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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사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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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교회력에 따르면 지난주일은 어린이주일이고, 오늘은 부모님 주일입니다.

오늘 교회당을 찾은 부모님들을 대표해서 65세 이상 되신 분들에게는 고등부에서 카네이션을 달아드렸습니다. 혹시 카네이션을 달아야 될 분 중에 못단 분들은 ‘내가 젊게 보이나보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위로를 받으시고, 또 혹시 난 아직 65세도 안되었는데 달아주더라 하신 분은 ‘우리 주님이 사셨던 것처럼 세상 살면서 세상 이력이 내 얼굴에 나타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고 편안하게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할렐루야 성가대를 능가하는 90명의 경로대학 성가대가 출연하게 되겠습니다. 기대를 하시고 저녁에 나오셔도 되겠습니다.

오늘 사랑실천 50일 시리즈  두 번째 설교 역시 부모님을 향한 사랑 실천을 중심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목대로 사랑이란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친절이란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감정이 수반되지만 감정 자체가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닙니다. 행동입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표현된 사랑을 우리는 친절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고 있었습니다. 강도가 자주 출몰하기로 악명 높은 길입니다. 세 사람 모두 강도 만난 현장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 각기 다른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새생명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반응 하면 귀가 뜨이죠? 각기 다른 반응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첫 번째 태도는 거리를 두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0-31)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다른 쪽 길로 피하여 가는 것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피상적으로만 갖습니다. 깊이 있게 사귀는 것을 피합니다. 누구와도 거리를 둡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심방을 가겠다고 해도 별로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특히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들을 멀리합니다. 가까이 하다보면 말려들 것이고 말려들다보면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계산 때문입니다.

이 제사장은 그 길을 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옷도 벗겨지고 맞아 거반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려고도 않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어쩌면 자기 일이 중요하고 바쁜 것을 핑계 삼아 다른 편으로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뿐만 아니라 오늘 울산에도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두 번째 태도는 관심은 보이되 관여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10:32) 이 사람은 성전 일을 돕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길을 건너와서 살펴보고 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더욱 비난받을 만 합니다.

우리도 그런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현장을 지나치면서 사고현장에 눈길을 던집니다. 그러나 멈추어 서기를 원치 않습니다. 길이 막히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다가 현장을 보면 누가 다쳤는가 아니면 죽었는가 하면서 지나치기도 합니다. 궁금하지만 개입하려고 하진 않습니다.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 말들은 하지만 선뜻 도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말하긴 좋아해도 도우려고 나서지는 않습니다. 알고는 싶지만 관여하진 않습니다.

세 번째 태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반응입니다. 자신이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이번 50일 동안 사랑하는 일에 자라가기를 원하면 진정한 관계를 맺는 일을 배워야 합니다. 친절을 베푸는 일을 배워가야 합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행한 네 가지 일을 우리도 실천해야 합니다. 보다 더 사랑하고 친절한 삶을 살기 위해서 꼭 배워야 할 일들입니다.

첫번째 사마리아 사람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보았습니다. 

친절이란 언제나 눈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바라보고 둘러보는데서 친절이 시작합니다. 보면서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서 민감할 때 친절이란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그를 보고”, 여기가 친절한 행동이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보다 친절한 삶을 살기 원하면 여러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시야가 넓어져야 합니다. 주위의 딱한 처지를 볼 수 있어야 하며 볼 때에 거기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따라가야 합니다. 사랑실천  두 번째 주간에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 주간에는 여러분이 살고 있는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저는 내일부터 한 주간동안 구호단체 월드비전과 함께 인도를 살펴보기 위해서 떠납니다. 가난한 나라에 상처받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저와 함께 모두 그 가난한 나라를 살펴보기 위해 갈수는 없겠지만 실망하진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여러분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로 여러분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도 돌봄을 필요로 하는 처지일 수 있습니다.

꼭 멀리 바깥 해외만 아니라 가까이 집안에 계신 어른들의 처지부터 살펴보십시오. 나이가 들면 젊은 날 기상은 사라집니다. 그처럼 깔끔하던 사람도 50이 넘으니까 음식을 먹을 때 흘리면서 가끔 넥타이를 세탁소에 보내야 되는 상황도 생깁니다.

