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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등감의 치유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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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열등감의 치유
설교 : 홍요셉 목사

[1]  불안과 열등감이란 무엇인가? 
 
  19세기 말 프로이드에 의해 구체적으로 설명되기 시작한 불안증은 현대 정신 병리 (Psycho-pathology)안에서 하나의 정신장애 이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모든 정신지체장애인에게 한결같이 나타나는 ‘정서 불안’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울증을 가진 많은 환자들이 흔히 호소하는 것이 불안이며,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불안증세들 중 하나인 “두려움” 이나 “공포”로 인해 많은 고통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연구들에 의하면, 동물이나 사람이 불안을 느낄 때 에너지와 피는 그들의 다리에 많이 집중되고, 분노하고 화를 낼 때에는 에너지와 피는 그들의 주먹과 입에 집중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안한 사람은 참을성이 없고, 부산하며, 바삐 걷게 되고, 그리고 화가 난 사람은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을 휘두른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더욱  클리닉에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원인이 없이 매사에 걱정하고 불안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당면한 문제들을 과장되게 해석하여 불안에 떨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가오지도 않은 일들을 미리 걱정하면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한 시간 후의 미래도 예측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우리는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불안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으로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을 유별나게 부추기고 있어 더욱 영적 인격적 장애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상처는 특히 누구로부터 받습니까? 
깊은 내적 상처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고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습니다. 그러니까 가족중의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로부터 받습니다. 그리고 존경하던 선생님이나 가까운 친구나,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받습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부터는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나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든지, 나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든지 그것은 별로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않게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의 말 한마디는 비수처럼 나의 마음에 꽃일 수 있습니다. 평생을 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의 상처 가운데 가장 많은 상처는 바로 열등감의 상처입니다.
맥츠웰 말츠박사는 "세상 사람들 중 적어도 95% 정도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열등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물론 열등감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열등감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열등감의 상처를 안고 있으면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가 없습니다.

열등감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그 열등감 때문에 쉽게 좌절하고 낙망합니다.

열명의 정탐군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은 열명의 정탐군들의 보고를 들은 다음 가나안 족속들과 자신들을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그들의 성읍은 견고했고 그들은 아낙자손처럼 신장이 장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 집단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지도자를 원망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열등감의 상처가 많으면 많을수록 쉽게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이 많습니다.

또 열듬감의 상처를 치유받지 못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이렇게 열듬감이 치유되지 못하고 남아 있으면 성격과 기질에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에게도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은 반드시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열등감의 상처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 열등감의 원인과 피해

1. 그러면 열등감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교하여 자신을 무능,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만성적인 자기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건과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나의 환경과 다른 사람의 환경을 늘 비교 평가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을 비하시켜 자신을 무능,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는 만성적인 자기개념을 열등감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비교의식은 하나님의 영성이 아닙니다.

심한 비교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볼 때는 열등감을 가지게 되어 자신이 침체되고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교만함을 갖게 되어 자신과 남에게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각각 그나름대로의 창조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창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듯이 모든 사람은 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우리 인간은 보이지 않는 열등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열등감이 높고 능력이 많은 사람은 열등감이 없을 줄로 알지만 실제로 능력이 많은 사람이 열등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과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중 누가 자살을 많이 할까요?
실제 통계로 보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도 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40년동안 애굽이라는 나라의 왕자로서 왕궁에서 생활하던 모세가 어느날 갑자기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40년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이제 너는 애굽으로 내려가 네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라!
그때 모세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그리고 여러 차례의 대화가 오고 가고 기적을 체험한 후에도 모세는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13절에 보면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출4:13절)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도 언어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의 열등감은 출신지역과 능력의 한계로 말미암는 열등감이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렘1:6) 왜 이렇게 예레미야가 반응한지 아세요?

그의 출신지역과 능력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나돗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 성벽 뒤에 있는 작고 가난한 동네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기드온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삭개오도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바울도 열등감의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열등감이란 무엇일까요?

