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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부장의 믿음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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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마 8장과 9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오늘은 두 번째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장성한 후에 사시게 된 동네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가버나움 지역에서 치안을 맡고 있는 로마 백부장에 관한 일입니다. 이 백부장의 하인 중 한 사람이 중풍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 병을 고쳐주신 내용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이 백부장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1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신 일들을 볼 때, 대부분 병 고침을 받는 사람들의 믿음이 언급됩니다만, 오늘 본문은 병 고침을 받은 하인의 입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고, 그 하인의 주인인 백부장의 믿음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 특별합니다. 이렇게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께서는 13절에 보니,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에 대해 칭찬을 하시고, 또 “믿음대로 되었다”라는 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 “믿음”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줄 압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사실, 모두 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 자기가 믿는 대로 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 스스로 믿는 바대로 말하고, 무슨 행동을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무슨 결정을 할 때도 믿는 바대로 결정爛求? 우리가 특히 기독교인이라 해서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자기들 나름대로 믿는 바대로 행하며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우리는 주관적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신념(self-conviction)”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관적인 믿음, 곧 신념에는 부족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객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객관성이 없다면 이러한 주관적인 믿음은 착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객관성이 없는 스스로의 주관적인 믿음에 그치는 모습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신념”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으로서의 믿음이란 이러한 객관성과 주관성을 함께 갖춘 믿음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의 믿음이 바로 이러한 주관적인 믿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음으로 객관성을 확보한 믿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에 주관성과 객관성이 확보될 때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오늘날 우리들이 지녀야 할 믿음이란 바로 이렇게 주관성과 객관성이 함께 갖추는 믿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백부장의 주관적인 믿음이 예수님으로부터 객관성을 확보하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 봄으로 우리들도 우리의 신앙에 이러한 주관성과 객관성이 함께 갖추어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백부장의 모습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로 볼 수 있는 모습이 5절과 6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이 지역의 로마 백부장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부탁을 합니다. 자기의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고생하고 있다고 고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부장의 자비로운 마음을 봅니다. 자기가 거느리는 종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서는 모습을 봅니다. 이러한 아량(tolerance)을 지닌 백부장이었습니다.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돌보고자 하는 덕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덕스러운 마음과 자세, 이는 믿음의 주관적인 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예수님에 대한 이 백부장의 배려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요청을 들으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7절).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백부장이 하는 말이 독특합니다. 8절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저는 어려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왜 이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꺼려했을까? 아마 수고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괜히 손님이 오면 번거롭고 힘드니까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백부장의 태도는 그다지 훌륭하다고 볼 수는 없는데, 왜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믿음을 칭찬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7절과 8절이 매끄럽게 연결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최근의 번역에는 7절의 말씀을 의문문으로 번역합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랴?(Shall I come and heal him?)”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7절의 말씀은 “내가 가서 고쳐주랴?”라는 의문문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의문문으로 번역을 하면 8절과도 잘 연결이 됩니다. 왜냐하면 8절에 보면,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라고 “대답했다”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7절에서 의문문으로 물으니까, 8절에서 대답했다는 의미로 표현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7절을 “내가 가서 고쳐주랴?”고 의문문으로 물어본 것이냐, 아니면 “내가 가서 고쳐주겠다”고 말한 것이냐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의구심이 여전히 남습니다. 그것은 이 백부장이 왜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한 입장을 취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모르는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 이를 오늘날 우리들은 모르지만, 이 마태복음을 처음에 읽었던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한, 곧 깨끗하지 못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과는 같이 어울리거나 특히 식사 초대 같은 일은 상상하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입장을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인 예수를 자기 집에 오게 하는 것은 유대인인 예수님을 곤란하게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여기에 개의치 않고, (7절에서처럼) “내가 가서 고쳐주랴?”