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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자녀와 부모의 도리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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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영복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 가운데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도록 가족들을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가정 공동체의 구성원은 부부와 자녀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가정의 기쁨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도다"(시128:3) 나무를 가꾸듯이 가족 구성원을 가꾸어 나가야 열매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정이 바로 이런 가정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엡6장) 말씀은 전반부분에서 가정에서의 여러 성원간의 역할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역할, 상전과 종의 역할이 그것입니다. (1-3절)이 자녀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며, 핵가족사회로의 발전은 부모님에 대한 효도까지 망각하는 시대로 우리를 내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 바뀌어도 부모자식간의 사랑은 바뀔 수 없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더욱 부모와 자식간에 사랑이 돈독해야 합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는 가정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사회 단위인 가정이 모든 사회 단위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지탱하는 사랑의 근거는 바로 효사상입니다. 효사상의 근간에 기독교 사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왜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라고 말하는지 살펴보고, 반대로 왜 기독교가 불효의 종교가 아니라 효의 종교인지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불효의 종교라는 누명은 쓴 이유가 잇습니다. 재래로 기독교는 우리 나라에서 불효의 종교라는 소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유교적 전통에 젖은 이들이 유교적 전통에 도전하는 인상이 짙은 기독교를 몰아세우느라 사용하는 논리입니다. 이제는 이 누명을 적극적으로 벗을 때입니다.

그 예로 드는 것이 바로 제사문제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조상을 제사하지 않으니 불효라는 것이지요. 유교적 전통인 제사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하는 효도의 형태입니다. 원래 제사는 '신명(神明)을 받들어 복을 비는 의례'라는 뜻으로 중국의 예서(禮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천지(天地),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비롯하여 풍사(風師), 우사(雨師), 사직(社稷: 토신과 곡신), 산악, 강천(江川)과 선왕(先王), 선조(先祖), 선사(先師)를 대상으로 지내는 것인데 우리 나라에선 조상에 대한 것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지방을 보면, 아버지일 경우 [현고모관부군신위(顯考某官府君神位: 무슨 벼슬을 지내신 아버님 신위라는 뜻)]라 하여 신격화합니다.

그 대상에서 보듯 선조에 대한 예를 갖추는 미풍양속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는 이것을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출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십계명을 지키려면 조상숭배는 불가능합니다. 유교적 전통을 따르지 않으면 다 불효입니까? 그럼, 오늘날 사모관대 안하고 부모님 앞에 무릎꿇고 앉지 않는 사람은 다 불효자입니까?

제사도 그렇습니다. 유교인들 조차도 지금은 3년상, 과삭망제(초하루와 보름날제 아침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제사의 예를 가지고 기독교가 불효의 종교라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유교적 전통은 돌아가신 어른을 위하여 제사를 드림으로 효를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살아서 하는 효를 강조하며 돌아가시면 추도예배를 드림으로 그분을 추모합니다. 방식이 다른 것입니다.

성경을 좀 아는 불신자들 중에는 성경을 들어가며 기독교가 불효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자주 드는 성경 구절은 (마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나라에서 상을 받을 때 이 세상의 것에 손해를 보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일한 자들이 더 좋은 상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부모나 자식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 (마12:46-5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밖에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이 왔다고 제자들이 말하자,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십니다. 이걸 가지고 꼬투리 잡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예수님이 어머니를 무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설명한 것입니다. 주님의 일의 중요성을 말한 것입니다.

또,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요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했다고 어머니를 보고 여자라고 한 몰상식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헬라어의 언어적 특성을 모르는데서 오는 무식한 반대입니다. 여기서 [여자]는 '귀나이'라는 단어로 '부인'의 뜻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은 공적 인물이기 때문에 어머니로서 국한되기보다는 부인으로서 메시야이신 예수를 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12살도 채 안된 소년이 아버지에게 가벼운 야단을 맞은 후, 총으로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정도가 아버지를 살해할 이유까지 될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경찰이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이 소년의 대답은 "아빠가 보기 싫어요"였습니다. 아마 자기가 하는 일마다 잔소리하고 간섭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의 자유와 인생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아버지의 사냥총으로 잠든 아버지에게 총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던 것입니다. 물론 이 소년은 수감되었지만 미성년이어서 소년 감호소 같은 곳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교도소의 숙직간수는 소등한 이후의 어두워져 가는 저녁 복도를 지나다가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가까이 다가보니 이 소년이 감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가느다란 소리로 뜻밖에 이런 말을 반복하고 있더랍니다. "아빠, 아빠가 보고 싶어요. 아빠, 미안해요. 그런데, 정말 보고 싶어요"라고 하더랍니다.


