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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통을 들으시는 여호와 (창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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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언약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되심과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언약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도 언약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건지시고, 그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땅과 후손과 복에 대하여 약속하셨습니다(창12:2-3).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 자신께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갈대아 우르에서 건짐을 받고 가나안으로 들어와 산지 10년이 되어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손이 없자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자신이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래는 인간적인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보려고 시도합니다. 이는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을 잘못 이해함으로 생긴 결과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을 누가 낳았든지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되지 않느냐 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래가 시도한 방법은 사래의 여종 애굽 여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어 아브라함의 자손을 낳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이 일은 순조롭게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임신했음을 알게 된 하갈이 사래를 멸시함으로서 상황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자가 아기를 못 낳은 다는 것은 충분히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하갈은 자신이 여주인 사래를 멸시한 것 때문에 도리어 사래로부터 학대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하갈은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6). 도망을 친 하갈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국인 애굽을 향하여 갑니다. 하갈의 고향은 애굽의 동편 접경지역인 술이라는 곳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사막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몸으로 그것도 임신을 한 몸으로 사막을 건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래의 학대를 피해서 도망쳐 나온 하갈이 갈 곳은 오직 고향뿐 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갈은 사막을 가로질러서 고향인 술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사막 길에서 목이 마른 하갈은 술로 가는 길에 있는 샘물 곁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은 하갈이 술로 가는 길에서 식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샘물입니다.  하갈은 이곳에서 물을 먹고 보충하여 고향인 애굽의 술 지방으로 가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와의 사자가 사막의 샘에서 애굽 사람 여종인 하갈에게 나타났습니다.




2.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난 것은 애굽으로 향하고 있는 하갈의 발걸음을 다시 주인에게로 되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가로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가로되 나는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7-8)하였고,  이어서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하였습니다.  즉 지금 하갈은 아브라함의 사래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식 즉 그의 후손을 낳게 될 처지에 있습니다. 비록 여종인 하갈이 자신의 상전을 멸시하다가 쫓겨났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얻으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보려는 아브라함과 사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한편으로는 하갈이 주인에게 잘못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도 또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래의 계획된 의도에 따라 임신을 하게 되었고, 또한 자신이 임신한 사실 때문에 여주인을 멸시하다가 도리어 핍박을 받고 쫓겨 도망하는 그런 신세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 이어서 본장에서 하갈을 찾아오신 여호와의 사자가 단순히 여호와의 사자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갈이 자신이 만난 여호와의 사자를 사자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셨다고 말하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 창세기 16:13절에는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하갈은 자신이 여호와의 사자를 본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하갈을 찾아오신 분이 사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고통을 아시고 하갈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하갈은 고통 받는 약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특별히 하갈의 고통은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벌린 행동 때문에 생긴 고통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찾아오신 것은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돌보심으로서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하갈을 찾아오심은 언약의 계승자인 아브라함이 벌려놓은 잘못된 일을 처리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갈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지만, 이것은 오히려 아브라함이 저질러 놓은 잘못된 일을 처리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주인을 피해서 도망 나온 여종 하갈을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복종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래 때문에 도망 나온 하갈이 다시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갈에게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찾아오신 것은 모두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갈이 고통을 받게 된 것이 아브라함과 사래 때문이었을지라도,  여주인 사래를 피해서 도망가는 하갈에게 찾아오시고 그의 고통을 들으신 것도 사실은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하갈이 아브라함 때문에 고통은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갈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갈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기 위해서는 아브라함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시려고 택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어 주시면서도 하갈을 애굽의 자기 집으로 계속 가게 하신다면, 그것은 사실상 아브라함을 벗어난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다시 아브라함의 수하에 돌려보냄으로서 그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3. 그러면 하갈이 사래에게로 돌아감으로 그가 얻게 될 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본장 10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성경 창세기 15: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약속을 이루어 가실 것인가에 대해 상당한 기대감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 번성에 대한 약속을 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독자 이삭에게만 해당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약속은 오직 적자로서 장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조상이 될 이삭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하갈의 소생에게도 자손 번성에 대한 복을 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곧 하갈의 소생에 대하여 자손 번성에 대한 복을 말씀하셨다고 할지라도 그가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을 위하여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그에 대하여 “그는 들 나귀 같이 되리라”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기에 그들은 들 나귀와 같이 길들이지 않은 상태로 살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자손을 길들이려고 할 것이며,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사람들에게 길들여지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하게 될 것임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어찌 보면 자손 번성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갈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낳을 아이, 곧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이 번성하게 되는데, 그것도 사람들이 길들이지 못할 정도 강하게 살아남을 것이라고 들릴 수밖에 없음으로 이 말씀도 그에게는 큰 소망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찾아오신 것은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만약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을 낳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치 않으신다면, 또한 이스마엘에게 자손 번성에 대한 축복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사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자식을 낳아도 별로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종인 하갈에게서 낳은 자식일지라도 그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도 또한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이 말씀은 하갈에게 소망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주신 은혜를 하갈이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본장에 나타난 두 가지의 이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는 ‘이스마엘’이며, 다른 하나는 ‘브엘라해로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주신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증표와 같습니다.  먼저는 브엘라해로이 즉 나를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이라는 뜻인데, 하갈은 이 우물에서 자신의 하나님을 뵈었으며, 그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그 증표는 바로 하갈이 낳을 아들 이스마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의 아들 곧 하갈의 소생을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에 대하여, 하갈의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11) 는  뜻입니다.  이는 사실상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평생의 약속을 주신 것이며,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약속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갈은 자신이 낳은 아들 곧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사실을 항상 확인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주인에게로 돌아간 하갈은 아브라함의 나이 팔십 육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4.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갈의 고통을 돌보셨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돌아보시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알려줍니다.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언약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차별을 두지 않은 주님의 사랑이 바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처음으로 사람을 만나서 소개를 받아 알아갈 때, 먼저 그의 주변 사항과 학교, 직장, 출신지 등을 소개받습니다.  그리고 좀더 깊이 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그의 생각이나 성품들을 알게 되고, 또 그와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도 그 사람에 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자신을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때, 이력서를 기록하여 소개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이력서는 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리기 위하여 출신학교. 경력사항 등 여러 가지 자신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은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하나님을 다양하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큰 단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정확한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이란 흉내가 아니라 삶이기 때문인데, 삶의 진실은 바로 앎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르쳐주신 성경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어떤 하나님이다”라고 알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문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른 섬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매주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날마다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요소는 너무도 많고 많아서 다 헤아리기조차도 힘듭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있다면 절망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희망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람들을 만족하게 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찾다가 만나는 것은 오직 절망뿐입니다. 절망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 몰고 맙니다.

그러나 절망 중에서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것도 하갈의 고통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알았다면 그들은 절망 중에서 소망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오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언제나 자기 백성들을 신실하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생긴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은 안심하십시오. 왜냐하면 하갈을 고통에서 돌보시고, 하갈의 소생에게 번성하는 축복을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지금도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거짓이 없으신 분이시며, 언제나 신실한 우리의 아버지이심으로 그분은 그분 안에서 주의 백성들은 항상 은혜가 넘칠 것입니다. (설교 : 위재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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