 ‘자기 의지’가 지나치게 강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 한 전도사가 부임했습니다. 교회가 참 좋았습니다. 목사님도 좋았습니다. 오래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습니다. “나는 이 교회에 뼈를 묻겠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나는 이 교회에 뼈를 묻겠다”고 하는 사람치고 뼈를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처럼 그 전도사님은 너무 말부터 앞섰습니다. 심지어는 담임목사님에게도 “목사님! 저는 앞으로 이 교회에 뼈를 묻겠습니다!”라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사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개척한 담임목사조차 “나는 이 교회에 뼈를 묻겠다”고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전도사가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주제가 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한지 1년도 되지 않아서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뜻이 너무 앞서고 내 의지가 너무 앞서면 안 됩니다. 물론 사람에게는 ‘의지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능력’이 더욱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주권을 거부하면 마음에 불평과 원망이 생기게 되고, 그만큼 삶의 고통은 심해집니다. 우리는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누구도 탓하지 말고, 모든 일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렇게 순리대로 살고, 말씀대로 살면 참 아름답고 마음에 놀라운 평안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움직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오직 2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원망하며 사는 길이고, 또 하나는 감사하며 사는 길입니다. 원망하면 희망이 끝나고 절망이 시작되지만 감사하면 절망이 끝나고 희망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려는 계획은 결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3. 최후의 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본문 15-16절을 보면 두려워하는 욥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의 고난 때문에 떨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합니다. 고난 앞에서 두려워하면 결국 패배하게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면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면 세상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시선을 두려워하면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본문 17절에서 “나는 어두움으로 끊어지지 않을 것이고, 흑암이 내 얼굴을 가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최종적인 승리의 고백을 합니다.

때로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오지만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당해도 결론은 항상 해피 엔딩이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을 당하면 그 순간에는 힘들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최후 승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앞날은 모르지만 최종 결과는 알 수 있습니다. 앞날을 상세히 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 예언이지만 최종 결과가 승리가 될 것을 아는 것은 참된 예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는 성도의 최종 승리를 믿고, 자기의 앞날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맡기고, 어떤 상황에서도 “아멘!”하며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고난 후에는 그 고난을 믿음으로 잘 견딘 만큼 반드시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중에서도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고 찬란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위인들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붙잡고 내일의 꿈을 꾸고 결국 영광을 얻었습니다.

현재 미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흑인 중의 한 명이 콜린 파월입니다. 그는 뉴욕의 할렘에서 태어났지만 꿈을 잃지 않고 결국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가난은 경제적인 가난이 아니라 가치관의 가난입니다. 저는 백인 사회에서 흑인으로 사는 것을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저의 검은 피부는 오히려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저는 누구든지 땀을 흘리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저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사람은 고난을 극복할 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축복도 고난을 극복하며 주어진 축복이 진짜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부족한 우리에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생명의 옷을 입혀주시고,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게 가꾸어 가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최후의 영광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고난 중에도 자신감 있게 살아야 합니다.

< 우리의 앞날은 보장되었습니다 >

지난주에 한 목사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그분이 살던 동네에 가끔 미친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동네 꼬마들이 다 몰려나와 돌을 던지거나 치마를 들쳤습니다. 어느 날, 그분도 같이 놀리다가 집으로 들어와 엄마에게 외쳤습니다. “엄마, 우리 동네에 미친 여자가 왔어요.”

그때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 이모가 오기로 했는데 지금 왔나보다. 가서 데리고 와라.” 이모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친 여자를 이모라고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너무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그 여자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저기요. 엄마가 빨리 집으로 오래요!”

그렇게 해서 그 이모라는 여자가 집에 오자 어머니는 물을 데워 목욕을 시키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후에 더운밥을 지어 먹였습니다. 그는 그 여자가 진짜 이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머니 때문에 그 여자가 다시 동네에 나타나도 감히 놀려대지 못했습니다. 그런 어머니의 넓은 사랑 보면서 자기가 목사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치우쳤고, 다 미쳤고, 다 시궁창 냄새가 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희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고, 우리에게 깨끗한 세마포를 입혀주시고, 지금도 날마다 가장 선한 축복의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사람도 비천하게 보거나 열등하게 보지 않고, 오히려 그런 연약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신 이모’로 생각하며 섬겨주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의 최후의 승리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기가 죽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무기력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십니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구원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앞날은 보장된 것입니다. 우리의 최후 승리는 약속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최후의 부활과 천국의 상급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힘이 납니까?

< 고난조차 은사화하는 신앙 >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한 모든 어려움이 다 상급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찬란한 소망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오늘 살고 있어도 미래가 없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미래가 있다면 진짜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오늘 잘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상이 없으면 불행한 일이고, 오늘 힘들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상이 있으면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생각하고 열심히 선교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고난 중에 있는 분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지난주에 몽골 차량문제로 임병철 선교사님과 제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습니다. 차량 구입 이외에 적합한 차량을 몽골 내륙으로 수송하는 비용과 세금 문제도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그때 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임병철 목사님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목사님! 가장 어려운 순간에 목사님의 목소리는 마치 성령님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목소리처럼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멋진 분입니다. ”

얼마 전에 한국의 한 연예 기획팀이 몽골 당국의 허락도 받지 않고 몽골의 한 대학교에 들어가 누드 촬영을 하다가 경찰에 의해 적발되었습니다. 그러자 신성한 대학에서 그럴 수 있느냐고 몽골 언론이 들끓고 반한 감정이 심해졌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인 선교사가 개척한 교회에 대한 감시도 부쩍 심해졌고, 급기야 우리 CMA 선교팀에서 개척한 6개 교회 중에서 가장 작은 신칠례 교회가 잠정적으로 폐쇄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힘든 상황에서 제가 드린 격려의 말 한 마디가 그토록 힘이 된 것입니다.

선교사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와 격려입니다. 그 기도와 격려 속에서 선교사님들은 희망을 얻습니다. 사람이 고난 중에 있을 때에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희망입니다. 지옥의 가장 무서운 고통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어두워도 희망이 있다면 그런 대로 지낼 만 합니다. 아무리 험난한 골짜기를 만나도 희망이 있다면 그런 대로 살만합니다. 그러나 지옥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서운 곳입니다. 그런 지옥의 백성에게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희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희망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영원히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녀는 항상 희망을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뭐해 죽겠네!”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집에 불이 나도 가정은 깨지지 않아서 감사하고, 아이가 낙제해도 건강은 주셔서 감사하고, 몸의 어느 부분이 아프면 다른 부분이 아프지 않아서 감사하고, 그런 식으로 감사하면서 항상 희망을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문제도 긍정적으로 보면 그 순간 문제로부터 해방됩니다. 더 나아가 문제 속에서 찬송하면 하나님이 감동하십니다.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그때부터 우리의 삶에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처럼 최종 승리를 확신하고 소망 중에 고난을 믿음을 받아들이면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천사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사(은혜로운 선물)로 느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신앙은 고난조차 은사화하는 신앙입니다. 그 천사와 은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난을 잘 견디고 결국 축복받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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