영어에 'love-hate relationship'이란 말이 있습니다. 애증의 관계라고 할까요? 심리학에서는 사랑하면서 때로는 그 사랑의 요구가 자기식으로 충족되지 않았을 때 사랑이 오히려 미움으로 변해버린답니다. 이런 경우들이 오늘의 가정에서 그리 낯선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시대에서 또다시 부모를 향한 자녀들의 책임을 말한다는 것은 어쩐지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 가부장적 시대의 도덕강론처럼 들려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믿는 성경이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변함없이 가르치는 이 시대 어버이들을 향한 자녀의 도리와 책임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살고 있었던 시대도 오늘 이 시대 못지 않은 급격한 윤리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로마제국이 전 세계를 정복하며 가져온 '팍스-로마나'의 식민지 문화는 기존 전통윤리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부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부모와 자녀사이의 전통윤리에도 상당한 의식과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돈을 찾아, 자유를 찾아 부모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가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와 같았던 에베소에는 아테미의 신전을 중심으로 사회가 음행을 합법화해주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거대한 로마식 체육관은 젊은이들의 힘과 기예를 한껏 상품화하고 있었고, 노인들은 사회의 짐스러운 구성원으로 가정에서 사회에서 주변인간으로 소외되고 있었습니다. 가정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서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은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냐?"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주후 60년대 초 그가 삼년여를 정성을 쏟아 양육하고 세웠던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이런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전달합니다.

부모에게 행해야 할 자녀로서의 도리와 부모로써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도리는 무엇입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여기에서 바울 사도는 어버이에 대한 그리스도인 자녀들의 결코 망각해서는 안될 세 가지의 도리와 책임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효의 책임이 있습니다.

1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의로운 행위라는 겁니다. [옳다]는 단어는 '디카이온'을 쓰는데, '정의'를 말합니다. 같은 교훈을 다루는 (골3:20)은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여,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불의는 남을 화나게 하고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의로움은 신나게 하고 기쁘게 합니다. 마땅히 효도를 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이 좋은 성도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 것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되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입니다. '믿음 안에서' 순종하고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의 효도는 불신자의 효도와는 격이 다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불신자가 죽은 조상을 섬길 때, 믿음의 사람은 살아 계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불신자가 유교도에 따라 조상을 신격화할 때, 신앙인은 보모의 생전에 주시던 교훈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를 믿음으로 이끄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입니다.


둘째는 순종의 책임이 있습니다.

6:1에"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부모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가르치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될 때에는 더 높은 권위이신 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예를 들어, 너 예수 믿지 말라 하면--)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심지어 잔소리처럼 들려지는 부모의 교훈 그 밑바탕에도 실상 자녀를 보호하려는 하나님이 주시는 본능 때문인 것을 안다면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정당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1절 말미에 우리가 순종해야 할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이것이 옳으니라. 에서 이 말씀은 너무나 자연수러운 자연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연법-Natural Law라고 합니다. 자연법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긴 양심의 법입니다. 어떤 문화권에도 부모 순종을 가르치지 않는 문화는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도리는 양심의 명령인 것입니다. 부모의 존재는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모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수 있어야 하고, 부모의 고통에서 하나님의 고통을 느낄수 있어야 하고, 부모의 눈물에서 하나님의 눈물을 볼수 있어야하고, 부모의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수 있어야 합니다.

국내 교도소에 수감된 어떤 분의 수형생활에 대한 참회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 작년 겨울 첫 면회를 오신 어머니께서는 창너머로 고개 숙인채 땅만 내려다 보고 있는 이 불효자식에게 한마디의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어머니께서는 '춥지?' 이 한마디를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보셨습니다. 이 한마디를 하시고 억지로 눈물을 참으시느라고 어머니의 눈가는 붉어지더니 한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냥 눈물이 아닌 피눈물 이셨습니다. '춥지' 겨우 그 한마디하시고 접견시간을 다 보내버리신 어머니는 성경책 한 권을 남기시고 떠나가셨습니다." 그후 다시 면회가 없으신 어머니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을무렵 형이 면회를 와서 형에게 어머니에 대한 불평을 하자, 형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야, 이놈아 아직도 정신 못차리니, 너 어머니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하고 말하더랍니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그가 다그쳐 묻자 그의 형은 어머니가 며칠 전화를 안받으셔서 찾아가 보니 엄동설한 추운계절에 자식의 죄가 내 죄 때문이라고 방에 불을 끊으시고 나도 감옥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며 자식의 죄와 어미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몸져누우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고백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금수만도 못한 내 두눈에 처음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눈물이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눈물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거스림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일입니다. 부모를 순종함은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존재의 방식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순종의 시작은 잔소리같은 부모의 말에 진지한 경청을 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의 뜻이 본래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모님의 말에서 사랑해서 권고하는 가르침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부모님의 사랑의 소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순종이 가능합니다.