지난번 축제 때 누군가 강사님이 그러셨죠? 50대가 되면 미모평준화가 이루어지고 60대가 되면 지식평준화가 이루어지고, 70대가 되면 이제는 경제 평준화가 되어서 그때쯤 되면 한때는 가정 제반사를 주도하던 위용은 사라져 버리고 도움을 받아서 지내게 되는 처지입니다. 한 때는 베풀고 살았습니다만 이제는 손자가 쥐어주는 용돈도, 아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도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절을 베풀면서 살지 못합니까? 부모님을 향해서는 내가 베푼다기 보다는 오히려 보답하는 것인데도 잘 되질 않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기에 빠듯하다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것은 친절을 망치는 주범입니다. 그리고 살기 힘들다는 것도 같은 통속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부모들은 정말 새벽부터 일어나서 보리방아 찧어서 밥하고 살면서도, 바쁘게 바쁘게 살면서도 여러분들을 돌보지 않았습니까? 빠듯했지요? 하우젠은 그만두고 평범한 냉장고 하나도 못 들여 놓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여러분을 보살펴 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여기 오늘 앉아 있습니다. 부모님이 베푼 행동으로 나타난 사랑인 친절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쁘기는 하지만 조금 속도를 떨어뜨려 볼 필요도 있습니다. 너무 빨리 달리면 주위 경치를 다 살필 수가 없습니다. 속도를 떨어뜨리기 전에는 주변 처지가 눈에 다 들어오지 않습니다. 바쁘면 친절한 말 한 마디 건네기도 쉽지 않고, 한 잔 차를 대접하기도 힘듭니다.

보다 더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까? 보다 더 친절을 베풀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주위 사람들이 보일만큼 속도를 낮추셔야 합니다. 우리는 속고 사는 것 같아요. 빨리빨리, 뭐든지 많이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줘가면서 까지 그렇게 급하게 살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도 생각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최선의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고전10:24  현대어성경)

친절을 향한 첫 걸음은 주위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살필 수 있는 영적인 레이더를 주시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는 오늘 설교가 필요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말 잘하시고 감동적인 삶을 사는 분도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분들의 처지에 민감한 분들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우리들은 모두 좀 더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꼭 해야 할 일 아니면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일 중심적이라서 사람보다 일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날 때부터 세심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친절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저처럼 한 가지 일을 생각하면 나머지 일은 생각이 안 들어서 누가 옆에 지나가는지 안 지나가는지 눈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제가 오늘도 2부 예배 마치고 급히 들어오니까 우리 84살 잡수신 어머니가 우리한테도 한번 쳐다보고 가라 그러시더군요. 그래서 오늘도 실패를 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생각에 골똘하면 지나가는 사람도 의식하지 못하는 타입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눈이라도 한 번 맞추고 싶은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제가 어머니를 통해서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잘 해보려고 노력은 해보는데 당장 어머니한테 조차도 제가 못하고 오늘 한방 먹었으니까 그렇죠? 여러분도 조금 양해를 해 주시고 저도 잘 하려고 더 노력을 하겠습니다. 60점도 안나오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친절 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중에서 아주 친절한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균보다 조금 잘하는 사람도 있고 평균보다 모자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심각하게 개선해야 될 사람도 계실 것입니다.

아이들은 여러분에게 몇 점이나 줄까요? 우리 엄마, 우리한테 친절한 것 몇 점일까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아이들한테 올백 받아오기를 원하는데 여러분은 올백 됩니까? 특히 오늘 어버이 주일은 맞이해서 어른들을 향한 친절정도를 측정해 보십시오.

부모님을 아직도 모시고 있는 특권을 가진 4,5십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모님께 얼마나 친절한 자식노릇을 하고 있습니까? 60점이 못 나오는 분들은 저와 함께 노력합시다. 저도 가끔 어머니께서 오시는데 어제는 어버이 주일이라고 제가 연락을 해서 오시기는 했지마는 어제처럼 오셔봤자 저는 도시락 배달시켜서 먹지 어머니하고 한상에 앉아서 먹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큰 게 아닙니다. 차를 타고 둘러보면서 아들하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아는데도 바쁨이 핑계가 되서 못하는 거지요. 성노회와 사랑 선교회 어른 여러분, 앞으로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더 잘 하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친절은 눈을 통해서 개선됩니다. 직접 가서 보지 않아도 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우리가 들을 때에도 개선될 수 있습니다.

