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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가르침과 영성 (삼상 2:18-26) -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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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늦게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덟 살 된 딸이 잠들어야 할 시간인데도 자지 않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니까 저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 표정이더니 드디어 무거운 입술을 엽니다. “아빠 오늘 속상한 일이 있었어!” 라고 말하는 딸의 표정 속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속상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니?” 반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가 나하고는 상의하지 않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쓰레기인 줄 알고 갖다 버렸어! 친구 한테 받은 선물인데......”

저는 표정이 심각한 아이의 얼굴을 보며 “너 참 속상했겠구나!” 그랬더니 아이가 눈물을 확 쏟았습니다. 친구한테 받은 야광링인데, 너무 낡아서 쓰레기와 마찬가지인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친구에게 받은 소중한 물건이었던 모양이었는지 그 마음속에 속상한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사과받고 본인도 사과하고 했지만 그럼에도 잠이 안와서 저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여러 가지 물건을 보여주며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것이라고 말을 해 주지만 제가 보기에는 쓰레기죠.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다 사연이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아빠도 포기해본 적이 있어?” 라고 말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니까 이 아이는 제가 말을 못 알아 들은 줄로 알고 다시 “아빠도 아빠 엄마인 할머니 하고 있으면서 포기 해 본적이 있어?” 라고 물어봅니다. 가슴이 섬짓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현아, 아빠도 포기해 본 적이 많아, 그때는 물론 마음이 몹시 아프지. 너도 오늘 마음이 많이 아팠겠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엄마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게 되고 또 엄마가 지현이의 아픈 마음을 알았으니까 아마도 더 좋은 것으로 너에게 줄 거야.”라고 말하니 이 아이가 자기 방에서 자지 않고 제 주위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 하게 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이 일을 통해서 엄마와 상의하며 자기 물건을 다루는 법, 또 그 아이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엄마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좋은 것을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제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로 제가 원치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이 아이가 배우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쳐야 할 것과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 놓은 것과 관계없이 이 아이는 제 삶을 보고 배우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먼 인생의 여정을 걸어갈 때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해야 하며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지 등에 대한 가치관을 저와 제 아내의 삶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과정에 있음을 말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지금 갑자기 돌출된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부모님과 선생님 등을 통해서 배워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그 과정을 통해 선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아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가끔 보면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불행과 분란 분쟁을 일으키고  불평과 원망하는 부정적인 운전자가 그 마음속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속에 그 운전자가 있으니 본인도 괴롭지만 그 것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는 부모님이 가르쳐 주신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부모가 실수한 것까지도 배웠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우리가 가르치기를 원치 아니하는 삶의 모습까지도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선생이 되어있고, 등대와 나침반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중학생이 자기의 아버지를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술먹고 들어와서 집에서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를 두들겨 패는 것을 보고 자란 이 아이가 방어차원에서 저질렀다고 해서 경찰은 용서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두들겨 패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성질대로 행동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아이는 본의 아니게 자기 아버지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경찰은 그 아이를 용서했지만, 아마도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는 그 사실은 그 아이 본인에게 큰 상처로 남아서 평생 그 상처와 아픔가운데서 일평생을 살아가게 될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부모가 물려준 잘못된 상처 때문에 나도 원치 않는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괴로워하면서도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여러분의 그런 인생을 여러분의 자녀에게 물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분가지신 분들,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장로란 이렇게 하는구나, 목사란 이렇게 하는구나를 배우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묻지 않겠어요? 그만한 직분을 주셨으면 그만한 책임도 묻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는 그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는 데요” 라고 말해도 그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부정적이고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 나도 싫어서 저주스러운 그것까지도 나의 자식에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들에게 나도 모르게 가르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일평생 나의 자식을 불행하게, 나의 이웃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피해자면서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술먹고 두들겨 팬 그 아버지는 자기 나름의 괴로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괴로운 대로 말입니다. 그것이 불행의 또 다른 씨앗을 만든다는 사실은 그는 알고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정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두 결과의 종말을 보게 됩니다. 한 가정은 엘리라는 제사장의 가정으로 이스라엘의 명문가정입니다. 제사장 가정으로서 온갖 영적인 공급과 육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에서 자란 홉니와 비느하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불행한 인생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제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성전에서 수종 드는 여인과 동침을 합니다. 나중에는 법궤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몰라서 전쟁터에 무기로 가지고 갔다가 빼앗기며 동시에 한날에 두 형제가 죽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그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이 가정에서 떠났다’는 뜻으로 짓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우리는 한 가정의 종말, 나아가 한 민족의 종말을 이 사건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것은 엘리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내가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정은 한나의 가정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괴로운 한 여인, 그 여인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으로 인해 구별된 삶은 사무엘이라는 자식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시대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큰 역사적인 시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결단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영향력을 준 인물입니다. 동시에 다윗이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발굴해서 키워내는 선지자로 세워졌습니다. 그의 그런 삶은 바로 한나에게서 시작됩니다.