셋째는, 공경의 책임이 있습니다.

2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어버이 주일에 주일학교 학생에게 엡6:1-3 말씀 성경봉독을 하라고 하니까, 이 대목을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격하라"고 읽었더랍니다. 공격이 아니라 공경입니다. 순종이 의지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단어라면, 공경은 정서적 측면이 더욱 강조된 단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 '공경'이라는 말은 희랍어에 'timao'라는 단어가 씌어졌는데, '굉장한 가치를 지니는 대상에 대한 부드럽고도 친밀한 반응'을 뜻하는 말입니다.(영어성경에는 honor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순종이 외적행동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공경은 내적태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행동으로뿐 아니라,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본래 두 개의 돌판에 나뉘어 쓰여졌습니다.

첫 돌판에는 1-4계명이, 둘째 돌판에는 5-10계명이 기록 되었습니다. 둘째 돌판의 첫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공경은 신의 명령이요, 신의 법입니다. Divine Law라고 합니다. 신의 명령은 자연의 명령 혹은 양심의 명령을 넘어섭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종이상으로 공경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 명령을 따르는 이들에게 두가지 약속을 합니다 1)네가 잘되고, 2)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위의 두가지 약속을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면 자동적으로 출세하고 장수가 보장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와의 건강한 관계를 맺고있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도 성공하고, 심리적으로도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 마음이 안정되어 있고, 내적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또한 장수할수 있다는 것은 아주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약속이라고 할만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비슷한 삶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질 높은 성공적 삶과 더 오래 장수의 가능성이 있는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일반적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의 모 식당에는 주인의 어머니사진이 걸려있답니다. 이 식당 주인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타주에서 플로리다로 이사온 후 해변가 도시에서 작은 식당을 경영했는데 정성껏 손님을 섬기다 보니까 식당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랜 노력과 계획 끝에 저축한 돈으로 드디어 아름답고 큰 식당을 바닷가에 열 준비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픈 직전에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어 그만 오픈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자기를 돕고 있었던 아들에게 두가지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1) 식당을 잘 경영해 달라고 하면서 그러나 사업보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 귀히 여기는 믿음의 삶을 살아달라는 것이요.

2) 이번에 오픈되는 식당에서는 술은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겻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유언대로 순종했는데 처음에 술을 팔지 않는다고 해서 말썽이 있었는데 주류회사의 폭력배같은 사람들이 위협차 찾아왔을 때 아들은 식당 입구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가르치며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이라'고 했더니 시비를 하지않고 가더랍니다.

식당에 사진 아래 다섯 줄의 글이 지금도 있답니다.

"어머니의 미소는 저의 추억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저의 용기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저의 등불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저의 능력입니다. 어머니의 주님은 저의 주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자녀의 도리를 다하는 자녀에게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2-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효도를 하면 축복을 주시는데 '잘되고 장수하리라' 하십니다. 우선 첫 계명이라는 말인데, 십계명 중 첫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는 것입니다. 근데 왜 첫 계명이라 할까요? "약속 있는" 즉, 축복의 약속이 수반되는 첫 계명이란 뜻입니다. 4계명까지는 계명만 있습니다. 그러나 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효도는 인간 도덕의 근본이어서 효도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축복을 받습니다.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도 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불효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신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 우리에게 맡겨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부모로서의 도리가 있습니다.(4절)


본문 4절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어떻게 가정에서 하나님의 어린 아이로 키울 것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에는 부모들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어린아이로 자라나는데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라는 명령이고, 하나는 하나님의 어린아이가 제대로 자라나는데 꼭 필요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과 양육하라는 명령입니다.


첫째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라고 말씀합니다. 좀 어울리지 않는 표현 같습니다. 부모들이 노엽다 하면 그런 대로 이해가 가는데 표현이 잘못된 것 같지만 그러나 의미를 잘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면 그 분노로 인하여 자녀가 정상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분노(忿怒)란 인간의 기본감정인 희로애락(喜怒哀樂) 중에 하나인 '노(怒)'에서 연유된 감정입니다. 이 분노는 아주 흔한 인간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결과를 내는 감정이 아닙니다.??에베소서 4장 26절에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분을 계속 내고 있으면 마귀가 틈을 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마음에 분노를 갖게 하는 일을 부모는 당연히 피해야 합니다.

