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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의 안식을 위한 울타리 (창 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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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1.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안식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주어진다.

일상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은 자유와 쉼을 만끽하려고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산으로 들로 나갑니다. 이러한 여가시간이 얼마나 주어지는지가 직장 선택의 주요 기준이 되어 갑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높은 산과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이 확 트인다며 즐거워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마치 최고의 자유를 획득한 것처럼 기뻐합니다. 울타리가 없고, 장벽이 없는, 끝없이 펼쳐진 자연 속에서 참된 자유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상황이 참된 자유일까요? 그곳에서 안식할 수 있을까요? 울타리 없는 자유는 잠시 잠깐의 긴장 해소일뿐입니다. 우리들은 산 정상의 열려진 공간에서 편안히 안식하며 잠을 청할 수 없습니다. 넓은 바다 앞에서 홀로 잠을 청하며 안식할 수 없습니다. 울타리 없는 자유는 자유와 쉼과 안식에 대한 일시적인 경험입니다. 지속적인 자유와 안식을 줄 수 없습니다. 조만간 그 자유와 안식이 두려움과 불안으로 바뀝니다. 울타리 없는 자유는 안식을 줄 수 없는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에게 자유와 안식을 주기 위하여 철저하게 울타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울타리를 치셨습니다. 하늘 위의 궁창과 하늘 아래 궁창으로 울타리를 치셨습니다. 종류별로 동물을 창조하셔서 울타리를 치셨습니다. 낮과 밤과 절기로 울타리를 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울타리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안식하는 피조물들을 바라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평가하시며, 하나님 자신도 창조주간 제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인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순간부터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으며, 자유를 누리고, 안식하였습니다. 하늘 위의 물 층이 우주 공간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였습니다. 바닷물이 인간의 영역인 육지를 넘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 104:9는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찬양합니다. 동물들도 사람의 영역을 침입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울타리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안식하였습니다. 인간은 울타리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안식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울타리는 자연세계의 울타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인 울타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가정을 구성하기 전에 먼저 그 울타리가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인간이 참된 자유를 누리며 안식할 수 있는 울타리가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 울타리는 곧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만 자유와 안식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울타리를 알고, 그 울타리 안에서 가정을 세워가는 사람만이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창 2:16의 첫 문장을 직역하면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셨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명령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명령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명하시는 하나님을 최고의 울타리로 알고 받아들일 때 자유와 안식을 보장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셨다”라는 말씀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선포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인간,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는 가정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현재 인간이 겪는 수많은 문제들은 결국 울타리 되신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울타리를 무너트릴 때 언제나 그 울타리는 심판의 주관자로 다가옵니다. 각 가정의 파괴와 안식의 상실도 울타리가 무너진 결과입니다. 가정의 어려움은 울타리가 상실된 어려움입니다. 하나님을 울타리로 받아들이고, 그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자유와 안식을 누립니다. 그러한 가정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기쁨을 누립니다.

우리는 잠깐의 장벽 해체를 자유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울타리 없는 자유를 자유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울타리 없는 자유는 심판과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울타리의 파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울타리의 파괴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5에서 울타리를 무시하는 자들에게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 것을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케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라고 예언하였습니다.

2. 인간의 삶은 자유의지 속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보장되었다.

시 89:40-41에서 시편기자는 “저의 모든 울타리를 파괴하시며 그 보장을 훼파하셨으므로 길로 지나는 자들에게 다 탈취를 당하며 그 이웃에게 욕을 당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자유와 안식은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창조질서의 울타리, 인간의 울타리, 가정의 울타리가 있습니다. 울타리는 울타리를 치신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울타리 안에 있는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울타리 안에 살아야 합니다. 울타리를 모르는 인생은 세상의 밥이 됩니다.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인생의 환희와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정을 이루며 살아갈 에덴동산의 “에덴”의 뜻이 “환희, 기쁨, 즐거움, 아름다움”의 뜻인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는 인간의 모든 행복이 있습니다. 인간의 무한한 자유와 안식 가운데 행복한 인생이 보장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자유와 안식과 행복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창 2:16-17은 그 울타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언하며,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울타리는 우리의 고정관념과 같은 금지 명령의 울타리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울타리에는 허용 명령과 금지 명령이 동시에 담겨 있는 울타리입니다. 창 2:16-17은 그 두 종류의 울타리 명령 중 먼저 허용 명령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금지 명령을 보여주시고, 인간과 최초의 행위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먼저 허용 명령 속에서 은혜와 감사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금지명령 속에서 그 은혜와 감사를 지속해 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먼저 창 2:16의 두 번째 문장을 보면,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보장하셨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 동산 나무의 모든 것을 먹되 네가 먹을 것이다.”라고 번역됩니다. 창 2:17에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외에 동산 나무에서 나는 모든 것들을 허용하셨습니다. 여기서 “먹되 네가 먹을 것이다(오콜 토켈)”라는 표현은, “아칼(먹다)”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절대부정사 “먹되(오콜)”와 미완료형태 “먹을것이다(토켈)”로 두 번 반복해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두 번 반복해서 먹으라고 하신 말씀은 마음대로 먹으라는 허용입니다. 그래서 “먹되”라는 단어를 대다수의 번역에서 “임의로(freely)”라고 의역하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한 자유가 무한대에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신학적으로 “자유의지”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거의 무한대의 자유의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습니다. 이 허락도 하나님의 명령 속에서 주어진 허락입니다. 즉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진 허락입니다.

