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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지금은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할 때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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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초대교회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신학생들이 기말이 되어서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성령론에 관한 시험을 치게 되었는데 어떤 학생이 '다른 과목은 다 공부해서 시험칠 일이지만 성령론 만큼은 공부해서 시험칠 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해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다음에 시험을 치기로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한 후에 시험 고사장에 들어갔습니다. 시험지가 나누어집니다. 보니까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 한자도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학생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성령론 시험을 치려고 하는데 정말 시험 듭니다. 내가 그렇게 기도하고 시험 문제를 받았는데 한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 학생이 열심히 기도하는데 시험지를 내야 할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번쩍하고 영감이 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정답을 썼습니다. "성령님은 다 아십니다. 끝." 서양 선교사 교수님이 시험지 답안을 채점해야 되겠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학생의 답이 맞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틀린 것도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교수님도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럴 때는 어떻게 채점을 해야 옳습니까?" 이 교수님에게 번쩍하는 영감이 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기가 막힌 채점을 했습니다. "성령님 백점. 너 빵점." 결국 이 학생은 그 학기에 낙제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반드시 듣게 되는 말 중에 하나가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일까, 신앙생활과 어떻게 관련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령 충만하면 대체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할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은 성령 충만의 모습을 광신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어떻게든 만나고자 하여 답답하게 여기는 분들은 뭐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이 한번이라도 성령 충만을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해서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바람 속에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해서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생활이 뜨겁게 바뀌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서 정말로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가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반드시 성령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그 생명력을 잃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동일하게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 성도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성도는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역사를 보게 되면 성령의 체험을 한 사람은 자신의 인생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과연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나 스스로도 모르겠고, 매일매일 습관처럼 살게 되는 교회 생활에서 새로운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다면 오늘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함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성령님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과 함께 삶을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의 역사를 환영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성령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미지근한 종교 놀이에서 벗어나 복음의 능력을 맛보아 알게 될 것입니다. 제발 사랑하는 여러분, 종교 놀이를 하지 마십시오. 종교꾼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면 자신도 피곤하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어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에게 임하소서"♬

신학자 반하우스는 현대 사회에 '자폐증 크리스챤'이 많음을 한탄했습니다. 자폐증이라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증세입니다. 반하우스 박사는 오늘 이 시대의 크리스챤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크리스챤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이해하였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자폐증 아이를 가진 부모가 얼마나 슬프고 안타깝습니까? 그와 같이 자폐증 크리스챤을 둔 하나님 아버지도 몹시 슬프고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습니다. 설교의 홍수 시대에서 듣고 싶은 설교를 마음껏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일들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님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나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주일 아침에 교회에 나가서 성경 말씀과 영감 있는 설교로 가득 채워진 다음, 한 주일 동안 그 말씀을 가만히 품고 있다가 다시 교회에 나가서 설교를 듣는 그런 종교 놀이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활의 한 방식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것과 똑같은 걸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성이나 논리가 아닌 우리의 마음으로 믿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실제로 살아 계시며,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면 이것은 사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그를 믿는 우리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셨다면 우리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병자들을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입을 빌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셨던 똑같은 기적을 오늘은 물론이거니와 미래에도 일으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박물관에 전시만 해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저렇게 하셨습니다"라고 마치 소설을 읽듯이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증에 빠져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이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을 우리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져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와 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행하셨던 일들을 나도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몇 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이 임해야 증인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참된 주님의 일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이 충만한 일꾼을 원하시지 말꾼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꾼은 머리만 아픕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리고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던 성령 강림의 사건입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의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했던 동일한 역사가 오늘 이곳에도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성령이여, 지금 이 자리에 임하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임재하심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십시오.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임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순절에 임하셨던 성령의 임재하심이 지금 우리가 모인 이곳에서도 동일하게 체험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능력은 많이 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음의 능력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나라가 말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소설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능력의 시대입니다. 지금은 잠자는 거인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동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권능과 기적이 없는 연약한 성도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모든 예배에서, 그리고 매일 매일의 모든 시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님의 놀라운 사역을 경험하고 보여줄 수 있는 능력 있는 성도가 되십시오. 그래서 내가 만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십시오. 내가 경험한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말하십시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성령의 권능과 능력을 받아서 승리하는 믿음의 산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지금은 논리로 설득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감성으로 마음 깊이 느끼게 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

19세기 미국이 암울했던 시절에 영적 대각성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유명한 부흥사 찰스 피니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듯이,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것도 죄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을 받지 못하면 순종도, 충성도 못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목사가 아닙니다.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장로가 아닙니다. 권사가 아닙니다. 교회의 중직자라고 해서 사탄이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가 성령의 사람이라면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사탄은 무서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하십시오. 그래서 나를 억누르고 있던 어둠의 영들이 물러가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귀신과 각색 질병들이 떠나가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 마음에는 참 기쁨과 구원의 감격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면 신앙생활에도 자신감이 생기고, 매사에 의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께서 임재하시는 통로에 나의 삶의 자리를 두십시오. 이전에 내 삶의 자리가 술 먹고, 남을 비난하고, 불평하는 자리였다면 이제는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통로의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자리에 서십시오. 예배를 드린 후에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그 모임 가운데 성령께서 임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랜만에 모여서 시간도 남는데 화투나 치자고 하는 그 자리에 성령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쓰실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여러분의 가정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신다면 그런 사람들과는 교제를 끊으십시오. 성령님께서 싫어하시는 그런 모임에는 나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그곳에 서 계십시오.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모임에 즐겁게 참여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십시오. 뜨거운 믿음의 교제를 하십시오. 오늘도 죄와 적당하게 타협하고 죄에 끌려가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그곳에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체험하면서 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아픔과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미래를 알고 계십니다. 내 곁에 계시면서 내 형편과 사정을 알고 나와 함께 느끼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구체적으로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것이 우리말 성경에는 연약함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에 보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연약함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겁니다. 연약함들, 성령께서는 우리의 수많은 연약함을 도와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도운다'는 말은 그 시제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도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 날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도와주실 것이라는 미래의 약속이 아닙니다. 도우시나니 현재형입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과거에 저와 여러분을 도와주셨습니다. 미래에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성령님은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도와주십니다.

