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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음식을 드신 예수님 (시 16:9~11, 요 2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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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목사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미 20장에 결론을 다 내렸습니다. 20:31에는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이라고 하여 기록의 결론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21장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부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이 제일 마지막에 붙어 있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를 회복시키려는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이미 제자들 사이에서는 베드로의 위치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습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고, 제자들 사이에서도 리더십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다시 회복되어야 복음이 살고 교회가 세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21장을 ‘베드로의 위임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요한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당시에 제자들 사이에서는 요한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죽지 않는다는 오해가 있었는데 이 것을 시정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부록 같은 부분을 다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요한은 이미 죽었고 예수님은 아직 안 오셨습니다.

  다시 갈릴리에 고기 잡으러 간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초기에 베드로를 취하실 때 그 감격을 다시 맛보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시 갈릴리로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다시 갈릴리로 가십니다. 왠지 아십니까? 베드로를 잡으러 가셨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도망가려고 하지만 도망갈 데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추적하여 베드로를 다시 잡아 오십니다.

  ‘쿼바디스’라는 소설에 기록된 대로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다시 도망하여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를 이기지 못하여 피하여 도망가는 중이었습니다. ‘비아 아피아’라는 길로 유대로 가는 가운데 다시 예수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예수님은 “네가 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너 대신 지러간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듣고 비아 아피아에서 다시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는 도망가려다 다시 로마로 돌아갔고 거기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한번 택함 받은 사람은 도망도 못가요. 요즘 애들 말로 베드로를 찜하신 예수님은 도망도 못 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께 붙잡힌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절대 도망도 못갑니다. 어떻게 하든 잡아서 그 자리에 데려놓으십니다. 모세도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였지만 하나님의 낯은 피하지 못했습니다. 가지 않으려고 핑계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억지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요나도 그렇습니다. 그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가기 싫어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지만 하나님은 큰 고기 뱃속에 사흘을 있게 하시고 그를 다시 니느웨로 가게 하십니다. 바울도 보세요. 예수님을 핍박하기 위하여 열심히 살았고 다메섹까지 가려고 하였지만 도중에 예수님을 그를 거꾸러뜨리고, 눈멀게 하여 사도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께 안 잡히려고 도망 다니다 잡혀 오신 분들이 있지요? 우리가 어디로 하나님을 피하며, 어디로 도망가겠습니까? 하나님을 피하여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기자는 139:7-10에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누가복음 5장과 요한복음 21장을 비교해 보세요. 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예수님의 부활 후의 사건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에는 두 배에 가득하게 고기가 잡혔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153마리의 고기가 잡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고기로 조반을 드셨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에는 예수님이 조반을 함께 드셨다는 말이 없으므로 음식을 드시지는 않았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굳이 그렇게 볼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굳이 드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육체의 부활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와 같은 육체는 아니지만 굳이 음식을 들지 않을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조반을 드신 예수님은 부활 후의 특이한 요한의 기록입니다. 그 의미를 통하여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육체의 부활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부활 후에 예수님께서 조반을 드신 것은 육체의 부활을 증명하신 사실입니다. 먹는 것은 여전히 육체를 가진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조반을 드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육체의 부활을 증명하신 것과 더불어 육체를 가진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먹는 것이 문제임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조반이란 말은 헬라어로 ‘아리스테사테’란 말입니다. 이 말은 첫 번째 식사란 뜻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은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중의 첫째 식사를 조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조반이라기 보다 이른 점심이기도 했습니다. 지난번 수도원에 갔을 때에 저는 아침에는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서 일하는 젊은 청년이 매일 제 방까지 찾아와서 “아침 식사 하지 않으실래요?”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 때 시간이 거의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12시 전에는 항상 조반이라 합니다.

  영어의 성육신(incarnation)이란 말은 라틴어의 육체적인 살을 뜻하는 ‘카르누스’(carnus)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육신은 육신이 되었다(in-carnus)는 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육체적인 살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살(육체)을 가지신 예수님은 죽었다가 사심으로 다시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육체의 부활을 보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9에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20:27에는 도마에게 “손을 보고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24:39에는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고 하시므로 육체의 부활을 증거하십니다.

  헬라어의 육체란 말은 두 단어가 있습니다. ‘사륵스’라는 경멸적 부정적 의미의 육체를 뜻하는 말이 있고, ‘소마’라는 선하거나 중립적 의미의 육체를 뜻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륵스가 소마가 된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몸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육신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이런 인간적 몸이 아니라 영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육체도 분명한 육체인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먹지 않아도 되는 몸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을 보이시기 위하여 조반을 함께 드셨습니다. 육체로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산 사람은 반드시 먹습니다. 영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입으로든, 피로든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받아야 사람은 삽니다. 그래서 육체의 삶에서 먹는 것은 누구에게나 문제이고, 즐거움이고, 과제인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에 네덜란드의 어느 동네 사람들이 독일군과 대치하여 숨어 있습니다. 오랜 동안 굶주림에 숨어 있으면서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그 당시의 어린이 가운데 대부분이 어른이 되었지만 정신적 육체적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굶주리고 영양실조가 된다는 것이 인간의 육체에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윌리엄 로우라는 영성가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몸은 병약하고 썩어가며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을 온전케 하는 것보다 몸을 꾸미는데 더 집착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다”. 이 말은 육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체를 위한 것보다 영적인 몸을 위하여 신령한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둘째, 천국의 잔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침 식사는 천국의 잔치를 상징합니다. 천국의 잔치는 저녁 식사가 아닌 아침 식사입니다. 인간 사회는 아침 식사보다 저녁 식사가 잔치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침 식사가 잔치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지난번 특별새벽기도회에도 새벽에 잘 차려 입고, 화장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좋은 음식도 아니었지만 너무 맛있는 천국 잔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한결같이 천국은 잔치라고 합니다.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잔치의 주인 즉 호스트인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천국 잔치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 잔치의 주인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잔치를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잔치의 의미를 잘 압니다. 그리고 그들은 먹는 것이 얼마나 그들에게 소중한가를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먹는 것이 중요하고 잔치가 삶의 일부였습니다.