그는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은 잘 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본문 7절을 보면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7절)

그러면 여기서 육체의 가시는 무엇을 말합니까?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질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가시를 안질이 아니라 간질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이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고통과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열등감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열등감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그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열등감에 매임을 당하여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지 않음이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2. 열등감으로 오는 나쁜 영향

첫째, 열등감은 우리 속에 있는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또 내게 있 는 무한한 가능성,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잠식시켜버립니다.

둘째, 열등감은 우리의 꿈을 파괴시킵니다. 희망을 꺾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담력을 상실 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상실하고,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나약한 존재, 패배자로 낙인시켜서 인생을 비참하 게 만들어갑니다.

셋째, 열등감은 대인관계를 해 칩니다.

자기 얼굴이 못생겼다고 생 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나 타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열등하게 인정하고 가치없는 자로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가 치없는 자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시기와 질투로 가득차 있 습니다.

넷째,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사역에 큰 방해가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훌륭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면류관을 받아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못한다'' 하고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하고 포기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 고, 하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재능을 다 사 장시켜서 초라하게 썩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속에 있는 자아상의 문제인 것입니다.
열등감은 일종의 병적인 심리현 상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면 만사에 자신이 없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무능하고, 무력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나는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교인 중에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교회 봉사도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오해하고 섭섭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가족과 교회 그리고 이웃에게 고통을 끼치게 됩니다.

[3]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1.  하나님을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열등감의 상처를 극복하려면 가장 먼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치료자요 살리는 자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확실히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분부하셨습니다.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을 세례를 받으리라”고 (행1:4-5) 분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살리는 영이요 치료의 영입니다. 우리를 돕는 영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성령충만한 자는 모든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방문 했던 바울은 무력감에 빠진 에베소교인들을 보고 “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즉 성령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습니다(행19:2).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만, 이 단계에서 더욱 나아가 성령충만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성령 재충만의 유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성령충만함의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 예수믿는 자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는 사모함과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안에 있는 열등감을 극복하고 복음의 사자로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행9:17-18).

기드온이 자기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용사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출신지역과 능력의 한계로 말미암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열등감을 극복하고 선지자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눅19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키가 작은 삭개오가 나옵니다. 그는 키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 콤플렉스를 이겨내기 위해 세리장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돈을 벌기로 한 것입니다. 매국노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는 돈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몰려와 키 작은 그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존심을 버리고 원숭이처럼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예수님은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바라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그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열등감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열등감이 치유되니까  더 이상 돈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19:8)
여러분! 상처가 치유되면 이렇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까?
열등감의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십시오.
성령세례를 받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도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영이시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감동 감화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말씀에 없는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 마세요.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붙들고 사모함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죠지 뮐러는 5만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통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2. 창조가치를 인정하라(비교의식을 버리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 니뇨"(출4:11절)
''누가 네 입을 창조했느냐 창조 하신 자를 기억하라'' 그럽니다. 이것은 창조 가치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셔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두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어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창1:1, 28).

따라서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창조적 가치를 각자에게 하나님은 부여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십니다.
현재 나의 현실, 나의 가문, 신 체적인 조건, 나의 기질, 나의 성장 배경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비교의식이 아니라, 창조의식과 창조가치를 인정해야 합니다.

모세는 주께서 자기를 부르신 후에도 하나님의 종으로 사명을 맡겨주신 후에도 “나는 이렇게 부족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모세는 천성적으로 입이 어눌하 고 혀가 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모세의 혀가 어눌하게 된 원인을 생각해보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양만 이끌고 다니면서 대화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에 말이 둔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완전하게 우월하게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약점이 있고 장애가 다 있습니 다. 이것을 열등감으로 자기를 비하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등감을 갖게 되는 되는 가장 큰 원인은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비교의식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외모나, 재 능, 환경, 학벌을 비교하면서 우울해 하고 원망하고 탄식하면 열등감이라는 병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들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 인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기도만 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세워주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수평적인 시선을 위로 올리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는가''라고 물지 말고 ''하나님은 왜 나를 여기서 이렇게 태어나게 하셨을까''라고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여기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들어 나를 이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선한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자화상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상을 내 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화가가 길거리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데 거지 아이가 와서 "선생님, 한 달라만 주세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화가는 "잠 깐만 기다려라"하고는 그 아이의 얼굴을 스케치 했습니다. 거기에는 거지의 얼굴이 아닌 멋진 신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게 누 구인지 알겠니?"  "잘 모르겠는데 요."  "장차 되어 질 너의 얼굴이야"
이 거지 아이가 신사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보고 너무 너무 좋아서 "아저씨, 그 그림 저에게 주세요." 하고 말하자 화가는 그림과 함께 1달러를 거지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거지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사는 지하실 방에 와서 그것을 벽에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거지들이 "그 사람이 누구야" 하고 물었습니다.
"나야" 하니까 거지들이 "야 임마 너는 거지인데 어떻게 이 신사가 너 야"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래도 그 거지 아이는 "아니야 내 얼굴이야"하고 말했습니다.