고 물었던 것이고, 이에 백부장은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부장의 배려의 마음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마음과 자세 이 역시 믿음의 주관적인 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셋째로 이러한 배려의 모습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백부장은 자기의 처지와 경험을 예수님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9절입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이 백부장은 군인으로서 자기 상관이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시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고, 또한 자기 밑의 부하에게 명령했을 때 그대로 시행하는 현실을, 예수님과 자신의 입장에 그대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 또한 우리의 주관적인 믿음의 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매일 매일의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많은 일들을 토대로 나름대로의 어떤 삶의 철학을 이루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 역시 살아가는데 있어서 참으로 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날마다의 삶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이루어나갈 수 있게 하는 배움의 장소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약한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자세, 상대방의 입장과 현실을 배려하고자 하는 자세,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연결시킬 수 있는 모습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자세는 모두 믿음의 주관적인 내용으로 표현되기에 아주 훌륭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 자체로는 믿음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는 볼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도 이러한 모습을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한 사람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자세라든지, 남을 배려하는 입장이라든지, 매일의 삶에서 어떤 귀한 삶의 철학을 발견하는 것 자체는 기독교 신앙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주관적 자세를 가진 이 백부장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계기는 6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께 나아와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예수님께 간구한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부른 사실은 예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자 하는 믿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믿음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믿음의 객관적인 내용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코자 하는 가운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깨달음을 가질 수 있도록 늘 우리의 마음을 기도를 통해서 비울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비우지 않고 성경을 보면, 성경을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늘 깨어있는 마음과 자세, 그리고 깊이 있고 진실한 겸손으로 말씀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음성이 깃든 믿음의 객관성을 우리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믿음의 주관적인 내용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관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열심도 되겠고, 우리의 독특한 삶의 자세도 되겠고,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고유한 탈렌트도 될 것이고, 우리의 특별한 어떤 성품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믿음의 객관성으로 채울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그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좀 더 용기를 가지고 이러한 우리의 믿음의 객관성이 확보되어 있는가를 스스로 탐구해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백부장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는 이러한 백부장의 모습을 누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0절에 보니,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 백부장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러한 예수님의 음성을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우리들의 마음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부장의 믿음의 자세를 다름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곧 제자들에게 소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적용하지 않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두에 두고 예언적 말씀도 하십니다. 11~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이스라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는 예수님의 이러한 믿음의 객관적인 입장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던,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인정받는 믿음의 객관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스스로의 믿음의 주관적인 내용만을 고집했던 유대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인 실례를 또한 가버나움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마 11:20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권능을 많이 베푸셨던 가버나움을 비롯한 몇 개의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한탄의 말씀을 하신 것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버나움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23-24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 역시, 예수님의 깊이 있는 사역을 보면서도 거기에 감응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변화를 꾀하지 못한 무감각했던 가버나움 주민들의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이러한 주님의 평가가 나에게 어떻게 주어질지를 미리 생각해 볼 줄 아는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믿음의 객관성이 있는가 하며 스스로 물을 수 있는 용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에는 주관적인 내용과 객관적인 내용이 같이 있어야 합니다. 주관적인 내용만 있으면 믿음의 환상과 착각 속에서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내용만 있고, 주관적인 내용이 없으면 그저 겉도는 모습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을 앵무새 모양, 입으로만 외는 듯한 그러한 모습의 자세라면 이는 주관성이 없는 신앙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에는 주관적인 내용과 객관적인 내용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비로소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할 때, 우리들도 이 백부장처럼 “내가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는 칭찬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바람직한 주관적 신념에 주님이 인정하시는 객관성을 지닐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믿음의 주관적 내용과 객관적 내용이 함께 어우러짐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 사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러한 칭찬받는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잘 간직해 갈 수 있는 길을 배울 수 있게 하시고, 나보다 연약한 자에게 순수한 도움을 베풀 수 있으며, 남의 형편을 잘 헤아려 배려할 줄 아는 모습, 그리고 나아가서는 나의 고유한 모습들을 잘 살려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모습을 간직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저희들의 모습에, 하나님 앞에 늘 주님의 이름으로 겸손하게 나아가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믿음의 객관성도 확보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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