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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28) "탕자를 안고 입을 맞춘 아버지의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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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들 중의 하나가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탕자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탕자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둘째 아들이란 말만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눅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부릅니다. 영어로는 prodigal son 이라고 합니다. 허랑방탕한 못된 자식이란 말입니다. 탕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죄인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키고 탕자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못된 죄인을 가리킵니다. 믿음을 저버린 배신자를 가리키고 사랑을 저버린 반역자를 가리키며 하늘의 소망을 저버린 세상에 속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역사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패역한 이스라엘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이방인들과 이교도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공산주의자들과 모슬렘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벧엘을 떠나 세겜에 가서 살던 야곱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주일날 하나님의 집을 떠나 이곳 저곳으로 여행 다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품을 떠난 못된 자식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를 묵살하지 않고 재산과 살림을 나누어 주며 집을 떠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눅15:12,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 먹지 못하도록 쇠 사슬로 묶어두시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다윗으로 하여금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지 못하도록 쇠 사슬로 묶어두시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둘째 아들로 하여금 집을 떠나지 못하도록 재산도 살림도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쇠 사슬로 집에 묶어두시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짐승으로 취급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로버트나 컴퓨터로 취급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지정의와 인격을 가진 하나님 비슷한 영물로 취급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 비슷한 영물로 지어놓으시고는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의도대로 제대로 선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는 후회하시고 근심하시기는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6:5,6).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아시고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근심하시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쇠사슬로 묶어두시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해 두시는 것은 사람들을 너무 귀하게 여기시고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며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탕자가 재산과 살림을 모아 가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도록 허용하셨다는 대목에서 둘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랑을 엿보게 됩니다. 집을 떠나는 둘째 아들을 바라보면서 저것이 언제나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겠는가 라고 탄식하는 아버지의 슬픈 사랑을 엿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타락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시고 인격적인 존재로 취급하시는 대목에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슬픈 사랑을 엿보게 됩니다.

  둘째 아버지는 둘째 아들로 하여금 타향에서 흉년과 궁핍과 주려죽게 됨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15:14-17). 우리는 흉년과 궁핍과 주려서 죽게 되는 일이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것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종신토록 수고하게 된 것도, 땅이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낸 것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서 일어난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그렇게도 많은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된 것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서 일어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타향에서 흉년과 궁핍과 주려죽게 되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된 것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의 손 안에서 일어난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 까요? 탕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지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원점으로 돌아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흉년과 주림의 고통을 당했을 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리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17)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He came to his senses. 그가 자기 자신의 정신으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난과 고통을 당할 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제 정신으로 돌아옵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심어주신 영성을 사모하는 회귀본능이 발동하게 됩니다. 그 다음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니라”(20). He came to his father. 그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고 그리고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고난과 고통은 죄인들로 하여금 원점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심어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회귀본능이 발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그러므로 둘째 아들에게 임한 흉년과 궁핍과 주려 죽게 됨은 둘째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가슴 아픈 사랑의 표시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셋째 아버지는 달려가서 돌아온 둘째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 아버지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보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돌아온 탕자를 탓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드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탕자의 못된 짓들은 탓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무조건 돌아온 아들을 받아드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둘째 아들의 지난날의 잘못들을 보기보다는 그가 당한 모든 고난과 고통의 자국만 보는 아비의 측은한 사랑을 나타내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여기 측은한 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compassionate 란 말인데 긍휼과 불쌍히 여김이 충만하다는 말입니다. 물 끓듯이 끓는 아비의 격렬한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사실 탕자는 아버지의 용서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패역자였습니다. 맏아들의 말대로 아버지의 재산과 살림을 모두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패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의 패역을 탓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시지 않고 그저 돌아온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면서 울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순되는 용서의 사랑입니다.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종류의 죄인을 받아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모순되는 측은한 (compassionate) 용서의 사랑입니다. 탕자가 한 것은 뉘우치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것뿐이었습니다. 탕자의 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여기에 탕자의 회개의 고백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세로 회개하는 모든 죄인을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주일날 교회를 떠나 이곳 저곳으로 여행하며 돌아다니다가 교회로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의 잘못을 탓하거나 책망하는 대신 그저 그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십니다. 이것이 못된 자식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측은한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 주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고 발에 신을 신겨주었습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이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특별 대우였습니다. 의의 옷을 입혀주었다는 말이고, 영광스런 지위를 주었다는 말이고, 평안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며 잔치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축하연을 베풀고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모두 함께 즐거워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돌아온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측은한 사랑이었습니다. 죄인인 한 여인이 주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씻었을 때 주님과 하늘의 천사들이 함께 기뻐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의 죄를 고백했을 때 주님의 하늘의 천사들이 모두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돌아온 탕자에 대한 하나님의 측은한(compassionate) 사랑입니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뉘우치면서 돌아와야 합니다. 뉘우침이나 돌아옴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측은한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 일년 동안 여러분들에게 회개를 죽을 때까지 힘쓰자고 거듭해서 말씀 드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격과 삶이 변화되지 않았다고 너무 부담을 가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선 회개부터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측은한 사랑이 임합니다. 그러면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되고 그러면 인격도 삶도 조금씩 변화하게 됩니다.

  또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둘째 아들에게 베푼 아버지의 측은한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긴 맏아들처럼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실이 못된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비판을 서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교제하시는 것을 보고 못마땅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비판적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맏아들이 범한 잘못을 거듭해서 범할 수가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과 모슬렘은 모두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소리 지르며 너무 성급하게 분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어제 아침 어느 곳에서 교계 지도자들 100여명이 나라를 위한 시청 앞 기도회 준비모임을 가졌는데 그곳에 모였던 여러 사람들이 미국의 북한 선제공격을 지원하는듯한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뉴스파워 신문 보도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최성규 목사는 북의 핵실험 즉각 중지, 미국의 선제공격을 막고, 한국정부의 북핵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취하라는 내용을 담은 성명서 초안을 보이며 참석자들의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같은 성명서 내용에 대해 ‘미국의 북한 선제공격은 우리가 관여할 부분 아니다,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면 성명서가 무슨 의미가 있나’, ‘마귀 집단인 김정일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반드시 실어야 한다’는 등 북한에 대해 더 단호하고 강력한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저는 미국의 선제공격을 동의하는 듯한 이와 같은 발언이 맏아들의 발언보다 더 심한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를 안고 입을 맞추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고요히 바라보면서 그 지극한 측은한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고요히 묵상해 보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누가 탕자입니까? 사실은 제가 탕자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적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탕자와 같은 나를 그저 받아주시고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영광스런 직분을 맡겨 주시고 평강과 은혜와 기쁨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하나님의 측은한 사랑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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