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부주일] 아내들아, 남편들아 (골 3:18-19) - 가정

  • 잡초 잡초
  • 541
  • 0

첨부 1


제가 작년 언젠가 제 어머니와 교회 집사님들 몇 분과 함께 우리 교회의 방 모 집사님께서 경영하시는 백 무슨 식당에가서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 방 집사님 내외분께서도 함께 자리를 하시고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방 집사님의 부인께서 갑자기 ‘자기 남편이 여복이 있다’는 말을 꺼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알기로 방 집사님은 분명히 일부일처이신 분이니, 그 남편이 여복이 있다는 말은 결국 그 부인 집사님의 자기자랑인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거 뭔가 심상치 않은 말이 나오겠구나.’하는 예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때부터 그 부인 집사님께서 자기 남편에 대하여 온갖 흉을 보기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남편 방 집사님의 반응이었습니다.
저는 방 집사님이 혹시 역정을 내지 않을까 하고 내심 조바심을 가지고 흘낏흘낏 곁눈질을 해 보고 있었는데, 이 분은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그냥 점잖게 싱긋이 웃음만 짓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 집사님 정도의 세대에서는 아내가 자기 남편을 남 앞에서 흉을 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그런 아내를 보면서도 아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로 저는 알고 있었는데, 그 두 분 다 저를 놀라게 만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방 집사님 부인께서 점점 더 신이 나서 당신네들 결혼할 무렵의 남편 흉을 보기 시작할 때 즈음에, 갑자기 방 집사님 본인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물뿌리개를 들고 그 근처에 있던 화초에 물을 주기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참 엉뚱한 행동이지요.
아니 그런 자리에서 갑자기 화초 물 줄 생각이 왜 나는 것입니까?
지금 자기 아내가 목사와 다른 여 집사들 앞에서 뭐, 자기 남편이 못 생겼다는 데부터 시작해서, 다 늙은 총각한테 내가 왜 시집 왔는지 모르겠다, 매력이라고는 빵점이다, 아내에 대한 애정 표현이 너무나도 결핍된 남자다 등등, 있는 흉 없는 흉을 한 30여분 동안 열을 올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방 집사님은 말소리가 뻔히 다 들리는 약 5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도 듣고 있는지 안 듣는지, 그저 당신 혼자서 입가에 묘한 미소만 띄우시면서, 태연자약하게 화초에 물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마치 ‘당신이 아무리 지금 와서 떠들고 후회해 봤자 이미 당신은 내 사람이야. 이미 날개옷 빼앗기고 평생 나랑 같이 살아야 할 선녀야.’라고 속으로 말씀하시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방 집사님의 그 여유 있는 모습에 ‘과연 사내대장부가 저래야지.’하고 속으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습니다.
정말 예수 잘 믿는 부부의 행복하기 그지없는, 정말 부러운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까운 것이 부부이지만, 그러면서도 ‘돌아서면 한 순간에 남남’이 될 수 있는 것이 또한 부부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는 어린이 주일, 어버지 주일을 지켰고 또 영적으로 한 가족된 세계 선교지의 동역자들과 교우들을 기억하는 주일도 지켰습니다.
하지만 가족이라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역시 부부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신 말씀을 가지고 신자 부부들이 서로 아내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지켜야 할 대의와 도리를 함께 상고함으로써, 이 소중한 가정의 기반을 더욱 든든히 다지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아내가 꼭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남편을 ‘주 안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18절에 기록하기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복종하라”는 말은 나중에 20절의 자식에 대한 말씀에서 나오는 “순종하라”는 말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써, ‘어떤 권위에 따르라’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 여러 곳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로,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으며,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여자가 먼저 범죄하였으며, 여자는 남자보다 더 연약한 그릇이며,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정하신 까닭에, 남편에게는 가정의 제사장으로서의 ‘영적 권위’라는 것이 주어졌습니다.
