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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삭개오를 찾으신 예수님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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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렸을 적에 저희 동네에서는 큰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높이가 약 10미터 정도 되는 고목이었습니다. 이 느티나무에는 커다란 8줄기가 나서 이 두꺼운 여덟 줄기 가운데 하나를 올라가서 나머지 일곱 줄기를 끝에서 끝으로 옮겨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이 납니다. 이곳에 올라가면 동네 어귀가 눈에 완전히 들어 올 정도로 높았습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 하는 세리장이 있었습니다. 국세청장이었습니다. 신체적으로 볼 때 그는 키가 매우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사막의 오아시스였으며 세금 거둘 것이 많았기에 그는 남의 돈을 착탈한 결과로 남달리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자 삭개오 역시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키가 너무도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빠르게도 그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들을 앞서 먼저 나아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뽕나무는 그렇게 높은 나무도 아니요 그렇게 튼튼한 나무도 아닙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높이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지역을 대충 생각하여 그 나무를 택하고 올라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 위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대로 지나가실 듯한 예수님, 거들떠 보지도 않을 듯한 예수님, 그런데 갑자기 시선을 위로 올리셔서 삭개오를 바라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여러분, 예수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직접 알지도 못했고 얼굴도 몰랐고, 단지 명성만 들었건만 예수님은 세리장이 삭개오를 이미 아시고 삭개오의 집에 거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이 삭개오의 집에 거하신 구원 사건이 오늘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에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삭개오를 받아 주시고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까?

2. 첫째로, 삭개오는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삭개오는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부정축재로 물질을 많이 모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직업은 물질을 많이 끌어 들여 부정축재를 일삼을 수 있었던 세리장이었기때문에 그는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언뜻 보면 물질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었기에 주님께로 나아갈 마음의 여유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럽게 마음에 변화를 받아서 모든 것을 다 체념하고 주님께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 분이 누구인가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 나아가기 이전에 삭개오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도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생긴 분인지 한번 얼굴이라도 보자’ 삭개오의 마음에는 오직 예수님을 한번 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념 하나로 예수님을 한번 꼭 보겠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주님께로 나아오겠다고 결심한 이러한 삭개오의 마음에는 벌써 믿음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나아가는 자만이 살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주님께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키가 몹시 작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육체적인 콤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물질을 많이 벌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상심한 것을 보상 받고자 이 세리장의 길을 걸었을지 모릅니다. 삭개오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죄인 취급을 받던 경멸 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동족이지만 로마 제국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세리장이었기에 그의 마음밭은 괴리감과 소외감정으로 헤아릴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삭개오가 그 많은 군중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다 버리고 주님께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우러러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주님은 바둥바둥 연약한 가지에 매달려서 조심스러운 눈으로 당신을 내려다 보던 이 키가 작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며 “내가 오늘 네 집에 거하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한 인생의 미래가 전폭적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교부들과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말하는 용어에 따라서, ‘놀라운 교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주변에 모인 수많은 의로운 사람들을 그대로 두시고, 이 한 사람의 죄인을 영접하시어 그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초대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머뭇 머뭇거리는 삭개오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멸시받던 사람을 한 명 초대한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로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인가 지기 싫어하고 나의 부족한 것은 드러내기도 싫어하고,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수그리며 상대방을 초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세상의 방식과는 정 반대되는 일이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장 20절). ‘누구든지’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삭개오에게 있어서 주님의 초대는 생각치도 못했던 큰 기쁨이었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속히 내려오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삭개오는 급히 내려왔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삭개오는 즐거워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영접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삭개오의 봉사는 기쁨에서 우러난 봉사였습니다. 여러분, 봉사는 마음에서 우러나야 그 결실이 있습니다. 외적인 겸손이 낳는 것은 교만이요, 외적이며 형식적인 봉사가 낳는 것은 지치고 상하고 힘든 마음 밖에 없습니다. 가끔 우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 3장 1절)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가르침을 받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를 즐겨 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더욱 당하기 보다는 내가 당한 것을 다시 갚을 것을 생각하는 그런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봉사에는 기쁨이 있어야 하고 종된 우리는 종의 모습을 상실하여서는 안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삭개오는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수군덕 수군덕 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약함과 죄악된 생활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삭개오의 태도에서 믿음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전폭적인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실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이 삭개오에게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삭개오는 단호하게 세상 모든 시선과 자기 고집과 욕망을 떠나서 주님께로 나아왔습니다.

