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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조연배우(3) : 나는 무익한 종이라, 엘리에셀 (창 2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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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원망 대신 은혜로

구약에 나오는 위대한 조연배우 중에서 단연 빛나는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입니다. 엘리에셀은 ‘하나님은 도움이시다’라는 뜻인데 그 이름 그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이었고 나아가 그 자신이 남을 돕는 조연이 되어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이며 조연배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15장부터 시작됩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아들을 약속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잘 믿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브람은 이미 기다림에 지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과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실 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즉, 아직도 후사가 없는 아브람에게 아들을 줄 뿐 아니라 그 후손들이 많게 하여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은 창세기 13장 14절 이하에서도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겠다고 다시 한번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창세기 15장에 이르러서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을 텐데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아브람은 슬슬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기약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냥 기다리기보다 나름대로 인간적인 해결 방법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 방법은 바로 15장 2절에 나온 대로 자기 집에서 기른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당시로서는 아주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고대 중동에서는 아들이 없어 상속자가 없고 대가 끊어질 상황일 때 종들 중에 택한 사람을 상속자를 삼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에게 다시 한 번 약속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십니다. 4~5절을 보면 “그 사람(다메섹 엘리에셀)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아브람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의 자손이 이 하늘의 뭇별과 같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아들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아브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결국 종인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상속해 주려던 아브람의 계획은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런데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 오늘 본문인 창세기 24장에 다시 한 번 등장합니다. 물론 창세기 24장에 보면 주인인 아브라함의 명을 받들어 아들 이삭의 아내 감을 찾아 나선 종은 그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름도 성도 없이 다만 ‘종’이라는 명칭으로 나올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이름도 없는 종을 다메섹 엘리에셀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이 이 종을 다메섹 엘리에셀이라고 보는 이유는 2절에 나옵니다.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 사명을 맡겼다고 나와 있는데 여기서 ‘늙은’으로 번역된 히브리말 ‘자켄’은 ‘장로’(elder)라고도 번역되는 말로서 존경받는 사람을 나타내는 호칭입니다. 그래서 이 노종은 약 60년 전에 아브라함의 상속자로 지명되기도 했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며 아마도 이 엘리에셀은 이삭의 탄생 이후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한 집사장이 되어 최선을 다하였기에 주인에게는 사랑과 신뢰를, 동료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았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는 종의 성품과 장점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잘만 하면 내가 이삭 대신 주인의 상속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는 원망과 “저 녀석만 없으면 모두 내 차지인데” 하는 아쉬움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엘리에셀은 자신의 종으로서의 처지와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원망이나 섭섭함이 아닌 주인 아브라함에 대한 충실한 보답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에게 대한 충성뿐 아니라 주인의 아들인 이삭에 대해서도 충실하게 사명을 다하는 모습은 이 엘리에셀이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내 상속자 자리를 빼앗아갔다고 원망할 수도 있는 주인의 아들 이삭은 엘리에셀에게는 원망의 대상도, 경쟁의 대상도 아닌 주인 아브라함과 똑같은 충성을 다 바칠 주인이었을 따름입니다.

내 며느리 감은?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다메섹 엘리에셀로 추정되는 이 종이 주인을 위해 어떻게 일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엘리에셀의 태도는 오늘날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성된 일군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1~9절을 보면 이삭의 아내를 고르는 일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아 늙어가는 아브라함은 속히 며느리를 맞아 아들 이삭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어가도록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부모님은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데 자녀들이 도무지 시집 장가 갈 생각을 안 해서 속 타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이렇게 모든 부모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녀가 가정을 이루고 대를 이어가는 것을 보려는 마음이 점점 더해가는 법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며느리 감, 이삭의 아내 감으로 생각한 사람이 누구인지, 즉 며느리 감의 조건 세 가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조건은 3~4절에 나옵니다. 즉 가나안 족속이 아닌 아브라함의 고향 동족의 딸 중에서 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고 혈통의 순수성과 나아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노력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4절)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식들 결혼을 시키면서 정작 시집 장가는 내 아들 딸이 가는데 유독 부모들 입장에서만 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시집 장가를 부모가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내 아들 이삭을 위해’ 택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혼사에 있어 당사자인 자녀의 입장과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조건은 5~8절에 나오는데 엘리에셀이 “주인님 만약 그 여자가 저를 따라 이곳으로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아드님 이삭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까?” 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절대 이삭을 그 곳에 보낼 수 없으므로 그 종을 순순히 따라올 수 있는 여자를 택하라고 명합니다. 결혼의 주도권은 반드시 남자 쪽에 있어야 한다는 고집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실 때마다 “이 땅을 네 씨에게 주겠다”는 약속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굳이 이 땅으로 며느리를 데려오려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최고의 판단 기준이 바로 인간적인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아브라함의 며느리 감 조건 세 가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시간 여러분이 며느리 감이나 사위 감을 고르는 기준 세 가지만 말해보라고 한다면 무엇 무엇을 대시겠습니까? 우리는 내 배우자를 택할 때, 혹은 내 자녀의 배우자를 찾을 때 어떤 기준을 가지고 찾느냐, 바로 우리의 가치관 문제입니다. 우리의 기준이 과연 성경적이요 신앙적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조건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외모나 재산, 직장이나 집안 같은 외적인 조건보다 당연히 신앙이 더 중요하다고 말을 하지만 정작 혼사를 치를 때는 이런 영적이고 신앙적인 조건이 아닌 세상 사람들이 찾는 조건과 하나도 다름이 없는 그런 조건을 찾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며느리 감을 찾아서