즉 이 복종의 의미는 종이나 심부름꾼 같은 의미에서의 종속을 두고 한 말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세워 놓으신 가정의 영적 질서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고 간단하면서도 아주 강력하게 그 복종의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왜 그처럼 아내에게만 일방적으로 복종하라고 말씀하는지 무슨 자세한 이유라도 제시해 줄 법한데도 그것이 아니라, 항의는커녕 아예 무슨 이의조차도 감히 함부로 제기하지 못하도록 “이것은 주안에서 마땅히 아내가 지켜야 할 자세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즉 적어도 예수 믿는 아내라면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따라야 할 명령이라고, 아예 주님의 이름으로 못 박아 단정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내는 마땅히 남편의 영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라는 명령에는 무슨 복잡한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만들어 놓으신 부부의 창조원리에 따른 것이요, 아내 쪽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본연의 자세이며 윤리일 뿐인 것입니다.

저는 남자이고 남편이기 때문에 사실상 여자가 아내로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갈등이 어떤 것인지를 상세하게 이해하고 조언해 줄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바르고 행복한 부부 관계를 누리고자 하는 아내들에게 다른 그 어떤 더 실제적이고 유용해 보이는 조언들을 마다하고, 그저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한 마디 조언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복종하라’는 말은 부부관계에서 뿐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남에게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유독 이 한 마디 말씀만으로 아내 된 성도들에게 부부생활의 카운슬링을 해 주신다면 이 명령 역시 분명히 소중한 진리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즉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말씀은 남편이 아내를 억압하기 위하여 스스로 지어낸 말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정말 누구라도 펄쩍 뛰고 나설 일이겠지만, 문제는 이 명령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아내 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하여 부부생활에 카운슬링을 해 주시면서, 정말 상담료를 계산할 수도 없는 그 귀중한 상담을 딱 10초 동안 해 주실 때, 바로 이 한 마디 조언만으로 끝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 아내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액면 그대로 잘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이 말만 가지고는 시원치 않고 뭔가 불만스러워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을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들에게 그처럼 어려워 보이고 복잡해 보이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바로 이 ‘복종하라’는 명령 하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데에서부터 다 기인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도 남자로서 확실하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남자도 자존심만은 꼭 세워 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존심이라는 것이 꺾이게 되면 그 어떤 남자라도 모든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고 자연히 남자다운 구실을 결코 할 수 없게 됩니다.
남들 앞에서 무시를 당해도 그렇지만 더욱이 자기 아내까지 자기를 경멸하게 되면 정말 살맛 다 떨어지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지지리도 못난 남편’이라고 생각되는 남편이 혹 있다면, 그럴수록 그 아내만이라도 그 못난 남편을 존경하고 높이 받들어 주고 격려해 주어야만이 그 남편이 ‘잘난 남편’으로 바뀔 수 있는 가망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겠습니까?
그 정말 못난 바보가 그런 공주로부터 사랑과 존경과 격려를 받게 되니 그냥 갑자기 자신감이 솟아오르고 꾸준히 노력하게 되어서 결국 기적처럼 일국의 장군이라는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19절과 20절의 말씀을 함께 나란히 두고 보면 한 가지 특별한 패턴이 발견됩니다.
남편과 아버지의 입장에 비교한다면 아내와 자녀들이 상대적으로 약자의 처지에 있으며 또한 종속된 위치에 있는 가족 구성원들인데, 본문에서는 각각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교훈이 먼저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권위와 힘은 남편과 아버지 쪽에 항상 있기 마련인데, 틀린 것을 지적하고 교훈하는 말씀만큼은 유독 ‘남편과 아버지’에게 먼저 주신 것이 아니라 ‘아내와 자식’에게 각각 먼저 내리신 것입니다.
좋은 것은 항상 남편에 먼저 돌아가고, 무슨 잘못하는 일을 꾸중할 때에는 이처럼 안 그래도 서러운 처지에 있는 아내에게 먼저 주신다고 섭섭하게 여겨지십니까?

    하지만 저는 본문의 교훈이 이런 순서로 기록된 것을 다음과 같이 적용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원칙적으로 남편이 아내보다 위에 있고 부모가 자식보다 위에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아래쪽에 있는 사람은 그 관계가 어떻게 잘못되면 무조건 그 모든 책임을 위로만 돌리기 쉽습니다.
