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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몸 = 성전 + 장막 (고전 3:16-17; 고후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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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우리의 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교우들 가운데 건강이 안 좋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 차례의 수술 때문에 얼굴도 야위고 몸도 야윈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창 2: 7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에게 주어진 심판 중에 하나가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창 3: 19 말씀을 다같이 찾아서 읽어봅시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니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우리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흙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병마로 온몸이 일그러진 분들이나 숨을 거둔 분들의 시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육신(SOMA)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 기독교는 육신은 무조건 악하고 영혼은 무조건 선하다는 영육 이원론(DUALISM)을 배격합니다. 사실 초대 교회를 가장 큰 위기에 몰아넣었던 이단 종파도 이와 같은 이원론에 빠졌던 영지주의자들(GNOSTICS)이었습니다. 이들은 물질로 만들어진 육체는 악하고 오직 영혼만 선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성육신론(INCARNATION)을 거부해버렸습니다.

분명한 것은 영지주의와 달리 우리 기독교는 육체를 긍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우리와 똑같이 썩어질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체가 겪어야 할 고통을 그대로 남김없이 당하셨다고 믿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우리 인간의 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고린도 후서에 가서 바울은 인간의 몸을 장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전'과 '장막,' 이 두 가지 비유(METAPHOR)야말로 우리 몸의 속성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II.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비유했을까요? 이 문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몸을 온갖 더러운 쾌락에 내맡긴 채 그릇되게 사용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는 항구 도시로서 아주 부유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대개 항구 도시가 그렇듯이 고린도는 온 세상이 알아주는 향락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희랍어 'CORINTHIAZOMA'라는 말은 '고린도인처럼 행하다'는 뜻인데 '매춘 행위를 하다'는 뜻으로 널리 쓰여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고린도는 음란 행위가 일반화된 도시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음행에 젖어 몸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몸이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①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거룩한 곳이다.
우리 다같이 고전 3: 16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여러분, 성전의 제일가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시는 것 아닙니까? 거룩한 장소로 성별하셔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곳이 성전이 아닙니까?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몸을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은 어떤 주인을 모시고 사는가에 따라 그 주인을 그대로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존귀하신 주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존귀한 몸이 됩니다. 세상의 정욕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추한 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전이 성령의 전이듯이 여러분들의 육신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하십시오! 거룩한 영을 따라 움직이는 거룩한 몸이 되게 하십시오!

② 성전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함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각종 예물과 희생 제물을 드리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장소가 성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 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전임을 잊지 마십시오!

③ 성전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성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아무리 인간이 공을 드리고 고생을 해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할지라도 성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면 우리 몸의 주인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제것인양 함부로 자기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군인이 훈련에 빠지기 위하여 잔꾀를 부렸습니다. 자신의 새끼발가락에 자해를 입혀서 고장이 나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이 병사의 잘못을 알아낸 상관이 영창에 보냈는데 그 죄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국가 기물 훼손죄'였습니다. 군인은 몸 전체가 국가를 위해 바쳐진 몸인데 그 몸을 훼손했으니 국가 기물을 자기 맘대로 파손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듯이 우리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고전 6: 19-20을 보십시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의 몸을 사셨습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하에 있던 우리의 몸을 엄청난 값을 치르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멋대로 하나님의 소유물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과 같은 나쁜 것으로 우리 몸을 축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음행이나 노름이나 오락에 빠져 하나님의 성전을 악의 소굴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늘 건강하고 아름답고 경건하게 가꾸고 사용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롬 6: 12-13에서 주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옳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의 것이매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인데 병에 걸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왜 툭하면 질그릇처럼 깨질까요? 왜 늙어서 쇠약해지고 결국은 싸늘한 시신이 될까요? 바울 선생에 따르면 그 이유가 우리 몸의 또 다른 속성, 즉 장막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입니다.

III. 우리의 몸은 장막이다

바울은 고후 5: 1-5에서 부활 후에 우리가 영체(SPIRITUAL BODY)로 변형될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신비하고도 신령한 몸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땅위에서의 우리의 몸을 '장막,' 즉 '텐트'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요? 세 가지 장막의 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장막은 영구용이 아니라 임시용이다.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을 수 있는 목초지를 찾아 이곳 저곳 장막을 치며 떠돌아 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주택과 달리 장막은 언제나 일시적이었습니다. 한 곳에 장막을 쳐 놓고 일평생 그곳에 몸담아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장막은 영구용이 아니었습니다. 임시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몸이 장막이라는 것도 우리의 몸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유한합니다. 일시적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무리 아름답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언젠가 늙고 일그러져 보기 싫을 날이 오고 쇠약해질 날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산이나 사막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은 사람의 해골을 옆에 놓고 그 해골을 쳐다보면서 자주 관상(觀想)에 빠졌다고 합니다. 인생무상을 깊이 체감하기 위해서였지요.

여러분, 여러분의 몸은 장막처럼 일시적입니다. 영구하지 못합니다. 아침에 잠깐 보이다가 금방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약 4: 14). 풀의 꽃과 같이 허망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시오!   

② 장막은 연약하다.
그 옛날 바울이 살았을 때의 장막은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그리 튼튼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바람이 칠 때 많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 추위가 장막 안에까지 미쳐서 사람들이 덜덜 떨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가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장막처럼 기후와 지형 조건에 'VULNERABLE,'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에 왜 병마가 찾아오고 노쇠가 찾아오고 죽음이 찾아옵니까? 우리 몸의 또 다른 속성, 장막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 몸을 성전처럼 거룩하고 깨끗하게 잘 관리했다고 할지라도 장막인 이상 온전할 수 가없습니다. 연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또한 인정하십시오!

③ 장막은 언젠가 거두어서 무너질 날이 온다.
여러분, 장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목적이 있어서 장막을 세웠다면 그 목적이 다 끝난 다음에는 반드시 해체하게 되어 있는 것이 장막이 아닙니까? 생각해보십시오. 한국에서 운동회를 하거나 마을의 큰 행사가 있을 때 꼭 큰 텐트를 여러 개 쳤습니다. 그러다가 행사가 다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갈 때가 되면 그 많은 텐트를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몸이 장막이라고 하는 사실도 꼭 이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인 우리의 몸을 통하여 영광 받으실 일이 다 끝날 경우 우리의 몸은 거두어야 합니다. 해체되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고후 5: 1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땅에 있는 장막집, 곧 우리의 육체가 해체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하늘의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훨씬 더 좋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거룩한 하늘의 집, 즉 신령한 부활의 몸으로 바꾸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진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거룩한 하늘의 집으로 변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맺음말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저주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선물이 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을 더러운 것으로 채우는 사람은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을 학대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불경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의 몸을 거룩하고 아름답고 건강하게 잘 관리하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십시오! 성전을 성전답지 못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몸을 성전처럼 잘 관리했다고 할지라도 장막과도 같이 무너질 날이 올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장막처럼 영구하지 못합니다. 연약합니다. 모든 목적이 다 달성될 경우 반드시 해체할 날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의 신령한 집으로 다시 세워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전 16: 52-53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한 것처럼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겠고,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의 소망을 마음 속에 간직하시고 오늘 우리 몸에 찾아오는 가지가지의 고통을 잘 이겨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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