분노가 왜 생깁니까? 오해가 분노를 일으키고, 약점이 드러나거나 열등감이 느껴질 때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약점을 들추거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녀들이 가진 장점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부모님들은 이 점을 노력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분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성격 탓이지요. 성격도 하나님 안에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기도하는 이여야 합니다.

화를 낸다고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불의를 보았을 때에 분노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극히 정상적인 분노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랑은 무조건 화내지 않는 것이란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를 보십시오. 성전에 기도하러 가셨는데 비둘기 팔고 동전 바꾸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상을 들러 엎었습니다. 이것은 정의로운 분노입니다.

좋지 않은 분노가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분노를 내는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분노를 당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심리적,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으로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미칩니다. 심리적으로 자녀들에게 피해를 끼칩니다. 불안, 두려움, 우울, 적개심이 마음에서 발생하여 그대로 아이에게 옮기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내면의 분노를 풀지 않고 그대로 두면 심한 편두통, 소화불량, 설사, 궤양, 고혈압 또는 심장마비까지 일으키는 신체적 징후가 나타납니다. 영적으로 종종 죄로 가득 찬 생각과 욕망은 함부로 내뱉는 말로 나타나 어린아이의 영혼을 짓밟아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라나는 어린아이에게 노여움 곧 분노는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그렇습니다. 한 박자 쉬면 화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잠언 16:32절에??"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녀들이 이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천하를 다스려도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한다면 소인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내는 것은 버릇입니다. 그러니 부모 된 성도들은 아이가 그런 버릇에 들지 않도록 하라는 게 오늘 말씀의 요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명령합니다.

본문에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입니다. '양육하라'는 말은 [교육하라, 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교육의 필요성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유아 때부터 대학까지 자녀들은 교육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혹시 다른 아이들에게 쳐질까 봐 부모들은 조바심합니다. 교육하기는 하는데 무엇으로 교육하느냐가 문제입니다.

1) 주의 교양으로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교양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입니다.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오늘날 교육이 없어 문제가 아닙니다. 그 교육의 내용이 지식위주,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입시와 취직하기 위한 교육이기에 문제 아닙니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으로 교육하는 것이 우리 자녀들에게 필요합니다. 부모들이 성경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학교 수업에 하루 빠지면 아주 큰 일이 난 것처럼 알아도, 교회학교 한 주일 빠지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성경말씀보다 더 좋은 교양을 가르칠 수 있는 교본은 없습니다..

2) 주의 훈계로 해야합니다.

'훈계'는 '타이름'입니다. 쉽게 말하면 '채찍'입니다. 쉬운 말로 주의 매질로 교육하라는 말씀입니다. (잠언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식이 미우면 매를 들지 않고 그 자식을 사랑하면 매를 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를 드는 경우 그 분노를 참지 못해서 화풀이로 매를 들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매는 사랑의 매이어야 합니다.

매를 들 때는 화나서 들면 안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들어야 합니다. 화는 화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맘으로 교양도 훈계도 해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를 주장하며 강압적으로 부모의 주장을 자녀에게 실현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반항감과 불건전한 심리만 싹트게 할 뿐입니다. 적절한 보상과 징계를 겸할 때 여러분의 자녀는 하나님의 아이들로 자랄 것입니다.

자녀를 두신 분이든, 그렇지 않은 분이든 오늘 말씀은 진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아이들은 당연히 부모님께 맡겨진 하나님의 아이입니다. 내 것이라 착각하여 노엽게 하지말고 하나님의 귀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교육에 충고와 격려를 적절히 사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재로 성장할 것입니다.

마틴 루터의 말씀을 들려줌으로 말씀의 결론을 낼까 합니다. "채찍을 아끼면 자녀를 버립니다. 그러나 채찍 옆에는 사과를 두었다가 자녀들이 잘했을 때에 그 사과를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은 모든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그리고 공경하라고 말입니다. 순종이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면 공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효도의 종교입니다. 성경은 효도의 교과서입니다. 이 어린이주일에 그간 소홀했던 부모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의 오해도 여러분의 효성(孝誠)으로 인하여 불식시키시기 바랍니다. 자녀의 도리를 다하여 부모님께 효도함으로 축복을 받고 사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선물로 맡겨주신 자녀들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인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도다"(시128:3) 나무를 가꾸듯이 가족 구성원을 가꾸어 나가므로 행복한 가정믕 만들고, 행복의 열매를 맺게되시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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