부부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때 아내들은 생각하기를, 당연히 권위 있고 이니셔티브가 있는 남편 쪽에 그 문제를 해결할 책임과 힘이 있는 것이고 자기 쪽에서는 혼자 아무리 용을 써 보아야 헛수고라고 미리 발뺌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그런 핑계를 대지 말라고 성령님께서 일부러 아내와 자식을 향하여 복종하고 순종하는 도리를 먼저 일깨워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기독신자 교수님께서 ‘윗물은 더러워도’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원래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말은 윗사람이 스스로 좋은 본을 보이라고 생긴 격언인데,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이 말을 아랫사람이 자기편에서 노력해야 할 일을 미리 포기하는 데에 변명처럼 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잘못되는 일이 있기만 하면 다 조상 탓이요 다 정치 지도자 탓이라고 윗물 더러운 것만 타령하고, 그러니 나도 더러워도 당연한 것이라고 핑계하는 버릇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회가 정말 잘되기 위해서는 이 격언을 없애 버리고 ‘윗물은 더러워도 아랫물이라도 맑자’라는 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참 공감되는 말씀이었습니다.
부부관계에서 아내 된 자들 역시 새겨보아야 할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남편은 자기를 잘 사랑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편은 무능력하고 변변치 못하다 하더라도, 혹 남편은 남편 구실도 못하고 아내를 괴롭히기까지 한다 하더라도, 그 남편에게 모든 탓을 다 돌려버리지만 말고, 아내 편에서부터 먼저 노력하고 아내 쪽에서만이라도 먼저 그 남편을 존중해 주는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발휘해야만 그 부부사이에는 희망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회에서 떠도는 수많은 조언들보다도 그저 ‘남편의 영적 권위에 복종하라’는 이 한 가지 속에 아내로서의 모든 기본과 미래가 다 들어 있다는 이 주님의 말씀을 아무 가감 없이 그대로 받아 순종하여 지킴으로써, 부부관계를 회복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에 오히려 먼저 주도권을 발휘할 줄 아는 아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남편이 늘 잊지 않고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도리는 아내를 ‘괴롭히지 말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19절에는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남편들을 향해서는 다른 어떤 조언 대선 우선 “아내를 사랑하며”라는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이 또한 가볍게 들으면 너무나도 쉽고 당연한 말인 까닭에 어쩌면 조언 같아 보이지도 않는 말씀입니다.
아마 부부문제로 카운슬링 받으러 가서 겨우 이 한 마디 상담 듣고 그 비싼 상담료를 기꺼이 내려는 남편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세상의 그 흔한 조언과는 근본적으로 크게 다른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의미하는 사랑의 질이란 것이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조금 앞에 나오는 에베소서 5장 25절에 보면 같은 주제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이 사랑을 좀 더 정확하게 밝히기를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비길만한, 진실하고도 강력한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조차 사랑해 주신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못나고 부족한 점이 보일 때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주신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베풀어야 할 사랑이란 것도 아내가 어떻게 자기에게 대접해 주는가에 관계없이 무조건 일단 먼저 베풀어 주고 보는 사랑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은 또한 ‘자기를 주심 같이’ 즉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버리시면서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아내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강도란 것도 얼마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겠습니까?
본문에서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할 때에는, 신자 된 남편이라면 적어도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베푸신 사랑과 같은 최고 강도와 최고 수준으로 사랑하라는, 결코 범상치 않은 명령인 것입니다.

    신자 남편이 바로 이런 사랑을 발휘하게 되면 그 부부는 늙어갈수록 오히려 신혼 때보다도 더 재미있고 진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5장 18절에 보면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즉 ‘네가 젊을 때 결혼했던 아내를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사랑하고 귀여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19절에서는 한 술 더 떠서 자기 아내를 “암사슴과 암노루”처럼 여겨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까지 말씀했습니다.
