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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Ⅰ(고전 1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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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권 목사

오늘은 5월 첫 주일로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은 1856년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레오날드 목사가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킨 이래 미국 전역과 미국에서 복음을 전파한 곳에서도 어린이 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일년 중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때에 꽃으로 예배당을 장식하고 예배를 드려 "꽃 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는 미국 선교의 영향으로 6월 둘째 주일에 어린이 주일을 지켰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주창한 어린이날이 5월 1일이었습니다. 어린이날이 일본의 압제로 폐지되자, 어린이 주일과 합쳐져 5월 첫째 주일에 어린이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꽃으로 장식하는 것보다 꽃을 찾아 야외로 나가는 꽃 주일의 야외 예배가 되었습니다. 해방으로 어린이날이 회복되어 5월 5일로 정착하게 됨으로 야외 예배의 모습이 점점 사라진 것입니다.

어린이는 미래의 꿈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음 세대를 이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린이들을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어린이 헌장을 제정하고, 공휴일로 정하고, 갖가지 행사들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밖의 행사가 너무 크고 화려하게 행하여짐으로 어린이 주일의 행사가 그 빛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날이 폐지되었을 당시에도 어린이 주일은 계속 지켜졌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어린아이 하나를 예수님처럼 귀하고 귀한 존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3절/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아이에게는 버려야 할 것도 있고, 값지게 간직할 것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판단의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그만큼 귀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모든 사람은 태어나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갑니다. 어린아이가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가면서 버려야 할 것과 그대로 간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또 간직해야 할 것을 간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 다 장성한 사람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간직해야 할 것은 어린아이나 장성한 사람이나 똑같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못함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잘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미래의 꿈인 어린아이를 잘 양육하도록 다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선생은 제자를 잘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이요, 우리 교회의 미래입니다. 비록 지금은 적은 무리들이지만, 어린 주일 학생들이 잘 양육되어 미래의 덕산교회를 책임져야 할 참으로 존귀한 존재입니다.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어린아이를 살펴보고, 또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얻기 위해 기도하는 「한나」를 봅니다(삼상1:10-11). 남자아이는 다 죽이라는 애굽 왕의 칙령 앞에서도 어린아이의 생명을 끝까지 지키려고 애쓰는 「요게벳」을 봅니다(출2:2-3). 이렇게 어린아이 하나를 존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사무엘과 모세와 같은 위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나오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런 마음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으로 잘 양육해야 하겠습니다.

1.누가 어린아이인가?

본문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고"....

어린아이는 어렸을 때를 말합니다. 어린아이도 성장 시기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만도 복중의 아이 곧 태아(눅1:41), 젖먹이(마21:6), 젖뗀 아이(사11:8), 13세의 아이(창21:12), 17세의 아이(창37:30),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밖에도 더 있으리라 봅니다. 90이 넘은 노모에게는 환갑이 지난 아들도 어린아이로 보인다고 하지요. 누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어린아이에 대한 개념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고"....

여기의 "어린아이[네피오스(nhvpio")]"는.... 「부정접두사+말」로 된 단어입니다. 곧 말을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갓난아이, 아기, 단순한 자"를 뜻합니다. 본문 11절 속에 이 "어린아이[네피오스(nhvpio")]"가 6회나 나타납니다. 그만큼 "어린아이[네피오스(nhvpio")]"를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성도들은 "어린아이[네피오스(nhvpio")]"의 일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13절/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여기의 "어린아이[네피오스(nhvpio")]"가 같은 단어입니다. 본문 11절의 "어린아이[네피오스(nhvpio")]"를 성경이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네피오스(nhvpio")]"는 「젖을 먹는 자」라고 했습니다. 곧 젖먹이를 말하는데, 신앙적으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했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여기의 "경험하지 못한 자[아페이로스(a[peiro")]"는.... 「부정접두사+시련」으로 된 단어입니다. 곧 시련을 겪어보지 못한, 시련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서투른, 무지한, 익숙치 않은"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씨뿌림의 비유에서 이렇게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를 가리켜 돌밭에 뿌려진 것으로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했습니다(마13:20-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얼마나 귀한지는 자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 압니다. 사람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복 주심 속에 결혼하여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면 어린아이를 선물로 받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 복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성경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한나」입니다(삼상1:10-11).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한나는 기도로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자식을 품에 안아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환경의 오염으로 불임(不姙)이 점점 늘어갑니다. 억지로 아기를 가지려다보니 무리하게 되고, 그 결과 여러 가지 병으로,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아기들이 늘어갑니다. 욕심 많은 사람들, 더욱이 죄로 물든 마음이니 사랑보다는 자기 욕심이 앞서게 됩니다. 돈을 드려 억지로 아기를 가지려는, 그렇게 원할 때와는 딴판으로 장애를 가진 자식을 내다버리는 일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남의 자식을, 그것도 장애아를 입양하여 데려다 키우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기 자식을 내다버리는 사람들은 아직도 어린아이를 벗어나지 못한, 그야말로 욕심이 사나운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보기 싫다고, 힘들다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거추장스럽다고 자식을 내다버리는 그런 사랑이라면, 이 세상 그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그 사랑을 알기에 우리 성도들은 그 사랑을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귀한 선물, 자식에게 그 사랑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사랑을 쏟아 붇는 자식이 엉뚱한 짓을 하며, 그 사랑을 모를 때.... 그 섭섭하고, 애타고, 화나는 마음,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향한 섭섭하고, 애타고, 화나는 마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우리 성도들은 장성한 사람이 되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면 어린아이입니다. 누가 어린아이입니까?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나를 위해 버리시고, 나를 아들로 입양해 주셨는데, 그 큰 사랑 알지 못하고, 아직도 자기 욕심으로 자식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바로 어린아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있나 보시려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보기 싫다고, 힘들다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거추장스럽다고 내다버리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라고 했습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어린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 내 욕심에 차지 않아 보기 싫고, 미워집니까? 그 보기 싫고 미워지는 시련을 겪고 이기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애물단지가 아니라 복단지입니다. 바로 거기에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2.버려야 할 것