자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나도 모르게 선생이 되어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자녀들이 저를 보고 배웁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 엘리와 한나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보아야 합니다. 그 두 인생의 결과의 차이를 그 자손을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삶이 내 삶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이 두 사람의 차이를 통해서 배워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들의 가장 중요한 것은 분별력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분별력이라는 것은 영적 감수성을 말합니다. 선생, 즉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분별력입니다. 분별력은, 때를 잘 분별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야할 때와 들어가야 할 때, 말해야 될 때와 침묵할 때,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웃어야 할 때와 울어야 할 때들을 잘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울어야 될 때에 웃고, 나가야 할 때 들어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붙잡아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 사랑해야 할 것과 미워해야 할 것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미워해야 할 것을 붙들고, 버려야 할 것을 붙듦으로써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해서 불행한 인생이 너무 많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분별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분별하지 못할 때 우리는 때에 맞지 않는 일, 때에 맞지 않은 생각과 때에 맞지 않은 행동을 갖게 됩니다.

엘리를 한 번 보십시오. 엘리의 아내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도 홉니와 비느하스는 엄마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 없는 자녀를 보는 엘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그 아이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사랑할 줄은 알았지만 분별력 있는 사랑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자녀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은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서 무엇을 가르쳐야 했는지를 그는 몰랐던 것입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맞은 것은 맞다는 것을 분별해서 가르쳐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삶이 게으르고 나태하며 분별력이 없습니다. 제사나 지내주고 백성들 오면 재판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아이들이 다 배워버렸습니다. 정말 이 아이를 가르쳐야 될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부모 품을 떠난 자녀는 아버지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 줄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제물로 가져온 고기를 함부로 건져 먹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과 동침해서 백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그 상황에서도 주변이 시끄러우니까 하지말라 라고 말하는데 그칩니다.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력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한나는 어떠했습니까? 자녀가 없을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하며 그 서원을 갚는 가를 보십시오. 자식을 주면 평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고 그는 서원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서원입니까? 품안의 자식은 떠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이 아이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도록 제가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결단을 한 것입니다.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가야하는데, 그녀는 남편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품안에서 가르칠 수 있을 때 그 아이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우리 자매들 보십시오. 아이를 낳으면 돈 벌어야 된다고 아이를 맡겨놓고 다니다가 아이가 적당히 자라면 그제야 아이 뒷바라지 한다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이의 기본적인 인격은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다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 이후에는 엄마는 그다지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있어야 될 때와 없어도 될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자기 품안에 있을 때에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 주고 젖을 떼어도 되는 최소한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데리고 갑니다. 주의 성전에 맡깁니다. 세 네 살 밖에 되지 않은 자녀가 얼마나 눈에 그려지겠습니까? 그러나 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우선순위로 드려지기를 바라며 철저히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합니다. 그가 정말 분별력 있는 여인임을 이 대목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부모가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술 먹고 집에 와서 폭력을 행사하면 자녀가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자기는 도둑질 하면서 자녀에게 도둑질하지 말아라 라고 하면 누가 듣겠습니까? 새벽기도 실컷 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남의 밭에서 호박 따서 된장찌개 끓여 먹으면서 누구를 가르칠 수 있습니까? 그런 신앙생활은 이제 버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말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자녀가 내 품을 떠나서도 그 아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힘들고 어렵다고 나를 내팽개치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자녀가 그것을 배우지 않겠습니까? 고난과 역경이 있을 때 기도하는 부모를 보면 그 아이는 같은 상황에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말로만 이거 배우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번 장로 투표할 때도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 장로라는 직분이 참 존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이 장로라는 직분은 영적으로 보면 지도자이지만 육적으로는 머슴입니다. 저와 같은 멍에를 메야 합니다. 장로라는 직분이 그 사람의 신앙의 연륜이 깊어서 ‘장로님’이란 호칭으로 올려드리고 높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저 정도의 연륜이 되었으니까 어렵고 힘든 때가 와도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쓸만하겠다, 시간을 투자하겠다,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할 만하겠다 라고 인정되었을 때 세워드리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은 앉아서 결제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장로들의 우선순위입니다.  존경을 받는 자리에 있다거나 높임을 받는 위치다 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영적으로 세워져 있는 분들을 우리가 세워야 합니다.