이 암사슴과 암노루는 수사슴으로 하여금 연모와 열정으로 몸이 달아오르게 만들고 그 사랑을 차지하는 짐승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향하여 그런 매력과 연정을 평생토록 느끼면서 살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신 남자들은 흔히 여자의 육체적 매력에만 빠져서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의 불같은 열정이 식거나 그 아내의 젊은 매력이 사라지게 되면 그때부터 벌써 위험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들 중에는 온갖 성형수술로 그런 육체의 노화를 감춤으로써 남편의 눈에 계속 매력 있게 보이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그저 간단하게 이혼하고 서로 돌아서서 피차 자기 눈에 매력 있게 보이는 사람을 다시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고 예수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부부는 절대로 그렇지 아니합니다.
이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피차 상대방에 대하여 새로운 매력이 더해 가는 부부입니다.
정말 예수 잘 믿는 남편은 자기가 젊을 때 취했던 아내를 늙어서도 여전히 즐겁게 누릴 줄 알고, 아내에게서 젊음의 매력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에도 오히려 중년만이 발휘할 수 있는 매력을 볼 줄 알게 되고, 또 장년과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자기 아내를 볼 때마다 ‘그때 그때 달라요’라는 새로운 매력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내 쪽에서도 물론 그래야 하지만, 특히 남편 쪽에서 아내의 손이 거칠어지고 피부에 주름살이 늘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이 사람이 날 뒷바라지하고 자식 키우느라고 이렇게 되었구나.’하고 더욱 깊고도 진한 사랑을 느끼고 발휘할 줄 알아야만, 그 부부는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새로운 신혼처럼 깨가 쏟아지는 행복한 한 쌍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까 아내에게는 “복종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카운슬링을 끝내신 하나님이셨지만, 남편을 향해서는 곧 이어서 “아내를 괴롭히지 말라”는 두 번째 명령을 덧붙이셨습니다.
여기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가장으로서의 영적 권위를 주었다고 해서 그것을 오용하거나 악용하여 독재자처럼 군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남편의 권위란 것은 오직 아내를 사랑으로 보호하고 부양하며 지도하는 것일 뿐 결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21절에서 자식들 앞에서 아버지 된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아내를 ‘괴롭히는’ 것이나 자식을 ‘노엽게’ 하는 것은 둘 다 상대편을 ‘해롭게(offend)’ 하는, 즉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해치고 상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아내나 자식에게 주신 교훈에는 남편과 아비를 그런 식으로 ‘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자식은 남편과 아버지 앞에서 약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내가 남편을 괴롭게 하는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 때문에 남편이 받을 수 있는 괴로움의 정도와 질이라는 것은 남편 때문에 아내가 괴로움을 당할 때의 경우와는 도무지 비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한 쪽 때문에 강한 쪽이 괴로움을 받는 것은 정신적인 갈등에서 끝나는 것이지만 강한 쪽 때문에 약한 쪽이 괴로움을 당할 때에는 정신적으로는 공포에까지 이를 수 있으며 육체적으로도 학대를 당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내더러 남편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남편에게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남편 된 자들은 바로 이 사실을 정말이지 새겨듣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주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바로 그 권위를 가지고 잘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남을 일방적으로 극히 괴롭힐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권위를 가진 자들이 바로 이것을 망각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지는 우리가 옛날의 왕정이나 근래의 군사 독재정권이나 현재의 공산독재자를 통해 잘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그와 꼭 같은 엄청난 괴로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남편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차가운 말 한 마디가 아내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우리 남편들의 무관심이 아내의 평생을 과부 아닌 과부처럼 외롭게 살도록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아끼고 귀히 여겨야 할 자기의 다른 반쪽 같은 사람에게, 이처럼 남편 자신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많은 괴로움과 고통을 안겨 주고, 자기는 보지 못하는 가운데 뒤돌아서서 피눈물 흘리게 만들고 있지나 않는지 이 말씀을 통하여 꼭 되새겨 보시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언젠가 어느 주일 밤에 설교하면서 남전도회 회원들에게 아내 생일이 되면 ‘장미 한 송이’라도 사고, 평소에 용돈 절약해서 적더라도 ‘현금 봉투 선물’과 같이 전해 주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 교회 남편들이 그 중요한 조언을 과연 얼마나 새겨듣고 실천에 옮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장로님께서는 “매달마다 월급 몽땅 다 아내한테 갖다 바치고 사는데, 또 선물은 무슨 선물, 지금까지 그런 거 안 하고도 잘 살았는데 이제 와서 뭐 새삼스럽게 바꾸어야 하나?”