이것이 허용 명령입니다. 인간의 삶은 자유의지 속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보장되었습니다. 창 2:9에 보면,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발원하는 네 강의 풍성한 물길을 따라 각종 보석과 같은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곳에 아담을 두셨고,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맞는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중심으로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도록 보장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한대의 자유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인입니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의지 속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허용 명령을 알고 감사드리며, 경배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울타리를 알고, 그 울타리 안에서 자신에게 주신 자유와 안식을 감사하며 찬양할 때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안식으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환희는 인간의 환희로 임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금지명령을 받기 전에 먼저 허용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창 2:16-17의 말씀을 하나님의 언약적인 관점으로만 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금지명령이 첫 명령인 것처럼 받아들이지만, 성경 본문은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거의 무한대의 허용 명령이 주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자유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자유 가운데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그 자유와 안식을 누리며, 찬양하며 감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자로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을 향한 꿈은 창조주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의지를 알고, 감사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울타리가 무너진 깨어진 가정에 속해 있을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울타리를 발견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자신에게 허용된 자유의지의 삶들을 발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누리도록 허용된 자유의지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없는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울타리를 넘어갑니다. 먼저 하나님의 허용을 보아야 합니다.

3. 인간의 삶의 자유의지는 금지명령의 울타리 안에서 보장되었다.

그 다음에 창 2:17의 첫 번째 문장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라는 하나님의 울타리를 금지명령으로 알려주십니다. 인간에게 허용된 자유의지가 조건부라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인간에게 허용된 거의 무한대의 자유의지는 단 하나의 금지명령의 울타리를 지키는 한 인간의 자유와 안식과 행복을 위해 보장됩니다. 인간의 행복은 금지명령 속에서 허용명령을 누릴 때 임하는 행복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허용명령과 금지명령을 모두 보게 하는 울타리입니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그 울타리 안에서 자신에게 허용하신 무한하신 은혜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벗어날 때 다가올 무서운 심판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 심판의 모습이 창 2:17의 두 번째 문장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최초로 맺은 행위 계약입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도 히브리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네가 그것을 먹는 그 날에는 죽되 네가 죽을 것이다.”라고 번역됩니다.

여기서도 “죽되 네가 죽을 것이다(모트 타무트)”라는 표현은 “무트(죽다)”라는 하나의 단어를 절대부정사 “죽되(모트)”와 미완료형태 “죽을 것이다(타무트)”로 두 번 반복해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두 번 반복해서 죽는다고 하신 말씀은 꼭 죽는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죽되”라는 단어를 대다수의 번역에서 “정녕(surely)”이라고 의역하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금하신 영역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강조합니다. 이 표현은 창 2:16에서 “임의로 먹되”라는 문장과 동일한 용법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기고 울타리를 넘는 그 순간 바로 죽습니다. 창 2:17은 “먹는 그 날” 곧바로 죽는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금지 명령의 울타리를 넘는 그 순간에 인간에게 허용되었던 모든 행복의 조건들도 사라집니다.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먹으라는 하나님의 허용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준행할 때만 유효한 명령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전제로 행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불순종은 행복의 울타리를 넘는 것입니다.

“먹되 먹으리라”라는 자유의지의 삶과 그 자유로부터 주어지는 안식과 행복은 “죽되 죽으리라”라는 행위언약과 함께 주어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금지 명령을 준행할 때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삶의 자유의지는 금지명령의 울타리 안에서 보장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허용 명령을 바라보며 은혜를 힘입게 할 뿐 아니라 금지 명령을 바라보며 죽음을 보게 하였습니다. 아담은 이 울타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허용과 금지를 항상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허용 명령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도록 요구하시는 단 하나의 금지 명령을 동시에 바라보며, 기억하는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담은 이러한 허용 명령과 금지 명령을 기억하며 하와를 만나 가정을 구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금지 명령의 한계 속에서 허용 명령을 실행하며 누리는 가정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삶은 허용 명령 속에서의 방종도 아니며, 금지 명령 속에서의 공포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을 위한 것입니다.

