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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로야 나오라 (요 11: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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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8  주일 오전예배 설교         

  성경 : 요11:39-44
  제목 : 나사로야 나오라

본 장은 주님이 특별히 사랑을 많이 해주신 나사로가 죽어 나흘이나 되었지만 다시 살려 놓으사 영광을 드러내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부활 영생의 주님을 확증하는 한 예증으로서의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혹 자는 나사로를 살리실 때, 나사로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나오라!~ 이렇게만 하셨다면 그 때 무덤에 있던 모든 시체들이 다 일어났을 것이라 합니다. 어쨌든 성경에 이름을 거론 한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그 중요성과 긴밀성 내지는 하나님의 관심의 정도를 의미해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나사로와 그 가족에 대한 주님의 애정을 표현할 때, 3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라고 하며 원문에는 사랑한다는 말은 필레오(filevw)로 인간적인 애정을 말하였습니다(3, 36).
그러나 요한이 주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을 기록할 때 쓴 헬라어는 5절에,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할때, 아가페(ajgapavw)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5).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고 죽었던 나사로를 부르실 때, 나오라고 하신 말씀에서 주시는 영감적 메시지는 몇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
1. 사망의 세력에서 나오란 말씀입니다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죽어서 썩어 냄새가 시체는 영생의 생명을 잃고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죽은 존재의 삶이요, 그 내용은 냄새나는 죄악을 뿜어내는 일들로 가득한 인간 삶의 실존을 말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부르실 때, 이미 나사로는 귀가 먹은 것이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이기에 못 듣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큰 소리를 지르시면 부르셨습니다. 큰 소리는 마술같지 않고 실제로 보라고 주변에 둘러싸인 사람들에게 들리라고 하신 소리였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전하시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며 전파의 소리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듣긴 들어도 주님이 친히 나사로의 영혼을 부르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처럼 우리 영혼도 복음을 듣기는 하나 실제로 거듭나고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행사하시는 능력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그래서 선물이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입니다. 많은 시체들 중에 나사로야! 하고 지명하여 부르신 것과, 그를 평소 사랑하셨다는 성경의 말처럼 우리가 그렇게 특별 아가페 사랑을 받아 부름을 입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사망의 세상, 지옥으로 가고 있는 살아 있는 시체같은 인생들에게 오늘도 주님은 복음을 통하여 부르시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2. 불신의 마음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42절,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께서 능력을 행하시고, 여기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이러한 이적들은 결국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보냄을 받은 속죄주가 되심을 믿도록 하기 위함에 그 근본 목적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르다나 마리아나 모두가 완전한 믿음이 없는 말만했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계셨다면 안 죽었을 것인데 죽었다는 것과, 죽어서 나흘이나 되고 썩어 냄새가 나기 때문에 못 살릴 것 같이 말하는 것, 그리고 믿으면 살 줄 믿느냐고 질문했을 때, 훗날 영생은 믿는다는 것 등의 고백은 모두 불신적인 요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못 믿고 있는 자들을 향해 통분히 여기셨습니다. 사람이 진실을 안 믿어 주면 숨이 막힙니다. 그런 심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일차적으로 구원은 받았으나 그처럼 신앙이 지금, 여기에서 삶에 직접으로 기적의 삶을 사는 것에는 믿음이 없는 것이 보통 신자들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이 현재에 시공간을 초월해서 믿음을 가질 것을 권하셨습니다.
요 11:23-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께서는 지금 당장 주의 권능을 믿느냐고 묻는 말씀이었습니다. 믿는다 하면서 우리들도 주의 완전하신 능력을 현실 속에 적용하고 의지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나사로의 재생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 그들처럼 얼마든지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실 수 있는 역사가 지금도 나타날 줄 믿어 의심치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사실을 목격한 자 중에 많은 유대인들이 믿긴 했으나 여전히 예수를 잡고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었습니다(53,57). 불신의 세상을 말합니다.
기독교가 얼마나 많은 문화적 혁명과 엄청난 세상 발전을 보였지만 여전히 예수교를 욕하고 비난만 하는 세상입니다. 그것도 지식층과 똑똑하던 바리새인과 심지어 대제사장들처럼 교회 안에서도 진리를 거슬려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단과 이단 색채를 가지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3. 부동에서 활동하는 자로 나오란 말씀입니다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시는 메시지는, 성도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창조의 기능을 수행하는 활동하는 삶을 살아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기능을 잃었습니다. 스스로는 생명의 활동을 못합니다. 먼저 살아 난 영혼들이 죽어 꼼짝 못하는 세상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현실 참여 종교입니다. 역사에 임하는 종교입니다. 불교처럼 도피가 아닙니다. 철학처럼 관념이 아니라 현실에 적극적으로 생명의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사람이 달라집니다. 생활 태도와 활력이 달라집니다. 꿈이 생기고 생기가 돕니다. 정적(靜的)이지 않고 동적(動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뭔가 움직이게 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안 되는 것이 되게 하고 자라게 하고 풍요하게 하고 만들고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 부활을 약속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하신 말씀에 죽어도 살겠고라는 것은, 죽을지라도 계속 살 것이란 말입니다. 즉 영생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나사로가 다시 살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이 죽음의 삶에서 살아나야 합니다. 동시에 타인을 살아나게 하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풀어서 다니게 하라는 주의 명령은 그런 뜻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사로가 다시 살게 된 주의 기적 앞에서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도 표현하신 대로 오늘, 이 시대에 죽음같은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주께서는 나사로를 살리심같이 영혼을 살리시기를 원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신 것처럼 생명의 복음의 나팔소리가 우렁차게 성도들에게서 나와야 하고 교회의 선교 운동이 힘있게 계속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나사로를 풀어서 움직이게 하신 주의 은총이 우리들에게도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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