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장로님이 실상은 소문난 애처가이신 줄은 저도 잘 알지만, 정말 그렇게 끝까지 답답한(?) 남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면 남은 날만이라도 좀 바뀌어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그런 답답한 남편에게 신물이 날대로 난(?) 아내들이 저더러 여러분 남편들에게 꼭 전해 주라고 부탁한 말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하루만 행복하게 해 주면 아내는 남편을 일년 내내 행복하게 해 줄 텐데, 남자들이 그걸 몰라요.”라고 말입니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아주 작은 사랑 표시에도 엄청나게 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아내를 혹 괴롭히지 않도록 늘 주의하고 아내를 향한 세심하고도 진실한 사랑을 지키고 또 표현함으로써,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고 자신 또한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고 대접받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교훈은 세상의 결혼상담소의 카운슬러들이 주는 조언과는 너무나도 다르지 않습니까?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이런 말씀을 그런 불신자들이 들으면 “무슨 이런 구식 사고방식을, 이런 뻔한 말을 조언이라고 하고 있나?”하고 경멸하고 코웃음 치기에 딱 알맞을 것입니다.
이들은 부부관계를 철두철미하게 평등하게 만드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차등(差等)은 불행하고 평등(平等)이 행복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건드릴 수 없는 부동의 윤리법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항상 그렇겠습니까?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에서도 모든 차등이 철폐되고 철저하게 평등해지면 정말 그 사이가 행복하게 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성도는 그 지체가 되어야 마땅한 교회도 그 엄연한 차등의 관계를 완전히 없애버리고 예수님과 교인이 서로 맞먹어야 진정 은혜로운 교회, 복스러운 성도가 될 것 같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평등해야 행복하게 되어 있는 관계가 있는 것처럼 차등해야 제대로 되는 관계도 분명히 있는 것이며, 문제는 하나님께서 원래 그 관계의 창조질서를 어떻게 만들어 놓으셨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에 말씀드린 방 집사님 부부께서도 한 때 결혼생활에 어려움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그때는 두 분 다 예수 믿지 않을 때라 함께 점쟁이를 찾아 갔는데, 그때 점쟁이 할머니가 “종교를 가지라”는 점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두 분이 점쟁이의 충고를 따라 예수를 믿기 시작하셨는데, 그 때부터 영육 간에 축복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그처럼 행복하게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나중에 그 점쟁이에게 감사 인사도 할 겸 전도하려고 다시 찾아갔는데 그 때 그 점쟁이 할머니는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점쟁이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택자를 부르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마음대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 방 집사님 내외분께서 체험하셨던 그대로,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부부사이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제일의 요령이요 불변의 원칙입니다.

    애당초 부부라는 관계를 창조하신 이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카운슬링만 잘 지키면 누구라도 그야말로 완벽한 한 쌍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내는 ‘복종’ 남편은 ‘사랑’ 이것만 각각 바로 기억하고 지키면 모든 부부생활의 문제는 원천봉쇄될 것이며 실로 원만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대하듯이 사랑해 주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결코 부담이나 고역이 될 리가 없으며, 자기를 그처럼 영적으로 인정해 주고 존경해 주는 아내를 둔 남편은 더욱 자기 아내를 아끼고 귀히 여기는 가운데 가정의 제사장과 가장으로서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을 주 안에서 복종하는 아내, 아내를 괴롭히지 않고 사랑하는 남편 - 경향의 모든 부부들이 바로 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는 배우자가 됨으로써,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가 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