그림을 보면서 미래에 그림 속의 신사처럼 되어 질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순간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신사의 모습을 가지려면 내가 여기에서 떠나야 한다. 거지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 이 결심을 하고는 이 거지 아이가 서점에 가서 주인에게 "아저씨, 제가 서점에서 심부름을 할테니까 밥만 먹여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렇게 하라 고 허락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심부름도 하고 청소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기 시작 했습니다.

이 아이가 일도 착실하게 잘 하고 틈틈이 책도 열심히 읽는 것을 보고 서점 주인이 야간대학에 보내주었습니다. 이 아이가 나중에는 대형 서점 주인까지 되었습니다. 화가가 그려준 신사의 얼굴 그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거지는 화가가 그려준 얼굴을 보고 자기의 인격과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미래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천국에 있는 스데반의 얼굴이요, 영화로운 얼굴입니다. 이 모습을 본다고 할 때 현재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우리를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열등감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위대한 향상의 욕구가 분출되며 무한한 가능성을 창출하게 됩니다.

3. 약점을 붙들고 기도하라.

본문 8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여기서 이것은 바로 육체의 가시를 말합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가시는 특징이 뭡니까? 찌르는 것입니다. 아픔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육체의 가시가 떠나도록 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세 번은 정말 꼭 세 번만 기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뭐였습니까?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9절상)

우리 주님은 많은 경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보다는 그 문제를 그대로 놓아 둔채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도를 통해서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기도를 해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육체의 가시를 주셨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1) 첫째는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7절상)

바울 같은 사람은 이런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교만해질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혈족이요, 헬라 철학의 대가요, 로마시민권자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그리고 그 당시 최고 학파인 가마리엘 학파의 수제자입니다
세상의 가문과 학문도 그렇지만 영적으로도 보면 그만큼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삼층천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교만해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한 사람입니다.
.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셔서 늘 겸손하게 만들었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늘 그 위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2) 둘째는, 자신의 약함이 곧 강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성도가 가장 강한 때는 돈이 있을 때가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을 발견할 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약함을 발견하였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제일 강한 자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목동인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골리앗도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4.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하나님 능력을 의지하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9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절하)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누구에게 머무릅니까? 겸손한 자에게 머무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꼭 자랑하고 싶으면, 오히려 나의 약함을 자랑하고 모자라는 것들을 자랑하십시오. 이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흘러 들어 옵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나 열등감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 열등감을 인하여 주님 앞에서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해질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분명히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10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절)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좌절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고 크게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십시오.

하나님의 지도자로 부름받은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 12절). ''네 입이 둔하냐 내가 함께 하겠다'' 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약점이 있습니까 주께서 한마디를 더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 말은 그 약점을 내가 함께 함으로 보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잘난 것 가지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약점을 가지고 하 나님께서 거기에 덧붙여 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잘난 것에는 하나님께서 손댈 것이 없습니다. 약점에 하나님께서 손을 대십니다. 신체에도 병든 곳에 하나 님께서 손을 대시지 건강한 곳에는 손댈 필요가 없습니다. 병든 곳에 손을 대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고 했습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 의 은혜가 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열등감이 오려고 할 때마다 ''이 열등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구나'' 하고 은혜로 채워야 합니다.