이제 본격적으로 주인 아브라함의 명을 받드는 충직한 노종 엘리에셀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위에서 살펴본 며느리 감 조건 세 가지를 말한 다음 이 충직한 노종에게 내 환도뼈 밑에 네 손을 넣어 맹세하라고 시킵니다. 이렇게 손을 상대방의 환도뼈(아마도 넓적다리뼈) 밑에 넣고 맹세하는 것은 고대 중동에서 충성이나 절대 복종을 맹세할 때 썼던 방법입니다. 이미 앞서 언급한 바대로 충직한 노종 엘리에셀은 이 맹세 때문이 아니라 본디부터 충직한 사람이었고 그 충직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아브라함 집의 모든 소유를 맡아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충성스러운 종 엘리에셀은 주인의 명령을 틀림없이, 확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메소보다미아로 출발합니다. 10절부터 엘리에셀이 며느리 감을 찾는 과정이 나오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엘리에셀이 정말 충성스러우면서도 지혜롭고 또한 신실한 신앙을 가진 종이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로 엘리에셀은 자신에게 맡겨진 이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시작합니다. 12~14절을 보면 엘리에셀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이 기도는 정말 기막히게 훌륭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 일을 합니다. 이 일이 원만하고 순탄하게 잘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인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이 일이 잘 이루어져서 제가 칭찬 받고 인정받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제 주인이 은혜를 받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하나님의 일이 잘 되면 누가 영광을 받아야 합니까? 내가 아닌 내 주인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종의 태도입니다. 종은 누구입니까? 주인의 소유입니다. 내 존재이유는 오직 주인뿐입니다. 주인을 위해 살고 주인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내 이름이 드러나고 내 자신이 나타난다면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바로 엘리에셀처럼 모든 일을 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기도하고 일을 시작하는 태도가 중요하며, 나아가 그 모든 결과가 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다메섹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그저 ‘아브라함 집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으로만 나타나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나는 없어지고 내 이름은 사라지고 오직 주인이신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만 드러나야 한다는 종의 태도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15절에 보면 엘리에셀이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본문에 보면 이 소녀는 얼굴도 무척 예쁘고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인데다 집안도 아브라함이 바라는 대로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손녀 뻘이 됩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우물은 수십 미터 깊이로 깊습니다. 그 깊은 우물에 들어가 물을 그 항아리에 채워 나오는 모습은 리브가가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한 처녀임을 보여 줍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처음 보는 나그네를 위해 그 힘들게 떠온 물을 기꺼이 마시게 할 뿐 아니라 시키지도 않았는데 약대까지 물을 먹여 줍니다. 자, 얼굴 예쁘지요, 집안 좋지요, 부지런하고 친절하고 상냥하지요, 이만한 며느리 감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 같으면 이것저것 볼 필요도 없이 곧바로 며느리 감으로 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에셀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21절에 의하면 엘리에셀은 리브가를 묵묵히 주목하여 보면서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셨는지 여부를 알고자 했습니다. 아마도 엘리에셀은 이 순간에 잠깐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안목과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이 여인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인가? 하나님이 택하신 며느리 감인지 알려고 한 것입니다. 정말 귀한 태도입니다.

세 번째로 26절에 보면 엘리에셀은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가장 먼저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는 모습입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는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일이 잘 되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이 엘리에셀은 귀한 종입니다.

네 번째로 엘리에셀은 일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인의 입장에서 이루려는 사람입니다. 리브가의 안내를 받아 브두엘의 집으로 간 엘리에셀은 브두엘의 환영을 받습니다. 모든 일이 순탄하게 다 끝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만하면 쉴 만도 하고, 대접도 받아볼 만 한데 33절에 보면 이 종은 브두엘이 베푼 음식을 먹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 말 하는 것 좀 보십시오.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않겠습니다.” 즉 “내가 맡은 사명을 말하기 전에는 먹지도 않겠다”라는 뜻이지요. 엄청난 책임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34절) 누가 물어봤습니까? 왜 굳이 자신이 아브라함의 종이라고 밝힙니까? 그는 먼저 자기 신분을 분명하게 밝힌 후 자기가 맡은 사명을 밝힙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종임을 분명히 알고 겸손해야만 내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는 법입니다. 마지막으로 54~55절에 보면 이 종은 브두엘이 적어도 열흘 이상 머물라는 청을 뿌리치면서 속히 주인에게 며느리를 데려가겠다고 말합니다. 맡은 사명은 이렇게 끝까지 분명하게, 철저하게, 또한 신속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지금까지 우리는 엘리에셀이라는 아브라함의 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명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종이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엘리에셀의 모습을 보며 신약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7:7~10 말씀입니다. 찾아서 읽어봅시다.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여기 나오는 종은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주인의 밭을 갈고 양을 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인이 이 종에게 이제 좀 쉬라고, 너도 앉아서 먹으라고 할만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주인은 종에게 음식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식사 하는 동안 수종 들라고, 너는 그 다음에나 먹으라고 명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종은 속이 상했을까요? 화도 나고 주인이 너무한다고 원망했을까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이 할 일은 죽기까지 주인을 섬기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잠시도 쉼이란 없습니다. 주인이 명하면 무조건 순종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죽도록 충성했다고 해서 9절에 나온 것처럼 주인이 사례를 하겠습니까? 월급을 주겠습니까? 진정한 종은 이렇게 죽도록 일한 다음에도 10절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고백입니다. “나는 무익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종일뿐입니다. 칭찬도 인정도 사례로 필요 없습니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종의 모습이며 진정한 조연의 모습입니다.

해병2사단장 장로님이 보낸 기념품 수건에 쓰인 ‘한 번 해병은 천국까지 해병’이라는 구호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한 번 종은 영원히 종입니다. 천국까지 종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하나님에게 어떤 종일까요?

기도

아브라함이 가장 중요한 며느리 감 찾는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이 충직한 노종 엘리에셀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인이신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일을 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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