본문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다가」라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같다고 한 것은 현재 어린아이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어린아이는 육신적인 어린아이가 아니라 정신적인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곧 신체적 의미가 아니라 신앙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아이와 같다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앞 절의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말씀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본문9-10절). 곧 부분적으로 알고 예언하던 것이 온전한 것 앞에서 폐하여진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의 "폐하리라[카탈게오(katargevw)]"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의 "버리다[카탈게오(katargevw)]"는 같은 단어입니다. 다만 "폐하리라[카탈게오(katargevw)]"는 수동태로 "버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장성하다고 해서 어린아이의 일이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장성해서도 어린아이의 일을 간직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장성한 자」가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장성한 자가 되어 버린 어린아이의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는 것, 어린아이와 같이 깨닫는 것, 어린아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 같이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린아이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워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어른처럼 말하고, 어린아이가 어른처럼 깨닫고, 어린아이가 어른처럼 생각하는 것은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신앙적인 의미의 어린아이를 말하기에 이 어린아이의 일을 어서 속히 버리고 장성한 사람 곧 신앙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서로 자기가 받은 은사가 최고라고 자랑하다 다툼이 일어나고, 파벌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자기 은사가 최고라고 해도 그것은 부분적인 것으로 온전한 것이 올 때 폐하여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자기 은사가 최고라고 해도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부분적이고 온전하지 못하다....

물론 우리 성도들이 받은 은사가 부분적이고 온전하지 못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 폐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사가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인도하기에는 부족한 게 없고, 완전합니다. 나 보기에 아무리 작은 은사라도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합니다.

내게 주신 은사는 예수 더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본문12절). 이제는 희미하게 보나 그때는 얼굴을 마주봅니다. 누구 얼굴입니까? 주님 얼굴입니다. 이제는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는 온전히 압니다. 누구를 압니까? 주님입니다.

내게 주신 은사는 또한 나를 더 알기 위함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한 성령이 주신다고 했습니다(고전12:4).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고전12:7). 예수를 알아가고, 예수를 닮아 가는 일에 내게 필요하니 은사를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닮기 위해서 나를 더 알아야 됩니다. 죄악 된 내 모습을 바로 알아야 예수님의 모습으로 가꿀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면, 내게 필요한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공급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자랑하고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주를 아나, 그때는 내가 주를 온전히 알리라는 말씀입니다. 은사의 거울을 통하여 주를 보는 게 아니라 대면하여 주를 뵈오니 은사의 거울은 더 이상 쓸모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내가 온전히 알리라[에피기노스코(ejpiginwvskw)]"와 "주께서 나를 안신 것[에피기노스코(ejpiginwvskw)]"은.... 경험적으로 "확실히 안다"는 뜻의 같은 단어입니다. 서로 다른 점은 "내가 온전히 알리라[에피기노스코(ejpiginwvskw)]"에서는 미래 능동태로 앞으로 내가 아는 것이요, "주께서 나를 안신 것[에피기노스코(ejpiginwvskw)]"에서는 과거 수동태로 직역하면 「이미 내가 알려진 것」을 말합니다. "주께서"는 의역으로 첨가된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아시는 내가 바로 나에 대한 온전한 지식입니다. 같은 말씀을 갈라디아 4:9절에서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된 내가 비록 내가 보기에 반쪽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신 바 된 내가 바로 온전한 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했습니다(히5:13). 다시 말해서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자를 말합니다. 이 말은 그만큼 젖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한 곳에 집착하는 현상은 바로 욕심으로 나타납니다.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이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도 어린아이의 특징을 가지고, 서로 분쟁하고, 나아가 편당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더 알기 위해서 주신 은사인데,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께닫게 하시려 주신 은사인데.... 오히려 자기를 자랑하는 은사로 오해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나의 은사가 최고라 할지라도....