  성경에는 잔치가 많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2:2에는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3:29에는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라고 합니다. 또 성경은 혼인잔치 비를 많이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잔치에 참석하신 기록은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베푼 잔치에도 참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것의 비유에도 보면 하나같이 잔치로 끝납니다. 그 비유의 마지막엔 항상 “즐거워하다”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항상 잔치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계시록에는 “하나님의 큰 잔치”가 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있습니다. 천국은 그 자체가 잔치입니다.

  계시록 3:20에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잔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쉬지 않는 잔치입니다.

  왜 요즘 아파트 이름이 복잡한지 아십니까? 테크노빌, 타워팰리스, 롯데 캐슬, 레미안, 아크로빌 등 이름을 외우기가 참 힘들어요. 왜냐하면 시어머니가 못 찾아오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복잡하게 지었답니다. 이런 우스개가 있다는 자체가 서글픈 거지요. 그런데 이게 사실인가 봐요. 천국 잔치는 누구나 가장 쉽게 찾아오게 하십니다. 이름이 복잡해서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가장 쉽게 찾고 찾아서 잔치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하는 곳입니다. “야, 이리 오너라. 함께 먹자”고 하십니다. 누구나 다 초대되었습니다. 밥 먹을 때 빠지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굉장히 섭섭해요. 예수님은 누구나 다 초대하십니다.

  잔치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이 반드시 있습니다. 혼인잔치의 포도주는 필수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가셔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도 베푸신 것입니다. 천국에도 잔치가 있습니다. 먹는 일상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는 천국의 음식이 있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도 먹는 즐거움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14:17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십니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만 먹는 것이 천국의 목적은 아닙니다.

  브레넌 매닝이 그의 책에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경축해야 한다. 우리는 파티와 만찬, 축제 그리고 흥겨움에 사로잡혀야 한다. 부활신앙 때문에 우리는 참다운 기쁨의 잔치에 참여해야 한다”. 부활의주님과 더불어 풍성한 잔치가 매일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물고기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의 헬라어의 첫 자를 모으면 ‘익투스’ 즉 물고기라는 단어가 됩니다. 물고기는 그래서 초대교회의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화상은 ‘익투스’라고 불리는 문자 없는 상징이었습니다. 물고기는 지금도 사용되는 상징입니다.

  기독교는 상징이 많습니다. 기독교의 상징들은 나름대로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상징들을 너무 지나치게 사용할 것도 아니며, 너무 배격할 것도 아닙니다.
  전통주의 영성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의식 즉 예배형식과, 상징 즉 중요한 이미지와, 희생입니다. 금세기 초반의 유명한 그리스도인 작가인 이블린 언더힐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초감각적 행위의 감각적 표시’라 표현했습니다.

  기독교 예술은 다양한 상징을 만들어냈습니다. 예를 들면 닻은 소망 즉 항해사의 마지막 소망을 상징합니다. 화살은 순교와 아픔과 고난을 상징합니다. 현수막은 핍박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합니다. 원은 영원을 상징합니다. 면류관은 주권을 상징합니다. 등불은 지혜와 경건을 상징합니다. 종려 가지는 순교를 상징합니다. 사방은 지상의 실존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생선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물고기를 예수님을 상징했고 예수님께 대한 고백입니다. 생선을 먹으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먹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다 주신 상태입니다. 다시 예수님은 물고기를 보여 주시며 이것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먹고 영생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먹는 자는 영생합니다.

  성만찬 때도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영생하라고 하셨습니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상징입니다. 이것을 먹으면 영생할 것입니다. 영생하는 잔치의 최후의 만찬을 베푸신 것입니다.
  떡에 대하여는 요한복음 6:51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셨습니다.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를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 10:30에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디모데후서 1:10에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베드로후서 1:11에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먹고 영생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기를 먹으라는 말은 예수님을 먹으라는 말입니다. 떡을 먹으라는 말은 내 몸을 먹으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영생합니다. 영생의 잔치가 베풀어진다고 하십니다.

  물고기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여 잡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다시 가져오게 하십니다. 주님의 주신 선물을 선물로서 사용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얻은 것은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야 합니다. 은혜로 덤으로 받은 고기를 함께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저 주고 함께 영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

  베르자예프는 “내가 먹는 빵은 하나의 물질이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빵은 영적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빵도 고기도 다 물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양식으로 먹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은 물질에 불과한 음식이 아니라 영적인 음식이며 우리로 하여금 영생하게 하는 음식입니다.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애쓰지 마십시오.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지 마십시오.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양식이 될 것에 목숨을 거십시오. 배부르게 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영혼이 살질 것입니다. 매일 우리의 삶이 성찬의 삶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풍요한 삶을 사십시오. 매일 참 양식을 먹고, 진정 배부르게 할 것을 먹고 사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 먹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먹는 마음의 천국 잔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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