요즘 아주 메스컴을 타고 있는 책 한권이 있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입니다. 탈렌트 김혜자씨가 지난 10년동안 월드비전 홍보 대사로서 온 세상 어려운 곳을 다니면서 체험 했던 것들을 여기 진솔하게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제가 이런 좋은 책이 나와 있다고 해도 서점까지 가려고 수고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우리교회 교인들 중에서 이 근처에 서점 하나 하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을 해요. 그러나 서점 생기기 전까지는 내가 책을 사무실에 사다 놓았으니까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온 세상을 다니지 않아도 김혜자씨의 눈을 통해 세상에 얼마나 친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배 끝나고 가서 한권씩 사서 읽어보세요.

두번째로 사마리아인은 주위에 있는 사람의 고통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들의 처지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볼 때에 불쌍히 여겼습니다. 눈으로만 그 사람의 처지를 본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그 사람의 처지를 파악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같이 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나누고 그들의 감정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바를 느껴야 합니다.

본 바를 가슴으로 느끼고 감정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귀를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들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듣는 것을 배우는 것이 바로 진정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비결입니다. 듣기를 잘 하면 더 잘 이해하고 감정을 함께 하기가 쉽습니다. 때로는 친절이란 들어주는 것입니다.

성급한 충고는 배신과 같습니다. 문제를 말하자마자 충고를 하면 제대로 이해를 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재빠른 충고는 친절보다 오히려 거부당한다는 느낌을 받기가 쉽습니다. 값싼 충고보다 제발 진지하게 들어만 주십시오. 우선 듣기만 해주어도 말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습니다.

눈을 바라보고 손을 잡아주며 아무 말 하지 않고 듣기만 해도 위로 받을 사람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분이 해 줄만한 값싼 충고보다 공감하는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을 더 절실히 바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친절이란 때로는 그냥 들어주는 것입니다.

잘 들어주면 이해받고 있고 자기의 감정이 타당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슬퍼하는 것은 정당하며 분노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며 고통을 느끼는 것도 정상적이라는 말 외에 언어를 가지고 다가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십시오.”(갈6:2, 표준새번역) 그리스도의 가장 큰 법은“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을 헤아려 주는 일을 한 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끔 문제를 만나게 하시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입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까?”라고 말하지 말고 그런 일을 당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세상 살면서 고통당한 그 고통가지고 나이 길이만큼 인생의 깊이를 가지려고 하면 그렇게 쉽게 쉽게만 살아서는 별반 다른 사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는 남다른 고통을 겪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받은 풍성한 위로 때문에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동일한 처지에 빠진 사람들을 더 잘 위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갖 환난을 당할 때에 풍성한 위로로 위해주셔서 그 위로로서 동일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 면에서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입니까? 남의 고통을 보고 그것을 수군거리는 사람입니까? 특히 부모님들의 고통에 대해서 여러분은 이해하는 자식입니까? 어른들의 입장에서 어른들을 대우하는 성숙한 자녀가 되십시오. 

셋째로 사마리아인은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친절을 베푸는 기회를 붙잡으십시오. 기다리지 마십시오. 꾸물거리지 마십시오.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사마리아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세 번째 교훈입니다.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10:34) 지난주일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살폈습니다. 감정이 아니고, 느낌이 아니고, 사랑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저 친구 불쌍하네” “딱하네, 이 양반” “너무 안됐어”그러고 지나가면 아무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려면 가까이 가서 그 다음 누워있는 사람에게 가서 구부렸을 것입니다. 눈과 눈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같이 했을 것입니다. 도와주는 사람으로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같은 차원에서, 같은 처지에서 보살펴 주는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친절이란 가진 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소독약 대신에 그가 가진 포도주를 사용하고 연고대신에 그가 가진 기름을 상처에 부었습니다. 자기 짐승에 실려 있던 것을 사용해서 일차적으로 도왔습니다. 

이 사람은 거기에다가 더 나아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라고 합니다. 붕대를 가지고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옷은 빼앗기고 벌거벗은 사람입니다. 상처를 싸맬 헝겊은 어쩌면 자신의 옷 말고는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셔츠를 찢어서 상처를 싸맸을 것입니다.

그 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119를 부르지 아니했습니다. 나는 응급 처치법 배운 적이 없다고 물러서지 아니했습니다. 전문가 불러야 된다고 시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그가 한 것입니다.

