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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만난 삭개오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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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삭개오가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삭개오가 세상적인 행복의 조건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왜 행복하지 못했습니까? 진정한 행복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따뜻하고 거룩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과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一) 자기 삶에 대한(인생에) 갈증이 있어야 한다.

쿠바섬 해변 오막살이에 산티아고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돛단배로 무려 85일만에 겨우 한 마리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노인이 평생에 한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큰 물고기였습니다. 노인은 3일 동안 사투 끝에 작살로 그 물고기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런데 물고기의 찢어진 살 틈에서 흘러나오는 피냄새를 맡고 몰려온 상어떼와 필사의 싸움을 했습니다. 결국, 배는 포구에 닿았으나 그 큰 물고기는 하얀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습니다.
노인은 지칠대로 지치고 허망하여 침대에 들어가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훼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평생 무엇인가를 잡기 위해 죽을둥 살둥 노력합니다. 그래서 원하던 행복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도 하고, 내가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삭개오도 이러한 인생의 허무함을 절감한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동안 자신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돈도 벌었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세리장이라고 하는 권세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당시 세리라고 하는 직업은 동족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직업이었습니다. 무자비하게 세금을 거두어 일부는 Rome에 바치고, 일부는 자신을 위해 착복했습니다.
삭개오가 그런 세리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당연히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삭개오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곁으로 모여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기 삶에 대한 허무와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무를 느낀다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할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분명히 체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의 삶의 허무와 갈증으로 인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뜻을 세웠습니다. 지금의 고독과 목마름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궁극적 행복에 대한 이러한 갈증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질이나 명예는 결코 궁극적인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 갈급할 수밖에 없고, 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목마름이 있는 자는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 나오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여러분의 갈증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二)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려고 했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군중들과 그의 작은 키였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굉장히 용기있는 결단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으로 보아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구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체면 때문에 손해 볼 때가 많습니다. 체면 때문에 좋은 기회를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주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솔직한 마음으로 삭개오처럼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 18:3) 어린아이는 순진하고 깨끗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특징은 자기가 원하는 것에 몰두합니다.

본문의 삭개오는 비록 세상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도 주님을 향하는 어린 아이같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렬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혈루증 환자는 병 낫기를 사모하여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소경은 눈뜨기 위해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정결함 받기 위해 용기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이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입니다.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는 용기입니다. 오직 주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입니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표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전진하다 쓰러지면 일으켜 달라. 내가 머뭇거리면 떠밀어달라. 그러나 내가 물러설 때는 나를 쏘아 달라"는 말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용기!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용기입니다. 나의 체면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부끄러움을 잊어야 합니다. 나의 경험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수모가 있고, 조롱이 있고, 자존심이 상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반드시 만나보고 싶어 뽕나무 위로 올라가는 삭개오의 간절함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三) 자기 것을 포기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가 주님을 바라보기 원했던 삭개오에게 주님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
삭개오가 황급히 나무에서 내려와 주님 앞에 섰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교활하고 이기적인 사람인지도 몰랐습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낄 때마다 자신을 향한 질투심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는 자신의 모습이 엉망진창이었고, 추하고 초라함을 발견했습니다. 이제껏 자신이 저질러온 수많은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평생 물질과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이웃이 굶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눈물로 애원해도 한푼의 세금을 깎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의 것을 토색했습니다.
그런 그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값겠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8절) 이 얼마나 극적인 변화며 결단입니까?
누구든지 주님을 만나려면 움켜쥔 것을 포기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좇는 것에서 한발 물러서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했습니다. 평생을 좇아왔던 물질을 주님 앞에서 포기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이제껏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인생의 참 의미와 참 행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결론)

삭개오는 주님을 만난 이후로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집에 유하시겠다고 하실 때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신이 선택받은 백성임을 깨닫고 감격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세상적인 성취로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용기를 내어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에게 찾아와 주실 것이다. 세상을 향한 여러분의 집착을 벗어 버리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여러분의 생에 가장 큰 행복을 안겨주실 줄 믿습니다. (설교 / 원사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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