내가 나약해서 무엇을 못한다고 할 때 주의 음성을 들읍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 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 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열등감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악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공부를 못 해도 괜찮습니다. 다른 것으로라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부부간에도 격려하십시오.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좀처점 생각하지 않고 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만을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비극이며, 역사상의 모든 질병, 전쟁보다 더 큰 불행을 안겨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 있는 것으로 열등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을 하여야 합니다.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면 못합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열등감에 빠진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라 너는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하라고 하십니까?

네가 말로 못하면 지팡이로 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말로 못한다고? 네 손에 지팡이가 있지 않느냐 내가 네 입의 둔한 것을 지팡이의 권능으로 역사하리라 네가 정녕 네 입이 둔하다고 그렇게 부정하니 네 손에 있는 지팡이로 일 을 하리라''

아마 모세가 하나님에게 "주여, 내 입술에 능력을 주시옵소서."했다면 모세 입에 능력이 있어서 모세가 말만 하면 이스라엘이 백성이 그대로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입으로 부정하다가 결국은 입으로 망합니다. 어디에서 망하느냐? 므리바에서 망합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 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민 20:10)

''네 말로 명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라''고 할 때 그는 말을 안했습니다. 끝내 입이 둔한 자라고 부정하던 모세는 말을 못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쳤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못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 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 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 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12)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을 끝내 부정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진노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른 능력을 주셨습니다. 지팡이의 능력을 주셔서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반석을 깨뜨려 생수가 흘러나 왔습니다. 지팡이 하나로 60만 장정이 말없이 따라오게 만들었습니다. 말로는 얼마가지 못하나 지팡이를 높이 들면 수많은 군중들이 그 지팡이를 보고 따라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체적인 열등감이 있었고 말이 둔한 자였습니다. 그가 말로 했으면 2천년 전 소아시아의 설교자로 끝나버렸을 것인데 글로 써서 교회에 보낸 것이 13편의 서신이 되었습니다. 말은 사라져 버렸으나 글은 2천년, 앞으로도 종말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변화를 일 으키며,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며 교 회를 세워가는 사도 바울의 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으로 못하면 저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짧으냐 왼손으로 하라 눈이 멀었느냐 입으로 하라''

없는 것을 생각하며 열등감을 가지지 말고 나에게 잇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내게 없는 것을 탓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가져갈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출4:16절)
하나님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은 나의 약점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 니다.
내 잘 생긴 것으로는 아무리 나타내도 그것으로 누가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말 잘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병을 고쳐놓 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같 이 봅니다. 내가 무능하고, 약점이 있고 허물 많은 사람인데 의로워지 고, 변화되고, 새로운 일을 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같이 보게 됩니다.

[4] 결 론

미국 프로 하키의 스타인 Wayne Gretzky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
“작년 스탠리 컵 결승전 때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팀은 1회전에서 지고 휴식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코치는 우리에게 1회전의 비디오를 보여주었는데 서툴렀던 경기 장면은 빼고 우리가 잘한 경기 화면만 보여주었습니다.”

이 코치는 슬기로운 방법을 썼다. 현재 지고 있는 선수들에게 부정적인 과거보다 긍정적인 과거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돋구었던 것입니다.

새 출발을 위해서는 지난날의 실패나 어두운 과거에 붙들려 있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단점과 부족이 많은 사람이라도 장점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런 밝은 곳을 기억하며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내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성공의 요인이 됩니다.

우리는 귀한시간 내게 있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몇 가지 가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자기 신분을 확인해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 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나를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우리가 창조 목적과 가치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를 나타내겠금 는 보혜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대하여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됨의 가치를 인정하며 최후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하는 존재를 인정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뢰감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감사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 가십시오.

우리 인생에는 리허설은 없습니다. 연습은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실재상황이기 때문에 쓸데없이 열등감이나 교만함을 가지고 시행착오를 범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시행착오는 시간과 물질과 건강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가져다 줍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시고 그 분의 말씀하신 성경 원리대로만 순종하고 순리대로 살아 가면 당신은 반드시 성공시대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축복을 몰고 다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가라 네 지팡이를 잡고 가라'' 분명히 나에게 있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가지고 나의 약점, 내가 불행이라고 탄식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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