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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조연배우(5) : 생명처럼 귀한 친구, 요나단 (삼상 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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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찾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이도 비슷하고 마음이 잘 맞는(소위 ‘죽이 맞는다’고 하지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너하고 나하고 친구 하자”며 친구가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꽤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만 여러분, 그 많은 친구들이 다 진정한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많은 친구들 중에 진짜 친구는 누구일까요? 이 시간 여러분 마음속에 이 친구야말로 정말 내 친구다, 진짜 친구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한번 그 얼굴을 떠올려 보기 바랍니다.

친구란 참 신기하게도 너무 없어도 문제요 너무 넘치게 많아도 문제라고 합니다.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인가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요 벗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가 됩니다. <채근담>에 보면 “벗을 사귐에는 과하여 넘치지 말지니 넘치면 아첨하는 자가 생기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실된 친구는 그리 많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진실한 친구 두 명만 만나면 성공한 사람이다”라는 말도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잠언 19장 4절에서도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19:4)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결론적으로 참된 친구란 즐거울 때, 행복할 때뿐 아니라 불행할 때, 내가 힘들 때, 망했을 때, 가난해졌을 때에도 변치 않는 우정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이해타산을 떠나 내가 손해 보고 희생해서라도 친구를 돕고 살리고 세워주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친구라고 하겠습니다. 친구를 위해 기꺼이 조연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생명보다 귀한 친구

성경에 나오는 이런 참된 친구가 바로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이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뜻인데 이는 요나단이야말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뜻이겠지요. 요나단과 다윗은 정말 보통 친구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오늘 설교제목처럼 이 두 사람은 친구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는 말이 사무엘상 18장 1절과 3절, 그리고 오늘 본문인 20장 17절에서도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다윗의 참된 친구라고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요나단은 자기 친구인 다윗을 정말 사랑해서 그 생명을 구해줍니다. 아버지인 사울 왕이 친구 다윗을 해치려는 것을 알고 목숨을 걸고 다윗을 도와 도망하게 해줍니다. 이렇게 친구가 어려울 때 도울 수 있는 친구야말로 진정한 친구지요. 그러나 단순히 친구를 위해 살려주고 도와준 정도가 아니라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에서 요나단은 진정한 친구입니다. 요나단은 친구를 알아보고 그 친구를 세워준 사람입니다. 세워준 정도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양보하면서까지 친구를 세워준 사람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인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은 당연히 요나단 자신입니다. 다윗만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나의 왕위를 위협할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요나단이 이런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요나단과 다윗 사이의 진정한 우정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인 사울도 바로 이런 생각, 이런 라이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런 아버지와 반대로 요나단의 우정은 라이벌 의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이익이나 성공보다 중요한 것이 우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우정이라고 해도 무조건 양보하는 것은 진정한 우정이 아닙니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고 내가 더 능력이 있는데 친구라고 해서 능력도 없고 부족한 사람에게 책임을 넘긴다면 그것은 우정이 아닙니다. 우정이라는 미명 하에 어쩌면 친구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치명적인 실수입니다. 개인적인 일이라면 얼마든지 이렇게 할 수 있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라는 자리는 결코 사사로운 감정으로 판단할 자리가 아닙니다. 왕 한 사람으로 인해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좌우되고 수많은 백성들의 안위가 달려있기 때문에 이 중요한 책임은 절대 우정이라는 핑계로 아무렇게나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 더 능력 있는 사람이 하도록 돕고 세워주는 것이 맞습니다. 이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우정이란 이런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나보다는 내 친구가 더 능력이 있고 훨씬 이 일을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되면 과감하게 그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친구라 해도 어찌 왕위가 귀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쉽게 왕위라는 엄청난 자리를 쉽게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진정한 친구는 내 친구의 장점과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내 친구의 장점과 능력을 볼 때 나보다 훨씬 더 왕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나보다 하나님의 일을 월등하게 잘 해낼 사람이라고 판단될 때 나는 모든 미련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그에게 위임을 해야 합니다. 다같이 삼상 23장 17절을 보십시오. 요나단은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다시 만났을 때 다윗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분명히 요나단은 자신보다 다윗이 훨씬 왕으로서 더 좋은 능력과 자격을 갖춘 사람인 것을 알고 인정한 사람입니다.




나보다 능력 많은 친구

사실 요나단도 왕이 될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는 용맹한 사람이었고 좋은 성품을 지니고 의리도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왕이란 용맹함이나 성품만 가지고는 안 되는 자리입니다. 타고난 리더십이 있어야 하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반 왕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은 반드시 하나님이 택하셔야,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나님이 쓰실 일군은 하나님이 직접 택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분명 요나단보다는 더 좋은 임금 감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합니다(행 13:22). 하지만 아버지인 사울은 바로 이 점에서 다윗을 시기합니다. 나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 나보다 백성들에게 더 인기가 좋은 사람, 나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한 것입니다. 게다가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향해 이스라엘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할 때(삼상 18:7) 사울의 질투가 극에 달해 결국 그 마음을 악신이 지배하여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18:10).