교인들이 보지 못하는 영적인 상황들을 보고 분별해서 깨어 기도해야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분들을 지도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국교회의 장로상이 잘못되었습니다. 정말 한국교회가 이제는 목사나 장로들의 문제 때문에 교인들 가슴에 멍 드는 일은 없어야 되겠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교회가 우리교회가 되지 않아야겠냐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가장 두려운 존재가 청년들입니다. 우리교회 성도의 20-30%가 청년입니다. 이런 교회가 없습니다. 저는 이 많은 청년을 우리교회에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시킬까? 라고 날마다 고민을 합니다. 저는 4부예배를 함께 드리며 운적도 있습니다. 나는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 목회사역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장로를 세울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목사를 견제하는 것이 장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 동역자인데 말입니다. 같이 동역하며 성도들을 섬겨야 하는 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장로가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장로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주일마다 헌신하고 봉사할 각오로 섬기는 자리로서 장로 직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분별력을 잃어버린 자가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그런 모습을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은 나의 자녀들이 보면서 그들도 패망의 길로 걸어가게 될 수 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남에게 지금도 영향력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영향력을 주고 싶은 사람은 분별하십시오. 영적인 분별력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상처와 아픔을 자녀들을 비롯한 여러 주위 사람들에게 막 나눠줄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떠한 영향력을 주고 있는 사람인지 깨어서 다시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의 모습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가르치는 자,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자에게는 삶의 자리가 참 중요합니다.

엘리의 삶의 자리를 보면 성전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처소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성전에 누웠다라고 되어 있지만 엘리는 자기 처소에 누워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에 관한 본문을 읽다보면 그는 자기자리에 앉았더라 란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제사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섬기는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자리이며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처소에 누워있는데다가 자기자리에, 즉 교만한 자리에 앉아만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자리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우리는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자녀와 이웃과 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지 나를 주장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공무원, 정치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만 있는다면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한나의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그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고통이 있었을 때 원망하는 자리로, 낙심하는 자리로 갈 수 있었지만 그는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기 자녀 앞에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도록 결단하게 하는 하나님 앞으로 그는 나아갑니다.

사무엘은 나중에 어떻게 불리우게 됩니까? 모든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기도를 누구에게 배웠을까요? 자기의 어머니에게 배웠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기도는 가르쳐지지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훈련되지 않으면 기도의 자리로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나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가르친 그녀의 자녀 사무엘은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섰고 영적인 하나님의 역사의 무대에 정말 존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죽는 비참한 결말을 맞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멸망이 곧 민족과 나라의 멸망으로 직결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시작이 무엇입니까? 바로 엘리의 자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권위의 소리, 자기 내면의 아집의 소리, 기득권의 소리를 듣고 앉아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 머뭇거리면 우리 자녀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 바로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에 있었다면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워질 때까지 내몰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 이렇게 되지 않았단 말입니다. 요즘 어떻습니까? 앞뒤가 있습니까? 높낮이가 있습니까? 선후배가 있습니까? 어른이 있고 아이가 있습니까? 엉망입니다. 가치관이 혼란 속에서 각자 사람들이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나의 자리가 어디인지 보셔야 합니다.

이 엘리의 자리는 정말 존귀한 자리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지만 고통의 자리가 되었고, 한나의 자리는 고통의 자리였지만 축복의 자리로 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직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가 저주의 자리가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오히려 고통의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자리가 존귀한 자리입니다. 오늘 자녀들에게 나는 어떤 삶의 자리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로 좋은 영향력을 가진 삶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비전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지도자는 비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는 자기 자녀들에게 비전을 주지 못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엘리의 자녀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인 엘리는 우리말로 바꿔 남사스럽다라고 말하는데 그칩니다. 너의 그런 행동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집안 망신을 시키는데 그런 일 하지말라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비전을 주는 말이 아닙니다. 기준이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더 높아질까라고 하는 생각은 부모의 비전이 아닙니다.

