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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할 수 있을 때 (행 1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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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공재영 목사

"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고 하셨습니다. 이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을 말씀하심인데 그 축복은 해볼만한 자리 곧 감당할 수 있는 자리를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때에 중요한 자리는 자신의 삶속에 믿음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자리가 얼마나 크며 얼마나 견고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자신의 삶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미래는 다름이 아니라 자신속에 얼마나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삶을 말합니다. 갈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우리를 엄습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11)"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믿음은 나를 낙심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지만 하나님을 중심한 믿음은 나를 세워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향해 미쁘신 모습으로 함께 하심을 붙잡고 끝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중심한 믿음으로 사는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인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삼켜 버릴듯한 세상일지라도 그 세상을 열어갈 수 있도록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1. 믿음의 자리는 자신의 삶을 직시하게 합니다(24-25).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에 그 만물속에 주신 고유한 축복이 있는데 그것은 각자의 개성과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입니다. 전자는 세상을 열어가는 기초라면 후자는 험한 세상을 감당하는 버팀목인 것입니다.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개성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적응하는 버팀목을 가지는 것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기본적인 자리는 자신의 삶을 받아 들이는 자리입니다. 삶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며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세상으로 열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삶속에 힘을 축적시키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나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믿고 세상을 감당하며 사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자리인것입니다. 이 자리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를 본문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예수를 믿고 그 예수를 전하는 사도바울이 귀신들려 점하는 여종에게 귀신을 쫓아내준 사건이 발단이 되어 뭇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누가봐도 이것은 잘한것이요 선한일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자신의 일에 손해가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이해관계속에서 대립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삶을 감당하는 길은 믿음의 자리에서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유는 믿음의 자리는 자신이 살아온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감옥의 문이 열려지는 것보다 감옥속에서 열려진 삶을 가지는 것이 더복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을 직시하므로 감옥이 이미 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에서 삶을 직시하여 받아 들일 수 있을 때에 자신을 힘있게 단련시켜 세상을 감당하는 힘을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감옥속에서도 삶이 중단되지 않은 자리입니다.

2. 믿음의 자리는 영적인 힘을 생산하게 합니다(25).

  사람을 아름답게 세우는 자리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자리를 보여줄 때입니다. 최선을 다한 자리에는 후회가 있을 수 없고, 그 자리가 자신에게 큰 위로를 주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삶을 표현하는 말중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했습니다. 지푸라기가 나를 버텨줄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러나 지푸라기라는 기회라도 있다면 그것마져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의 자리는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마음의 자리가 있을 때 세상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지푸라기를 잡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일해주실 영적인 실존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영적인 실존의 힘을 찾는 것처럼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자리는 없습니다. 이것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자리를 무엇으로 알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위기를 만났을 때에 사람의 자리에서 결론을 내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영적인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자리에서 생산되는 영적인 힘이 내 인생에 불길이 타오르도록 불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영적인 힘을 가질 수 있을 때에 좁혀진 세상이 넓혀지며 굳어진 마음의 자리를 펴주면서 오늘에만 갇혀 있는 삶을 미래로 열어가게 해줍니다. 본문의 사도바울이 감옥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보여준 최선의 자리가 이 영적인 힘이었습니다. 이 힘이 그 감옥의 문을 열리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고 하셨습니다.

3. 믿음으로 할 수 있을 때 열매가 분명하게 됩니다(25-26).

  슈바이쳐박사에게 젊은 청년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잘사는 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 한우물을 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명한 목표와 함께 목적을 가지고 집념을 쏟는 열정의 사람이 될 때 세상이 열려진다는 것입니다. 즉 열매를 볼 수 있는 자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성도가 가지는 믿음의 자리에서 반드시 보여주는 것이 열매인데 성도는 그 열매를 볼 수 있는 믿음의 자리에 자신을 온전히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사도바울은 이 믿음의 자리에서 그 열매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미했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미했다는 것은 남이 하지 못하는 새로운 시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 있을 때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자체가 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생활의 열매입니다. 감옥의 차디찬 바닥에서 말할 수 없는 몸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고통의 자리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을 했는데 그것은 죄수들이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실존을 보여주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생활의 열매가 감옥의 문을 열리게 했습니다. 감옥은 열리기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의 열매를 볼 수 있는 시작을 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자신의 삶을 확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결  론
  믿음으로 할 수 있을 때에 나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은 우선 나 자신의 마음이 열려진다는 것이요 그 다음엔 내가 사는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가 세상을 열어가는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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