제가 교회에서 그렇게 짧지 않은 목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잘난 사람도 보았고 못난 사람도 보았습니다. 대단한 학식을 가진 석학들도 만나 보았습니다. 무식한 사람도 만나 보았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도 만나 보았고, 가난한 사람도 만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질그릇과 같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깨어질 수밖에 없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 연약함이 바로 인간다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실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넘쳐도 문제가 되고 모자라도 문제가 됩니다. 사랑이 너무 많아도 문제고 사랑을 못 받아도 삐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이 너무 많아도 타락합니다. 너무 적어도 비굴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나무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오히려 더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실패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연약하기 때문에 예배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데 실패자가 될 것이라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연약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기만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는 지금 당장 나를 찾아오셔서 도와주십니다.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 여기에서 도운다는 단어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그 도우심의 사건이 얼마나 신비한지 그 당시에 사용되어지는 세 단어를 하나로 묶어서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의미에서의 도우심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쉬난티람바노마이" 이 말은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다정하게 계시면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저 건너편에서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신다.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차를 운전해서 오솔길을 지나고 있는데 큰 통나무가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치우지 않고서는 우리가 한 걸음도 꼼짝달싹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거대한 바위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것을 치우지 않고서는 내가 어떤 일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부딪혀서 그 앞에서 안타까워합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내 힘이 도무지 미치지 못합니다. 능력의 한계 저 너머에 있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에 어떤 힘있는 분이 그 문제 저 건너편에서, 통나무 저쪽 끝에서, 바위 저 쪽 끝에서 그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셨습니다. 이제는 갈 길이 보여집니다. 다음 문제가 보여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쉬난티람바노마이"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짐이 무거워서 쩔쩔매고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성령님이 옮겨 주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실패한 자리에서 안타까워하며 당황해 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날마다 반복적으로 똑같은 죄를 범죄함으로 실패의 언덕을 넘어서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쉬난티람바노마이" 성령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가정에서 여러분이 괴로워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직장에서 여러분이 괴로워하며 안타까워 할 때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인생 여정에서 여러분이 커다란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 성령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 임재하셔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성령님께서 직접 해결해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성령님의 도와주심을 바라야 합니다.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이 시간에 부족한 종이 말씀을 전합니다. 저 혼자 설교하는 것 같지만 성령님이 부족한 종을 지금 도와주고 계십니다. 종을 사용하는 성령님을 만나십시오. 부족한 입술을 통하여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찬송할 때에 그 찬송이 여러분의 고백적인 찬송이 되도록 성령님의 도와주심을 기도하십시오. 이 시간에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이 치료하는 광선처럼 여러분의 내면의 아픔을 치료하도록 도와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인생 여정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문제를 다 벗겨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연약한 믿음을 강력한 믿음으로 도와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서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을 환영하십시오. 영접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셔서 역사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성령님께서는 여러분과 인생 끝날까지 함께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은 나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통해서 능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고 누구든지 불가능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함으로써 불가능을 깨뜨리고 가능케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황무한 땅을 옥토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십시오. 사업장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개인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승리합니다. 축복을 받습니다. 남이 못하는 큰 역사를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하나님의 정병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성도처럼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아르바이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하루 하루가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주 앞에 나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영혼의 답답함이 사라지고 상쾌함과 만족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십시오. 못난 나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힘은 부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비판적인 것을 다 몰아내고 다시 독수리같은 새 힘을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삶의 자세와 태도입니다. 신앙은 환경을 바꾸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속의 태도와 자세를 바꾸어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성령의 능력을 입고 내 삶의 태도와 자세를 변화시키겠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지금 한국의 기혼자들 가운데 80%가 애인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애인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6급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6급 장애인은 장애인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가 이렇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 우리 민족의 장래를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깨어있는 사람, 성령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이 이 사회와 민족을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생애에 성령의 폭발을 일으켜야 합니다. 사실 교회가 존재하고 믿음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성령 운동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의 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한국 교회 교인들만큼이나 성령론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잘 아는 교인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이론적으로는 너무 잘 압니다. 그러나 역사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박물관에 전시용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고, 방언과 통역과 각양 성령의 은사들을 보면서 광신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무능한 교인을 만들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논리 속에 성령님을 가두어 놓지 마십시오. 성령님의 역사는 제한이 없습니다. 이 제한없는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은 사람을 싱싱하게 만듭니다. 성령은 사람을 능력있게 만듭니다. 힘있게 만듭니다. 성령은 기적의 주인공으로 만듭니다. 화분의 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물이 없으면 시들어버리고 곧 마르고 죽는 것처럼 성령의 임재하심이 없다면 그의 영혼은 메마르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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