정태기 박사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장로님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그 장로님에게 자녀가 있었습니다. 여자아이였습니다. 그 장로님은 그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그 아이 머리맡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서 이화여대에 가게 해 주시고, 서울 의대를 가게 해 주시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기대만큼 따라가지 못하니까 내면속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은 욕망을 심어준 결과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심어 준 것입니다. 비전이 아닙니다.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여러분, 한나를 보십시오. 한나는 어떻게 했습니까?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 겉옷을 지어서 갖다 줬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 옷은 백화점에서 사는 옷이 아닙니다. 직접 지은 옷입니다. 그 옷을 기우면서 어떤 기대를 가지게 될까요? 팔을 기우면서 ‘맘에 안드는 아이는 이 팔로 때려서 승리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이 팔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의 팔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가슴을 기울때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등을 기울때는 ‘주님의 사명을 지고 가는 씩씩한 아이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을까요? 그 아이와 떨어져 있었지만, 매년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 옷을 지어 주면서 그 아이에 대한 비전과 꿈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가 자녀를 위해 하는 기도를 돌아봅시다. 잘 살게 해주시고, 부자되게 해주시라는 기도를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나는 사무엘에게 에봇을 입혔다고 나와 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그녀는 그 옷을 아들에게 입히며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라는 꿈을 심어 준 것입니다. 비전이 있는 백성은 방자히 행하지 않습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상처에 연연 해 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맺힌 사람들이 정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한 맺힌 사람이 정치를 하면 꼭 한풀이를 합니다. 그러나 다윗과 함께 아둘람 굴에 모였던 400명의 사람들, 그 빚지고 억울한 일을 당했던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아파보았기 때문에 아픈 백성을 위해 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외로운 굴속에서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다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라는 그 비전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새벽을 깨우리라는 민족을 향한 소명을 가지고 노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에 한풀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워보았기 때문에 어려운 백성들을 잘 돌아보아 주었던 다윗왕조는 튼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은 다 그편에 붙었지만, 이 400명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붙든 하나님의 종 다윗을 끝까지 보필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보시고 아름다운 주님의 왕조를 닦아주셨습니다.

요셉이 형님 손에 팔렸어도 원망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습니다. 여자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갔어도 좌절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에겐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녀들에게 꿈을 주십시오. 우리 교회는 한국 교회에 어떤 꿈을 주고 있습니까? 장로님들은 성도들에게 어떤 꿈을 주고 있습니까?. 중직자들, 목회자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 우리 개인의 삶을 통해서 자녀에게 무슨 꿈을 주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 비전을 가지고 아이를 위해서 그 비전을 심어주었던 어머니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교회는 청년들에게 비전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같이 좋은 교회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유아실이 비좁아서 힘이 들지만 다른 교회는 아이우는 소리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교회가 많이 있습니다. 청년이 없어서 고민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이 많은 청년들이 주어졌는데, 그들에게 어떤 비전을 주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 서로서로에게 격려와 비전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이야기를 끝으로 메시지를 마치려고 합니다. 조선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중랑구 면동 초등학교로 성덕여상 2학년 조우현양의 이야기 입니다. 이 아이가 이번 스승의 날 선생님을 찾아간 이야기가 기사화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천호초등학교에 있을 때에 이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김신혜 선생님입니다. 김선생님이 조우현양을 처음 보았을 때 이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있고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를 자세히 관찰해 보니 이 아이의 부모는 가출해서 없고 할머니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기도 없고 영 엉망이었습니다. 이 선생님은 이아이의 엄마가 되기로 했습니다. 용돈을 주기도 하고 야단도 쳤습니다. 군것질도 같이 하는 등 엄마의 사랑을 선생님이 주었던 것 입니다. 이 아이속에 용기가 살아났습니다. 꿈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소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가 이번에 선생님을 찾아 왔을 때에 전교 1등을 하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를 가느라 실업계 고등학교를 간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어려울 때마다 5학년때 선생님이 써준 쪽지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 쪽지에는 “선생님은 우현이를 걱정하지 않아, 네게는 네 스스로 발전시킬 지혜가 있어. 선생님은 믿어”라고 적혀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꿈을 심어 준 것입니다. 이 어려운 환경이 그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꿈이 그 아이를 지배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 세상의 썩어질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꾸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교회에 꿈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1907년도에 한국 교회에 일어났던 그 변화가 우리 교회를 통해 오늘 날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요즘 국적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저도 한국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하나님의 꿈이 있습니다. 무너져가는 나라, 이 조그만 나라를 세계 무역 10대국으로 발전시켜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다시 노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외에는 꾸지 못하는 꿈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이 우리 민족을 통해서 전 세계로 흩어져 나가고 분단된 아픔이 있을지라도 아픔이 있기에 더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것처럼 기도하는 그 간절했던 그 열망의 자리로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이 여러분에게 결례가 되는 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잘못이 반복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력을 가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영적인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의 자리가 낙담하는 자리요, 절망하는 자리여서는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도 소망을 노래 할 수 있고 기쁨을 노래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나아갑시다. 비전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에게 물질을 물려주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전을 물려줘야 합니다. 그런 자녀는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물려주는 동안교회, 그리고 여러 성도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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