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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웨슬리회심주일] 웨슬리 운동을 이 땅에 (살전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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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 267주년 주일입니다.

1. 웨슬리를 아십니까?

* 웨슬리의 어린시절
존 웨슬레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람입니다.
웨슬레는 증조부로부터 3대째 목사를 이어온 집안의 열아홉 남매 중 열다섯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웨슬리가 6살 때, 그의 집에 불이 났는데 그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구출 받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훗날, 그는 가끔 자기를 가리켜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 웨슬리의 청년시절
웨슬리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데에는 여러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청년 시절에 하나님의 모든 계명만 잘 지키면 구원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경건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고, 온갖 선행에 힘썼습니다.
매일 한 두 시간씩 꼭꼭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써 지켰고, 매주 성찬식에 참석했습니다. 말에나 행실에나 단 한 번이라도 실수가 있을까 하여 언제나 조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속사람의 성결을 위하여 언제나 기도하였습니다.

* 열심있는 종교생활
참 열심히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모두 자신의 경건, 자신의 노력, 자신의 기도와 성결 뿐이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없었던 것입니다. 나이가 들자 교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 을 공부하기 위해 명문 옥스포드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신학도가 되었습니다. 그때에도 그는 여전히 그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옥중에 있는 죄수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빈민굴을 찾아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며 병든 사람들을 찾아 위안했습니다. 또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엔 금식을 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자신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뒤 웨슬레는 병들어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대로 죽으면 하나님 이 자기를 받아주실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 두 권의 책
그는 두 권의 책, 토마스 아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테일러의 ‘거룩한 생활의 규칙과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성직자로 임명되었고, 옥스포드 대학의 조교도 겸하게 되었다. 그는 의심을 없애기 위해 더욱 경건한 생활을 했다.

* 홀리클럽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하기 위해 ‘신성클럽(The Holy Club)’을 조직하고 신앙생활에 관하여 경험을 나누고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철저한 규칙을 지키면서 경건생활이 몸에 깊숙이 젖어 생활 습관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클럽을 가리켜 ‘규칙벌레’, ‘성경클럽’, ‘엄격한 종교 주의자(Methodist)’라고 놀렸는데 후일에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 되었습니다.
나중에 휫필드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도 이 클럽에서 활동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곧 이 단체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는 더 신중히 교회출석, 성찬식, 검소한 삶 . . 등에 모범을 보였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라면 모든 일에 열성적이었습니다.

* 아메리카 선교사
그는 옥스포드대학의 버튼 박사의 추천으로 아메리카 선교 길에 오릅니다. 1735년 10월 14일 시몬스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향했습니다. 사나운 파도가 이는 대서양 항해의 3개월 동안도 일과표를 만들어 놓고 신앙생활에 힘썼습니다. 매 시간을 오직 자기의 신념에 충실하게 생활하려 한 것입니다.

* 종교가 짐이 된 웨슬리
명성이 쟁쟁한 옥스포드대학 신학부를 졸업,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 선교의 모든 여건, 자격을 다 갖추었습니다. 근면 성실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죄사함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죄사함의 확신에서 오는 기쁨과 평강도 없었습니다. 웨슬레에게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 항해도중 만난 모라비안 교도들
항해 도중 그들이 탄 배는 무서운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웨슬레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배에 타고 있던 25명의 모라비아교인들은 한 사람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모라비아교인 : 진젠도르프 백작을 중심으로 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
그들은 항해하는 배 속에서 음식을 나르고 기쁨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뻐기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고, 혈기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배위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쳐 눌르고 갑판 사이로 물결이 노도처럼 밀려들어왔습니다. 선실도 아비규환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모라비아교인들은 조용히 찬송을 계속해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부인들도 아이들도 . . .무서워 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레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 미국에서 만난 슈팡 베르크 목사
마침내 웨슬레는 미국 땅에 도착했고, 모라비아교인들의 소개로 그 곳에 먼저 파견된 선교사 아우구스트 슈팡겐베르크 목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웨슬레는 그 목사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선교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슈팡겐베르크 목사는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알고 있읍니까? 당신 속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요1서5장10절) 웨슬레는 그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매우 당황했습니다.
슈팡 겐베르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오?” 웨슬레는 궁리 끝에 “나는 그 분이 세상의 구주신 줄을 알고 있읍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분이 당신을 이미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나는 그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셨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웨슬리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 소피아 홉키와의 사랑
그러던 중 소피아 홉키 (Sophia Hopkey)라는 부자집 딸과 사랑하게 되었으니 홉키는 윌리암슨이라는 남자와 결혼해 버립니다. 그 뒤 웨슬레는 홉키에게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일로 홉키의 숙부가 웨슬레를 고소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 다시 영국으로, 뵐러 목사님을 만나
영국에 도착한 웨슬레는 또 한 사람의 모라비아교 페터 뵐러목사를 만나게 됩니다.
웨슬리는 설교를 하지 않을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복음을 깨닫지 못했으면서 어떻게 남에게 전 할 수 있겠는가?’ 고민하는 웨슬리에게 뵐러목사는 설교를 하지 않을려는 웨슬리에게 “당신이 확실한 믿음이 생기기까지 믿음을 전하시지요. 그런 다음엔 믿음을 얻었으므로 믿음을 전하시게 될 것입니다” 뵐러 목사님은 믿음은 순식간에 마음에 이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웨슬리는 뵐러목사님이 말한 사실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구원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인가?’ ‘어떻게 믿음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의 모든 사실이 순간적으로 구원 얻은 것만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웨슬리의 고집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웨슬리는 체험을 얻지 못했으나, 누구든지 믿는 순간에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짐을 거리낌 없이 외쳤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영국의 교회들은 웨슬리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성직자 대접을 못 받게 되었습니다.

