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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행복한 가정을 위하여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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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불이 나자 뛰쳐나와 겁에 질려 있다가 갑자기 불 속으로 용감히 뛰어 들어가서는 불에 타고 있는 자기의 귀중품이 들어 있는 보석상자를 안고 나왔습니다. 만족한 듯 웃음을 지으면서 소리쳤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이제 살았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사람들이 소리치는 것이 들렸습니다. 웬 아이들의 그림자가 불이 난 집의 창에서 어른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이 여인은 "내 아이들! 우리 아이들은 어디 있지?"하면서 아이들을 찾습니다. 아이들이 불 속에 있음을 알고는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이미 불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린 후였습니다. 그녀는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소중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고, 책은 살 수 있으나 두뇌는 살 수 없고, 유흥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고, 십자가는 살 수 있으나 구세주는 살 수 없고, 예배당은 지을 수 있으나 하늘나라는 지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살아가십니까? 물론 우리들의 우선 순위 1번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가운데 우리가 지켜야 할 우선 순위 2번은 바로 우리들의 가정일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라 한들 가정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에 따라서 행동이 결정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들은 정말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 가정의 소중함을 잊고 있지는 있습니까?

어느 가슴 찡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나는 배가 부를 때 행복하다. 그리고 화장실에 갈 때 행복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천박하고 지적이지 못한 데서 행복을 찾느냐고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로는 코웃음 칠 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1년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내 친구 용호가 내게 행복의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
작년 11월 어느 날, 수능고사를 며칠 앞두고 나는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수위아저씨가 뛰어 들어오시더니 학교 앞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상민이와 용호가 크게 다쳐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했다. 내가 도착했을 즈음 상민이는 이미 응급처치를 받고 회복실에서 자고 있었다. 그러나 용호는 중상을 입어, 얼굴은 거의 다 붕대로 감겨져 있었고 어렵게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절하게 기도라는 것을 해보았다.
"하나님, 제발 용호를 꼭 살려 주세요."
꼼짝 않고 응급실 밖에 앉아 나는 '내가 대학시험에서 떨어져도 좋으니 꼭 용호를 살려 주세요' 라고 빌었다. 당시 그것은 내가 친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희생이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서너 시간, 아니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 의사가 나왔다. 그 얼굴에서 나는 용호의 죽음을 읽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바로 그때 회복실에 있던 상민이가 깨어나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엄마! 나 변소 가고 싶어! 변소 가고 싶다구!"
나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상민아, 축하해. 넌 정말 행복하구나. 살아서 변소 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잖아.'
이 경험을 통해 나는 행복의 교훈을 배웠다. 누가 그저 교과서적이고 상투적인 말이라고 해도 나는 믿는다. 역시 살아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오늘도 나는 학생식당에서 컵라면 하나 먹고 나오며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슬프거나 버림받은 느낌이 들 때면 1999년의 11월 그 날을 생각한다. 누구든 살아서 '나 변소 가고 싶어!'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 가족이 아니겠습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짜증내 줄 사람이 있는 것으로도 행복한 것이요 잔소리해 주는 사람이 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당시로는 같이 짜증스럽고 왜 저럴까 싶기도 하고 몹시 신경질이 나기도 하고 하지만 떠나 보내고 난 다음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하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이런 가정의 행복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습니까?

불후의 명작 '신곡'을 쓴 단테의 일화입니다. 단테가 슬픔과 실망을 안고 파리를 갔을 때였습니다. 폭풍우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밤이었습니다. 산타크로체에 있는 어느 수도원의 문을 두드릴 때 마침 안에서는 수도사들이 저녁 기도를 드리던 중이었습니다. 힐라리오라는 수도사가 나와 단테를 쳐다보며 물었습니다.
"무엇을 구하러 왔소?"
