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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 므나의 비유 (눅 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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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인덕 목사

우리 생명의 날이 언제 끝나게 될 지를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생명의 날이 언제까지가 될지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우리 삶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언제 주님이 오시든지 아니면 언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든지 그것이 그렇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에녹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자식을 낳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자식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므두셀라는 "세상 종말이 오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므두셀라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세상 종말이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의 이름을 부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 그 날부터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실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 결과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들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주는 뜻대로 므두셀라가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 노아의 대홍수가 일어나 온 세상의 종말이 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날들이 얼마나 오래 이어질지 아니면 당장 오늘로 우리의 삶이 끝나게 될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에 주어진 모든 시간과 기회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까?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시게 됩니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열 므나의 비유로 일컬어지는 이 비유를 통해서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세상을 준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여러 번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으라" 거듭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지 사십일 째 되는 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이 때의 일을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그러니까 단순히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기 위한 권세를 얻고자 하나님 나라로 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함께 살게 될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왕이 되는 것을 악한 마귀는 대단히 싫어합니다. 사단 자신에게는 그 날이 멸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잡아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니 그뿐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만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훼방거리를 만들어서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고 예배에 나와도 다른데 정신이 팔리게 만들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보세요 잘 지내던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꼭 예배에 나오기 직전에 마음이 상할 일이 생깁니까? 아니 생전 그런 일이 없다가도 은혜를 크게 받고 감사하며 나서자마자 왜 다툴 일이나 마음 상할 일이 생기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런데 그의 시민들은 그를 미워하므로, 그 나라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렇습니다. 악한 마귀는 예수님이 왕이 되어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들고자 하여 이런 저런 방해거리들을 우리들 앞에 펼쳐 놓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계획이 어그러집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날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것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해야 합니까?
먼저 기억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달란트를 각각 맡겨주시는데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는바 므나의 비유에서는 모두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을 맡겨주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곧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이 주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어떤 일은 보다 중요하고 어떤 일은 보다 더 힘들고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씩만 맡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이 중요합니다. 단지 그것을 우리의 기준으로 따져서 누구는 더 중요한 일을 맡았고 나는 작은 일을 맡았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누구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오해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일들이 아니 우리가 맡아서 하는 일들이 다 주님께는 귀한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자기를 높일 이유도 없고 스스로 자기를 낮출 이유도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는 보다 소중하고 보다 귀한 일이 있는 것 같아도 주님의 기준으로는 다 똑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이 주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일을 하는데 있어서의 수고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한 사람은 한 므나를 가지고 나가서 장사하여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하여 다섯 므나를 법니다. 그리고 그 수고한 것에 따른 상급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열 므나를 번 사람에게는 "착한 종아 잘 했다. 네가 가장 작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여라" 말씀하시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칭찬과 더불어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다섯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도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여라" 말씀하시며 칭찬하시며 상급을 주십니다.

반면에 한 므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던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십니까?
"이 사람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 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그렇다면 한 므나를 가진 사람에게는 왜 그것을 빼앗아서 열 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야무진 분이요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시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이 너무 무서워하여 그것을 잃어버리느니 한 므나라도 그대로 지니고 있는 편이 낫겠다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님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은 야무진 분이라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시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시므로, 나는 주인님을 무서워하여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주인이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것입니까? 아니 그럼 여기 한 므나는 맡긴 것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결국 주인이 화를 냅니다.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하겠다. 너는 내가 야무진 사람이라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 알고 있었지?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화를 은행에 예금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라면 내가 돌아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것을 찾았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내가 잘 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맡겨주신 일을 내 나름대로 정성껏 최선을 다해 감당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이 따르지만 게으른 사람, 맡겨진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진노가 따른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자기의 능력의 차이에 따라 그리고 얼마나 정성을 쏟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한 므나를 가지고도 열 므나를 남기고 다른 사람은 같은 한 므나를 가지고 다섯 므나밖에 남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 스스로 나는 능력도 없고 나는 은사도 없고 나는 뭣도 없고 뭣도 없고 나는 뭐도 못하고 뭐도 못하고 하면서 패배 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에게는 얻을 것이 없습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안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 하는 일이 무슨 힘이 나겠으며 스스로 가치 없고 별 볼 일 없는 일로 생각하며 하는 일이 무슨 신이 나겠고 무슨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고 믿음의 고백이 따라야 합니다.
잠언 12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으며, 자기가 손수 일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
또한 잠언 13장 2절과 3절에서도 "선한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지만, 반역자는 폭행을 당할 뿐이다. 말을 조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지만, 입을 함부로 여는 사람은 자신을 파멸시킨다" 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말이 열매맺는 말을 한다면 그로 인해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게 되지만 우리 스스로 믿음 없는 말을 하게 되면은 그로 인해 스스로는 파멸시킬 뿐이라는 것이요 두드려 맞는 반역자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주님이 보시기에는 다 똑같이 귀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더 중하고 누가 더 귀하고 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우쭐댈 이유도 없고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그 일을 잘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일에 얼마만한 정성을 쏟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그 일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를 감사하며 고백하고 있는가 입니다. 그 일이 내 힘에 버겁게 느껴진다면 주님께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이요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가 능히 감당케 하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11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따라서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해야 합니다. 내 지식 내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의 지혜와 주님의 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은사도 그렇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을 가지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주님의 일에 힘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능력보다 주님의 능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받은 바 은사를 활용하여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지혜의 어떤 것보다도 주님의 지혜의 미련한 것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당연히 주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전도도 어떤 방법을 배워서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주님이 전도의 은사를 더해 주신다면 이는 더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습니까?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를 사용해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내 생각이 담겨집니다. 내 욕심이 담겨집니다. 하지만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나는 단지 도구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사용해서 주님이 기도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주님의 언어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라고 고린도 전서 13장 1절에서 말씀하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방언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랑을 품도록 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사랑이 부족하다면 주님의 사랑이 내게 넘쳐나기를 위해서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사랑은 성령의 열매의 첫 번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게 될 때에 내 안에 먼저 생겨나는 것이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단지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되지 않도록 먼저 사랑의 마음을 품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가며 그 마음으로 우리가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 1: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나에게 이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예수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직분을 맡겨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여기 한 므나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맡겨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맡아서 하는 모든 일이 나의 일이 아닌 주님의 일이요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내 능력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능력대로 수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손을 부지런히 놀려야 합니다. 결코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될 일입니다. 그것도 주께서 내게 능력 주신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못한다"가 아니라 "나는 못해도 주님이 힘 주시니 할 수 있다"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요 힘들수록 더욱 "주님이 내게 능력 주셔서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주님이 귀한 상급으로 채워주십니다.

왜 주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십니까? 우리를 복 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우리가 열매 맺는 아름다운 말, 믿음의 고백과 함께 수고함으로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귀한 상급도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나의 이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살게 되면 가진 것마저 빼앗기에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일을 훼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훼방하게 되면 결국 버려질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의 일에 협력하십시오. 함께 수고하십시오. 힘들기에 더욱 힘을 합치십시오. 그리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받게 될 상급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며 주어진 모든 일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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