허용 명령이 없는 금지 명령은 자유의지를 상실케 합니다. 참된 자유와 안식을 빼앗습니다. 하나님의 희락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오직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율법적인 인간이 되며, 원망과 불만에 사로잡히게 되고, 울타리를 넘을 기회만을 찾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울타리를 넘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만 하면 순식간에 울타리를 뛰어 넘는 인생의 자살골을 넣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잘 아시기에 풍성한 허용 명령을 먼저 주신 후에 하나의 금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허용 명령을 아는 자는 그 은혜와 감사의 감격 속에서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하는 울타리로 알고,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금지 명령이 처벌과 징계를 위한 울타리가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된 허용 명령을 누리게 하는 자유의 보장을 위한 울타리임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울타리의 반응이 인생의 행복을 누리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자유의지를 따라 무한한 허용 명령의 자유를 누립니다. 금지 명령은 이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울타리이며 보장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연 만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허용 명령과 금지 명령을 알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안목이 요구됩니다. 특히 가정의 구성과 가정의 회복의 꿈을 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허용 명령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양으로 나가는 능력을 키워야 하고, 그 허용을 누릴 수 있는 한계가 되는 금지 명령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4. 행위언약 안에서 가정의 안식을 위한 울타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

특히 가정사역의 비전을 품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허용 명령과 금지 명령을 자신의 가정을 향한 꿈에 적용시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들이 맺은 최초의 행위계약은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라는 계약입니다. 과거에는 죄악 중에 살았기에 이 행위 계약을 지킬 수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였기에 하나님의 울타리를 볼 수 없었습니다.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하나님의 울타리를 볼 수 있는 눈을 지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풍성한 허용 명령을 보며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보며 풍성한 자유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인치심을 따라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환희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보증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롭게 지음 받은 위치에서 가정 회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담이 이루었던 최초의 가정이 하나님과의 계약 속에서 이루어진 가정이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가정도 하나님과의 계약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담은 가정의 모든 삶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울타리로 삼아 이루어 가야 했습니다. 그 울타리를 통해 허용 명령대로 순종해 나갈 때 가정의 안식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 울타리를 통해 금지 명령대로 순종해 나갈 때 가정의 자유와 안식과 평강이 유지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가정의 안식을 위한 울타리를 두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의 가정 사역은 하나님과의 행위언약 안에서 가정의 안식을 위한 울타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죄와 허물로 무너진 하나님의 울타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만남에서부터 그들이 한 가정을 이루고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영역까지 울타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가정 사역은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용 명령에 순종하고, 금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가정 사역이며, 가정 회복의 길입니다.

가정의 안식을 위한 하나님의 울타리는 가정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울타리로서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허용 영역과 금지 영역을 알게 하십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가 이루는 가정 역시 하나님의 작품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나 하와나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나 모두 언제든지 창조주 하나님을 피조물인 자신들의 울타리로 고백하는 실질적인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실질적인 행위는 바로 예배입니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신다는 고백입니다. 예배의 고백을 통하여 울타리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풍성한 삶을 경험합니다. 자유의지를 따라 역사하시는 성령의 소욕이 안겨주는 풍성한 열매들을 취하며 참된 자유와 평강 그리고 안식을 누립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 들어오기 전의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바라보며, 그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보장 속에서 자유와 안식을 누립니다.

둘째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아담과 하와의 부부의 울타리를 알게 합니다. 아담과 하와 부부 사이에 하나님 외의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울타리로서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결혼”이라는 울타리로서 가정의 안식을 보장합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 가정이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누리게 하십니다. 결혼이라는 울타리는 아담과 하와의 자유의지에 의한 풍성한 인생을 보장해 줍니다. 그러나 결혼의 울타리는 간음 등 울타리를 넘는 행위의 무서운 심판을 보여주며 서로의 자유와 안식을 보장해 줍니다.

셋째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아담과 하와가 이루는 가정의 물질적인 울타리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허용과 금지의 명령은 아담과 하와가 이루는 가정의 모든 소유물의 주인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합니다. 십일조의 삶은 물질의 울타리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은 다스리고 지키라는 명령을 주신 하나님을 물질의 울타리로 바라보며, 그 울타리 안에서 임의대로 물질을 사용하는 풍성한 인생을 누립니다. 또한 그 울타리를 바라보며 물질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울타리를 넘는 인생들의 실패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처럼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안식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며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보장받았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금지명령의 울타리 안에 있기만 하면 보장받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행위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울타리를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그 회복은 가정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안식을 위한 울타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설교 / 김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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