우리 주변에 보면 윗사람보다 아랫사람이 더 능력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윗사람이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랫사람이 능력을 더 잘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적절한 책임을 맡깁니다. 대범하게 그 사람의 능력을 수용하고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윗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랫사람보다 더 능력이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리더십은 내가 아랫사람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고 격려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도록 돕는 데서 나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훌륭한 야구선수나 축구선수가 다 훌륭한 감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훌륭한 스타플레이어가 나중에 감독으로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선수 때는 정말 별 볼일 없었는데 나중에 명장의 반열에 오르는 감독들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바로 방금 말씀드린 대로 좋은 지도자는 나보다 더 능력 있는 아랫사람을 더 세워주고 그 능력을 극대화 하도록 돕는 능력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랫사람은 아니지만 친구의 능력을 알아보고 인정해주고 세워주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요나단입니다. 그는 마치 마가복음 1장 7절서 세례 요한이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말한 것처럼 나보다 능력 많은 친구를 알아보고 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물려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아버지 사울은 아랫사람을 세워주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능력을 시기하고 그가 누린 인기를 질투해서 다윗을 매장시키고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을 높이 사 사위로 삼기도 했지만 권력 앞에서는 사위도 아들도 필요 없게 됩니다. 이 점에서 아버지 사울과 아들 요나단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신이 물려받아야 할 왕위를 다윗에게 물려준 요나단의 태도는 정말 귀한 것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이 둘 사이의 우정은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요나단은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다윗을 제거하려 들었을 것입니다. 사울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과 이익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인 반면, 요나단은 친구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보고 그래서 그 친구를 세워주고 희생하며 기꺼이 자기의 권리를 양보한 위대한 조연배우입니다.

삼하 1:19~27에 보면 다윗이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어 부른 ‘활 노래’가 나옵니다. 이 활 노래가 얼마나 애절한지 보는 사람들은 모두 이 두 사람의 진정한 우정 앞에 숙연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활 노래’를 보면 ‘백아절현’(伯牙絶絃) 혹은 ‘지음’(知音)이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릅니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보면 춘추전국시대 사람 백아와 그 친구 종자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아는 거문고의 달인이었는데 이 종자기라는 친구야말로 자신의 음악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종자기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백아는 너무나도 슬픈 나머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거문고 줄을 스스로 끊어 버리고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거문고 줄을 끊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소리를 알아준다’는 뜻으로 ‘지음’(知音)이라는 말도 나온 것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친구를 사귀었다가 너무도 쉽게 배신하는 이 사회에서 백아와 종자기, 요나단과 다윗의 이야기는 진실한 우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줍니다. 서로의 깊은 속마음까지 알아주고 그 능력을 인정해주는 우정입니다. 이 중에서도 요나단은 이 강퍅하고 냉랭한 시대에,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구도 버리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친구의 모습, 친구의 능력을 살려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은 조연배우가 되어 뒤로 물러갈 줄 아는 모습을 보여주는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지켜진 약속

이렇게 훌륭한 친구를 둔 다윗은 또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을 보려면 그 친구들을 먼저 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렇게 훌륭한 친구를 둔 다윗도 이 우정을 끝까지 지킵니다. 오늘 본문14~15절에서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왕이 되거든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기 자손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약속은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다시 확인됩니다(20:42, 23:14 이하).

이제 세월은 흘러 정말로 이 두 사람의 상황이 역전됩니다.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아들 요나단과 함께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고 그 가문은 파멸을 맞게 되고 쫓기던 다윗은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런데 요나단에게는 므비보셋이라는 아들이 있었지요. 사무엘하 4장 4절에 보면 이 므비보셋은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장애자가 됩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유모가 다섯 살 난 므비보셋을 안고 도망가다가 그만 아이를 떨어뜨려 다리를 절게 된 것입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하루아침에 부모와 가정을 잃고 장애까지 입는 이중 삼중의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후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킵니다. 사무엘하 9장에 보면 다윗은 사울의 사환 시바에서 므비보셋을 봉양케 하고 므비보셋에게는 왕자들처럼 왕의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는 특권을 줍니다. 그 친구에 그 친구입니다. 훌륭한 친구를 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은 친구를 보면 압니다. 나아가 그 사람의 신앙도 그가 사귀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어진 약속은 지켜졌고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그 후손인 므비보셋을 통해 영원히 남게 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의 참 친구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친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러분에게는 과연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있다면 몇 명이나 있습니까? 그 가운데 이 요나단과 다윗 같은 참된 친구가 있습니까?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좋은 친구라도 너무 믿지는 마세요. 결국 그 친구도 사람인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이란 아무리 선하고 신실해도 어쩔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어떨 때는 돌아설 수도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나에게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참 친구가 있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15장 12~15절을 찾아 읽읍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마치 요나단 같은 우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요나단보다 더 좋은 친구, 더 귀한 친구가 있으니 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15절 말씀처럼 우리는 그 분의 종이지만 그 분은 더 이상 우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 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 세상에 주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친구는 결코 없습니다. 주님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알고 내 아픔과 문제를 함께 아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 어떤 친구가 되어야 할까요? 바로 요나단 같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친구를 세워주고 친구를 위해 기꺼이 나는 사라지고 물러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실은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나 자신을 더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요나단처럼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사라지고 주님만 드러나게 하옵소서!” “내 모습 내 이름은 십자가 뒤에 감추어 주옵시고 나를 위해 생명 버리신 주님 영광만 드러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친구 되신 주님에 대한 진정한 우정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태도입니다. 위대한 조연배우의 모습입니다. 아무쪼록 요나단의 신앙과 우정을 본받아 내 주님을 더욱 드러내고 주님의 영광을 더 빛나게 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설교 :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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