그것은 부분적이요, 온전하지 못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온전한 것이 바로 「주께서 나를 아신 것」이요, 「하나님의 아신 바 된 나」입니다.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고 부르짖지만(욘4:9),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요나는 그의 외침으로 큰 성 니느웨를 멸망에서 건져내는 요나입니다. 비록 요나 자신은 원치 않았지만(욘4:2), 억지로 외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는 소리에 큰 성 니느웨가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는 자가 어린아이라고 했습니다. 젖을 움켜잡고 놓지 못하는 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게 되면 젖은 주어도 먹지 않습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도록 어린아이를 양육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고난과 시련, 환란과 핍박을 당하되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승리하는 자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젖을 버릴 수 있습니다. 젖을 움켜잡고 놓지 못하는 그 욕심을 버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3.간직해야 할 것

본문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여러 가지 은사들 중에서 폐하여지지 아니하고, 항상 있을 은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곧 신망애(信望愛)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항상 있을 것인데[메노(mevnw)]"는.... "머물다, 거하다"는 뜻입니다. "항상"이란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형으로 영원한 진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는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습니다(고전13:8).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믿음/소망/사랑의 은사는 어린아이에게도 있는 은사입니다. 항상 간직해야 할 은사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된다고 해서 버려야 할 은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언/방언/지식의 은사는 장성한 사람이 되면 버려야 할 은사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여 교제합니다(계22:4). 무슨 방언이 필요합니까.... 천국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신유의 은사가 필요하겠습니까....

마태복음 18:3절/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장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가진 것 중에서 간직해야 할 것을 간직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간직해야 할 것은 간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간직해야 할 것을 간직하지 못했기에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결코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간직해야 할 것을 간직하지 못하고, 내어버린 그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돌이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여기의 "돌이켜[스트렙호(strevfw)]"는.... "틀다, 돌아서다, 변하다, 바꾸다"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방향의 전환을 나타내며, 회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던 삶의 발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여 나아감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던 사람이 방향을 바꾸어,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방향을 전환하는 "돌이켜[스트렙호(strevfw)]"는 한번으로 끝납니다. 이것을 근본적인 단회적 회개라고 합니다. 그가 어디에서 돌이켰던[스트렙호(strevfw)] 하나님과의 상거가 멉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떠나온 만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또한 회개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상거/틈이 없는 사람은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돌이켜[스트렙호(strevfw)]"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

이 전체의 삶이 회개입니다. 회개(悔改)는 뉘우치고, 고치는 것입니다. 이 회개(悔改)를 뉘우치고, 속죄하는 것만을 생각하기에 한번 회개하지 두 번 다시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죄 용서함 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탕자가 참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용서함만이 아닙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가락지를 끼고, 신을 신고.... 탕자의 모습을 벗고, 본래의 아들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예수님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성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했습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하고, 간직할 것은 간직해야 하는데, 간직해야 할 것까지 버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돌이켜[스트렙호(strevfw)]" 그 버린 것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본래의 모습은....

단순하고, 순진하고, 겸손하고, 순종하고, 잘 믿는 것입니다. 의심 없이 잘 믿고, 잘 따릅니다. 이 모두를 합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진 이 간직해야 할 것을 버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소중히 간직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부모들이, 어른들이 해야할 일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을 되새기게 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부모가 자녀 교육에서 왜 화나게 합니까? 부모의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신은 버릴 것은 버리고, 간직할 것을 간직하고 있지 못하면서 자식에게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져야 합니다.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구해야 합니다. 그래도 사람은 부족하기에 자신의 것으로 하지말고, 주님의 것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주의 교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훈련입니다. 「주의 훈계」는 말로서 일깨워주는 교육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의 자녀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무너지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장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신앙 교육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곧 지상에서 천국으로 삶의 터전이 달라지는 교육입니다. 참 삶의 길을 인도하는 교육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잠2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버리지 못함으로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간직할 것은 간직해야 합니다. 간직하지 못함으로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은혜에는 고난과 시련이 따릅니다. 가시밭의 백합화가 향기를 더욱 나타냅니다. 그것은 꽃향기만이 아니라 바람이 불어 가시에 찔려 온 몸으로 향기를 품어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한 향기를 나타내는 여러분의 자녀들, 여러분의 가정, 우리 덕산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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