3. 둘째, 주님을 영접한 그의 삶은 전폭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삭개오는 주님에게 이렇게 결단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8절). 그렇게도 욕을 먹으면서도 벌은 물질이었건만, 진리 자체이신 주님을 만난 삭개오의 마음은 진리에 불타 올랐기 때문에, 물질의 세계를 초월하여 참 신자의 길을 걷고자 결단하였습니다. 반은 세상에 반은 교회에 발을 디딛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 삭개오는 참 신자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아무리 부족하고 죄 가운데 허우적대었어도, 그 삶이 전폭적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계절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욕망의 늪에 빠지기 쉬운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믿음 생활도 “만족할 줄 아는 경건”(딤 6장 6절)이 있어야 깊어지듯이, 신자의 생활에도 ‘만족할 줄 아는 지혜’가 오늘날 필요합니다. 물질의 유혹에 빠져서, 자기 욕심에 빠져서 영적인 세계를 저버린 종교인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인의 옷은 입었지만, 그 마음은 죄인보다도 못한 인생이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주님께 속한 사람은 그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가끔 수해나 자연 재해를 겪게 되면, 신문이나 방송에서 성금을 모금합니다. 그런데 모금 활동이 기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 그 액수가 별로 많이 모이지 않는다 봅니다. 사진까지 붙여야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 합니다. 정치인이 성금을 내면 액수에 관계없이 금일봉이라고 보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영광만 추구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명예에 눈이 멀었기에, 주님의 영광, 주님의 명예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라질 이름 석자 남기고자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시 90편 3절)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에게서 와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생은 70이요, 건강하면 80까지 산다 했습니다. 불로초를 구해 영생하기를 원했던 진시황이나 이집트의 고대 파라오들은 이러한 인간의 한계가 극복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한 예에 불과합니다.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이 한 말씀에 우리 인생은 주님께로 돌아갈 준비를 오늘도 계속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나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이 음성을 들으면서도 세상 것을 추구하지나 않는지 이 시간, 내 자신을 다시 한번 깊이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디로 나의 삶이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내 믿음 생활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우리의 목표는 영원한 세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장 12절-14절). 하나님을 떠나 방탕하며 죄인의 길을 걷던 어거스틴은 이 말씀과 더불어 전폭적으로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썩어질 육신의 세계, 끝내는 멸망할 죄악의 세상에서 방황하다가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난 어거스틴의 삶은 전폭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인의 삶에서 죄인의 길에 들어서기는 쉽지만, 죄인의 삶에서 성인의 삶으로 바뀌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기 때문에, 그의 삶은 지금껏 우리 연약한 인생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영접하시면 여러분의 인생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막 2장 2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새 인격을 얻었으면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함을 강하게 역설하셨습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내가 입으로 아니면 내 마음으로 제 아무리 주님을 고백한다고 하여도, 내 삶이 전폭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예수님은 나를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 25장 12절). 주님은 나의 삶이 전폭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변화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을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4. 셋째로, 주님께 나아온 삭개오의 삶은 구원을 받은 삶이 되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9절).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외롭고 고독하고 소외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삭개오 저 인간은 우리의 고혈을 짜서 먹는 매국노’, 이렇게 수군수군거렸을 것입니다. 같은 피를 타고 태어났건만,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삭개오, 그러나 이제부터 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어둡던 인생의 터널을 지나 밝은 빛으로 환하게 빛자는 구원의 초청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요 당당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이 그간에 죄로 물들었던 삭개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세상은 삭개오를 의인으로 인정하기는 커녕 악인의 카테고리에 집어 넣고 그를 증오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슨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으시고 삭개오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장 10절 이하).

사랑하시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죄사함을 받는 구원의 공동체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교회에 모인 자마다 저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새로운 인생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부정이 긍정으로 바뀌게 하시고 긍정이 축복이 되게 하시고 축복이 영생의 나라에 이르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늘도 전파하시며 살아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인들이 들어오지만, 의롭게 된 사람들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곳입니다. 아직도 여러분 가운데 교회에 나오는 것에 대하여 왜 교회에 나오는 것이 불확실한 분이 있다면, 주님의 죄사함을 받으러 나오는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구원의 방주에서 우리는 주님의 죄 사함을 체험함으로써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에는 나의 삶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모르지만, 주님 안에서 평안을 찾으면,  인생의 목표가 분명히 보이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삭개오는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주님께 나아옴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과거의 모습이 종언을 고하고 새 사람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께로 오는 사람은 누구나 이 구원의 새 옷을 입혀 주시고 그의 삶을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편 8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민을 들어 주시며 우리의 어려운 길을 함께 동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삶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전폭적으로 바뀌기를 항상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삭개오에게 임하던 이 거듭나는 중생의 체험이 오늘 여러분의 심령과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간절한 음성을 듣고 주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양은 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

주님은 오늘도 삭개오와도 같이 주님을 찾고 주님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고 여러분 모두에게 세상을 헤쳐나갈 힘과 지혜를 공급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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