그때 단테는 문득 속에 담고 바라던 말,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사실 단테의 생애는 고독, 불안과 낙담의 연속이었습니다. 소년시절의 연인이던 베아트리체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다음으로는 정치적인 이유로 정들었던 플로렌스에서 추방되어 쫓겨난 비극적 시절, 방랑세월의 연속 등…. 그러나 단테는 이 어려운 고통과 방황의 세월 속에서 신곡을 집필했습니다. 신곡은 불행의 터널을 통해서 가파른 길로 평화를 찾아가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늘 주변의 일들로 절망 속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고독과 불안 중에서도 평화를 찾아서 행복을 노래로 엮어 낸 단테를 생각하십시오. 우리 마음 속에, 가정 속에, 사회 속에 평화의 바람이 일게 하십시오.
우리가 먼저 기억할 것은 가정의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어떤 주어진 조건에 의해서 가정의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행복은 가족 모두가 함께 만드는 것이요 함께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정의 행복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아니 우리가 어떻게 가정의 행복을 이루어갈 수 있고 지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웃기를 싫어하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결혼을 한 뒤 18년 동안 한 번도 아내를 향해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를 하고 그냥 사무실로 출근했고 특별히 대화를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인생문제 전문가인 D. 카네기의 "웃음에 관한 설문지"를 받게 되었고 웃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직접 실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식탁에서 아내에게 다가가 "잘 잤소?"하고 웃으며 물었습니다. 아내는 모처럼의 행동에 놀라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오늘부터 두 달 동안은 오늘처럼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하기로 했소" 라고 말하며 그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나갔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한 달 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 남자는 잘 웃는 남자로 변하게 되었고 가정은 화목해졌으며 무엇보다 기쁨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웃는 얼굴은 성형수술로도 불가능하지만 연습으로는 가능합니다. 미소짓는 생활 태도는 여러분의 삶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그것이 능력입니다.
사실 얼굴 표정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을 잃지 않고 웃는 얼굴로 살아가십시오.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웃을 수가 있습니까?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다른 것 다 없다 해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갈 곳이 있습니다. 바로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행복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입니다. 독불장군은 고독합니다. 서로가 제 자리를 지킬 때 모두가 행복을 느낍니다. 행복은 단수(單數)가 아니라 복수(復數)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어디서부터 옵니까? 함께 화목을 이루어나갈 때입니다. 하지만 화목은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한 젊은 여인이 자기의 집에서 심한 불행감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잦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가정생활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녀는 부모와 다른 가족들에 대해 원망하면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기만 하면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평소 그녀의 시무룩하던 표정이 사라졌습니다. 눈빛은 빛났고 발걸음은 가벼워졌습니다. 한 친구가 그녀의 달라진 모습을 알아보고는 말했습니다.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정말 축하해!"
"아니야"
그 젊은 여인이 대답하였습니다.
"달라진 것은 바로 나야!"
그 젊은 여인의 모습이 밝아지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환경이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짜증스러운 환경에 처하여 낙심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정말 문제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게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우리 가슴을 주님의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할 때에 놀랍게도 우리 인생이 더 밝게 보여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우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갈 힘이 내 안에 용솟음치게 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할 수 있게 되고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화목이 있고 행복이 있으며 사랑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녀들에게 부모 공경을 가르치고 있으며 부모들에게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는 치사랑과 내리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온전한 사랑의 실천이 우리의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자기의 행복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말인데 언뜻 들으면 주어진 현실에 무조건 만족하라는 그런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은 무슨 물건을 사듯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깨달음 속에 얻어진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 생활이 모두 즐거움으로 채워지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순간마다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그 순간 속에서 작은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일 겁니다.
우리가 불행을 느끼는 것은 자꾸만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자꾸만 남과 비교할 때, 불행이라는 좋지 않은 손님이 어느새 우리 곁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늘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 행복함을 느끼자면 우리는 먼저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너무나 부족해 행복하지 않다구요? 그러나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한들 과연 행복함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으로 자신을 채우려 하기보다는 지금 내게 있는 것을 좀더 사랑하는 것이, 행복을 향한 가장 빠른 길이 아니겠습니까? (설교/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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