잠언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3:27-28)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거절하지 마시고 내일로 연기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상처받은 사람들로 가득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옆줄에 앉아있는 분도 그 가운데 한 분일 수도 있습니다. 도움과 회복이 필요한 분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가장 가까운 부모님일 수도 있습니다. 집안의 어르신들도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10대였을 때는 부모님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불평을 터뜨리고, 한번도 사랑받고 자라지 못했다고 하지마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아버진들 그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신체적인 상처, 정서적인 상처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한번도 받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아주 가까운, 내가 낳은 자식으로부터도 상처를 입을 수 있지 않습니까? 저도 젊은 날은 어머니께 상처를 입힌 적이 있는 것 같아요. 대학 다니면서 모처럼 집에 한번 모여가면 친구들이 와 모여듭니다. 고구마부터 시작해서 먹을 것 있으면 다 가져나와서 같이 먹어야 되는데 우리 집에 맛있는 게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건 안가지고 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친구들 간 뒤에 내가 이야기를 했어요. “어머니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하고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랬어요. 어떻게 홍시를 우리한테 안줬습니까? 이런 이야기 입니다. 그러고 지나갔지요. 몰랐습니다.

2,30년 지난 뒤에 어머니가 하루는 그런 말을 하시더군요. “어떻게 네가 나보고 네가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말했지? 그렇지만 그때 그것은 간식거리가 아니야. 어린 자식들 키워야 되는 음식이었다.”고 어머니가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어머니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신앙인에게 당신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런 큰 상처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에도 우리는 쉽게 부모님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어제 점심때 식사를 하는데 식초에 절인 오이를 어머니가 드시는데 연세가 드신 분이 되다보니까 갑자기 식초 때문에 재채기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생기발랄한 우리 누님께서 웃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웃지 마라” 그랬더니 어머니가 편드는 사람 있다 싶으니까 하시는 말씀이 “너도 늙어봐라”이러시더라고요. 사소한 일에서부터 나이가 많아지면 소외되고 섭섭해지고 이런 일들이 왜 없습니까?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어른들은 우리의 친절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축복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우리의 축복이 필요한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가슴에 꽃 다신 분들 한번 일어서고 우리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러드립시다. 2부예배도 그랬고 3부예배도 그랬는데 오늘 꽃 달고 일어서신분들 보면 대체로 다 2층 예배실에 계십니다. 2부에는 한분이 3층에 있었고, 3부에는 남자 2분이 지금 3층에 계시는데 왜 그럴까요? 계단 올라가는 것조차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내년쯤 되면 종탑에 엘리베이터 하나 붙였으면 좋겠습니다. 경로 우대증 가진 분들은 탈 수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마련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더 나은 상황이 될 때에 친절을, 은혜를 갚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봅시다.

사마리아 인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친절은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기꺼이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친절을 베푸는 것은 일정에 계획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일정과는 상관없이 상황은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모든 것을 그만두고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랑이란 본래 약간의 성가심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친절이란 시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서 우리는 하던 일을 중단하기도 해야 합니다. 누군가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면 그 일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을 중단해야 됩니다. 내 일정에는 그런 전화가 걸려올 것을 넣어놓지 못했지만 전화가 걸려 와서 도움을 요청하면 도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친절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도 친절을 베풀지 않고 빠져나갈 수십가지의 핑계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시간도 없고 능력도 없고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전문지식도 없고 나는 지금 여리고에 가면 큰 상담이 있는데 그것을 놓치게 되면 일년 장사 헛되는데...’ 이런 여러 가지 핑계를 가지고 빠져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기억 하십시오. 할 수 있을 때 바로 하는 것 그것이 친절의 첫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하필 이 세 사람은 마침 거기를 가게 되었을까요?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50년 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어떤 일은 여러분에게는 전혀 계획된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완벽하게 계획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를 했지만 제가 터키에서 가방 잃어버린 사건도 전혀 그날 일정에 미리 들어있었던 사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벽하게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세상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움직이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되어진다고 신앙의 선배들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그렇고, 이웃을 만난 것도 그렇습니다. 그 직장에 그 상사를 만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우연한 일처럼 보이는 모든 것도 완벽한 하나님의 기획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을 여러분 곁에 두셨습니다.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 상처입고 쉽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여러분 곁에 세우신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보내셨을까요?

여러분을 통해서 그들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여러분의 친절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친절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친절은 내가 낳은 자식에게 베푸는 것이 친절이 아닙니다.

카네이션을 가지고 돌아올 자녀를 통해서 보다도, 아무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친절입니다. 여러분의 일정을 망가뜨리고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을 축내는 사람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여러분과 만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어머니 때문에, 며느리 때문에 불편한 사람들은 없습니까? 어버이 주일은 하나님이 주신 화해의 기회요 개선의 기회입니다. 친 부모 자식 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며느리하고 시어머니하고 살아도 그게 티격태격하는 일들이 있지마는 진짜 잘 싸우기는 엄마하고 친딸하고 있으면 더 잘 싸우더라고. 그렇죠? 어제 어머니하고 우리 막내누님 하는 것처럼. 그렇죠?

