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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어 있으라 (마 2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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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종말에 대한 가르침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을 학자들은 작은 계시록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이 말씀은 계시록에 기록된 종말에 관한 해석에 대해서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에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깨어 있으라 하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의 반대말은 잠자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말세 사람들은 영적으로 볼 때 잠을 자고 있는데 너희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많습니다. 주님은 도적과 같이 사람들이 잠을 자고 있는 밤에 오는데 이 때 깨어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잠을 자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실제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보화 시대에 남보다 앞선 감각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나는 잠을 잔다는 것과는 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앞선 정보를 가졌다는 것을 경기하는 정보 경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깨어 있는 삶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잠자는 것인가를 알아야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깨어 있다는 말을 이해할 때 잠자리에서 벗어난 상황을 생각하게 됩니다. 무지에서 깨어났다고 말할 때는 알지 못하는 상태를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성도가 깨어 있다는 말은 영적으로 잠자는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세에 현상을 한 예로 노아 시대의 홍수 사건을 말씀하셨습니다. 노아가 배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에 전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홍수가 나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노아 홍수 시대의 사람들은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잠자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인 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1.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인 잠을 자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말세의 현상 가운데 노아 시대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말씀을 다 준행하였더라 하는 것이 그 시대 사람들과 비교되는 삶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있었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빠져서 홍수가 심판이 시작되는 순간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보여주시는 교훈은 영적으로 잠을 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던 시대에 노아의 가정은 깨어 있었습니다. 그 깨어 있는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영적 어둠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란 열어서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삶은 영적으로 보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에게 문제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에 졸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둔감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모든 삶을 말씀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하고 말씀 안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노아가 그 시대의 사람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한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이 바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말씀이 없는 바로 방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삶이 바로 방황인 것입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방황은 바로 말씀을 떠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그 백성을 인도하는 길이며 빛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말씀이 바로 길입니다. 말씀이 바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가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말씀 안에 있을 때 가장 평안하고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설계도였습니다. 바로 그 방주가 노아의 가정을 지킨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면 말씀을 우리에게 축복이 되고 보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서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종말 시대에 주님의 지키심을 받을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2. 세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잠을 자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것은 이 세대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세에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대략 6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될 것이다. 둘째 난리와 난리 소문이 무성할 것이다. 셋째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간에 싸움이 치열할 것이다. 넷째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 다섯째 사랑이 식고 사람들이 반목과 갈등으로 서로 대립할 것이다. 여섯째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

성도는 세상을 볼 때 반드시 종말론적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말론적 관점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종말이라고 말할 때 무조건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진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세대를 느끼는 깨달음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먼저 종말이 가까우면 자연 재해들이 지금까지보다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 중에서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쉽게 알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말세를 아는 중요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지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장면이 성경에 많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을 때 온 산이 크게 진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라와 그 추종자들이 모세를 배반하고 반항할 때에 땅이 입을 열어서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과 그들을 땅이 삼킨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는 일이 있어났다고 했고 예수님의 부활 때에도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땅의 울림을 통해 자신의 뜻을 나타내실 때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구는 12개의 지각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판들은 계속 이동하면서 판사이의 단층선에서 서로 충돌한다고 합니다. 그 때 한쪽판이 다른 한쪽판 아래로 꺼지거나 위로 치솟아 오르게 되는데 그는 충돌의 충격으로 지진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전 세계는 지각판의 이동과 함께 지진대에 걸쳐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인 것입니다. 이것이 부딛치는 자리가 바로 지진 발생지점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 해일도 바다 가운데서 일어난 지진이 해일을 일으켜서 역사 이래로 찾아보기 힘들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단 몇 초 동안 일어난 지진으로 약 20만명이 죽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지진에 관한 한 가장 많은 준비를 하고 있는 일본도 고베 지진은 가장 첨단 시설도 지진 앞에서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일본은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지진 피해를 보고 비판을 한 후 자신들은 20초 동안 발생한 지진으로 인하여 사망자 6,308명이나 되었고 이재민은 30만명이 넘었고 5만 채의 건물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자연 재해는 어느 시대나 있어왔지만 그러나 종말에 나타나는 자연 재해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해서 가르침이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종말을 가르쳐 주셨지만 자연을 통해서도 종말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특별 계시를 통해서도 그 뜻을 나타내시지마는 자연 계시를 통해서도 그 뜻을 나타내심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3. 자기가 하는 일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영적 잠을 자는 사람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사고 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시집가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영적으로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허나 노아와 그 여덟 식구는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심판 받을 사람과 구원을 받을 사람의 차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을 향해서 욕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의 눈에 비늘이 벗겨지기까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주님을 대적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열심을 다해서 성도를 잡아 주는 일에 빠졌던 사람입니다. 열심히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실체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악할수록 자기를 알지 못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이 더 똑똑 한척 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게 됩니다. (잠 26:16)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 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지혜로운 척 하는 것입니다.

스쿠루지 영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스쿠루지 영감은 돈 밖에 모르는 구두쇠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어리석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쓰쿠루지 영감은 죽은 친구인 마레의 유령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 몸에 쇠사슬을 묶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사슬이 바로 욕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유령은 스쿠루지 영감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됩니다. 너무도 가난해서 꺼져가는 불 앞에서 책을 읽고 있는 불쌍한 옛날의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인생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에게 속지 않도록 거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 잠을 잘 때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다스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물쇠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종들을 많이 세워 두라고도 말씀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인생은 자신만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조병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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