멀리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되지만 다 안 되면 가까이 있는 사람, 우리에게 소중한 분들부터 이 한주간은 우리 부모, 우리 어른들부터 한번 친절 베풀기 실습을 해야 되겠습니다. 옛날에 학교 다닐 때 무슨 강조기간 이런 것 많이 있었죠? 우리 이번주간은 친절 실습기간입니다.

물론 마트에서 응대하는 사람들에게 아니면 주유소에서 여러분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친절실습이 필요하지만 오히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 연습을 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방문하는 인도뿐 아니라 여러분이 머무는 한국도 충분한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친절 배우시려면 계획이 망가지는 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둘째로 위험부담을 안아야 합니다. 친절을 배우려면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자주 우리 자신의 두려움이 우리가 친절할 수 있는 기회를 앗아갑니다. ‘가장 잔인한 사람은 가장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이란 말을 음미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갖고 있는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사마리아 인이 가질 법한 두려움은 여기 있습니다. “저 친구 돕다간 나도 당하겠네.” “저렇게 만든 강도떼가 아직도 숨어 있을지 몰라” “걸려들면 내 짐승도 내 돈도 내 생명도 위험해 질 거야.” 모두 그럴듯한 두려움입니다.

아니면 “이 사람도 내 도움을 원치 않을지 몰라 난 사마리아 사람이고 저 사람은 유대 사람이고” 죽은 것처럼 지금 누워있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서면 갑자기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난 사마리아 사람이 싫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두려움이 우리로 하여금 친절불능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느니라.”(요일4:18)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 주간 우리가 외워야 될 요절입니다. 지난주간 숙제는 뭐였죠? 고린도 전서 13장 13절 한번 외워볼까요? 저는 찬양만 잘해서 찬양대 된 줄로 알았는데 요절도 잘 외우네요. 우리 다시 한번 더 외우겠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다음 마태복음 7장 12절 읽을 때 옆에 있는 집사님, 장로님들 입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네번째로 사마리아인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고 고통을 공감하고 친절한 기회를 포착하고 그 대가를 지불합니다. 친절에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친절에는 언제나 가격표가 붙어있습니다. 틀림없이 시간, 돈, 에너지를 지불해야 됩니다. 프라이버시도 희생을 당할 수 있습니다. 친절에는 값이 지불됩니다.

보십시오.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눅10:35) 다가가서 응급조치를 해서 자기는 걸으면서 자기 짐승에 태워서 먼 주막까지 와서 밤새워 간호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노당자의 두 달 치 월급을 주면서 잘 보살펴 주십시오. “비용이 발생하면 내가 오면서 갚아 주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친절을 베푼 대가로 사마리아인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빚진 것도 은혜 입은 일도 없습니다. 본래 친절이란 아무 것도 바라는 것 없이 베푸는 사랑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자녀에겐 친절을 베풀 수 있지만 부모에게는 여러분이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대한 친절을 베풀어도 그분들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에 최소한 보답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식 키우면서 그 자식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도 그렇게 돌보아 준 부모 때문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왜 평범한 사실에 대해서 무지한지 몰라요. 그래서 부모에게 보내주는 용돈은 그것이 오만원이든 십만원이든 십오만원이든 커보이잖아요? 자식에게 쏟는 학원비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합니까? 믿음의 식구들에게, 특히 우리 부모님께 친절해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친절은 그러기에 예배행위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친절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칭송을 받습니다. 친절을 베풀면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자리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늘의 기쁨이 우리 마음에 찾아옵니다.

친절하면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친절을 베풀다보면 여러분도 친절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친절한 사람에게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말씀 맺습니다. 부모님 주일을 맞이해서 “사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란 말씀을 살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지만 믿음의 식구들이 더더욱 우리를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합니다. 부모님께 마땅한 친절은 언어와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분들의 필요가 무언지 한번 보아야 합니다. 그분들의 고통을 함께 느껴야 합니다. 친절을 베풀 순간을 미루지 마십시오. 대가를 꼭 지불하십시오.

친절은 시간, 돈, 에너지가 지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친절을 배워가는 일에 여러분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하나님께서 생명주시면 친절을 배워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고 아직도 세상에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 주간 더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설교 /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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