* 그후 1738년 5월24일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5월 24일 수요일 아침 5시경 나는 성경을 열어서 벧후1:4를 읽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라는 말씀이 내 눈에 닿았다. 그 날 오후, 교회에서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시130편) 라는 성가대 합창을 들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올더스게이트가의 모임에 갔다. 그 집회는 페인트공인 홀런드씨가 인도하고 있었다. 그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였다. 8시 45분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하여 그 사람이 말할 때에 이상하게 내 마음에 감동이 왔다. 나는 나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 나의 죄를, 바로 내 죄를 제하셨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직후 나를 특히 괴롭히며 박해하던 원수와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내가 처음으로 마음속에 경험한 사실을 간증했다.”
말씀을 듣고 있는데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뜨거워짐은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열정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 사람들에게 열정이나 열심은 아주 중요합니다.
*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에 대한 열정이 일어납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때 마음에 뜨거워집니다. 사랑이 불붙게 되는 것입니다.
*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 그의 뜨거워진 사건, 때문에 영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거점이 마련된 것입니다.

요3:3에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일군으로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회심해야 합니다. 지식으로만은 안됩니다. 결심만으로도 안됩니다. 웨슬리의 결심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것으로도 되지 않았습니다.

* 웨슬리의 부흥 운동은
속죄의 확신과 구원의 확신이 마음에 불타오르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통해서 오게 된 것입니다. 그 확신은 말씀을 들을 때 왔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이 순간은 웨슬레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는 82세의 고령에 이르도록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전국을 일주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2. 뜨거움을 회복하라

회심이라고 하면 신앙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회심을 하고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던 분이 예수를 믿게 된 것도 회심입니다. 낙심에서 다시 돌아온 것도 회심입니다. 뜨뜻미지근한 믿음을 가졌다가 뜨거운 믿음을 갖게 된 것도 회심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가운데 회심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많은 크리스챤들은 구원을 체험하고 나면 마음이 느슨해집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구원에 대해, 신앙생활에 대해서 느슨해집니다. 자신의 그 모습에 만족합니다.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 일도 느슨해 집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초대교회 일곱교회 중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우리의 열정이 떨어지기 쉬운 때는 우리의 삶이 넉넉할 때입니다. 모자람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될 때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합니다. 열정이 사라지게 합니다.
영적힘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우리가 성결케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기쁨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찬양의 능력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오면 내 속에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가 물러가고 그 속에 찬양과 감사가 나타납니다.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으시면 않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위해 더 많이 봉사하게 되는 회심, 내 일생을, 목숨을 바쳐 주님께 바쳐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충만케 되는 회심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가운에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3. 한 사람의 변화는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회심은 웨슬리 목사님이 하고 구원은 영국 사회가 받았다!”라고 했습니다.
18세기 당시 영국 사회는 한마디로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18세기 영국 국교회(성공회)는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출석했으며 사회에 불신앙과 부도덕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교회 설교는 도덕성 강연회 같았고 노동자와 빈민들은 교회의 영역 밖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교회의 타락은 사회의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원리와도 같습니다. 당시 영국은 음란, 음주, 도박. . . 정부가 복권 제도를 장려하여 국민들 사이에 사행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와 너무 비슷합니다. 소망이 없던 영국 사회가 변화된 웨슬리 한 사람의 복음운동으로 인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리는 야외설교를 시작으로 80세까지 4만-5만회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설교와 함께 실제적인 구제 활동을 많이 하였습니다.

사회복지 기관도 많이 설립했습니다. 웨슬리는 노예 제도 폐지와 노예 해방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흑인 노예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백인들과 함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흑인 학교를 위한 모금 운동과 흑인 노예들의 교육에 필요한 도서 보내기 운동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책자를 출판해 노예 제도의 폐해를 강렬하게 공격하므로 1807년에는 ‘노예 매매 폐지법’과 1833년 ‘노예 해방 법령’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전 세계에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는 세계사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사회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고 미국의 대각성 운동의 촉진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웨슬리의 복음 운동은 영국에서 피 흘리지 않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회심후 탄광 지대, 빈민촌. . 삶의 구석진 곳을 찾아갔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때 웨슬리 목사님의 감리교 운동이 없었다면 영국에서는 틀림없이 유혈폭동이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류 역사를 변화시킨 4대 회심이 있습니다. 시대마다 중요한 회심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회심, 어거스틴의 회심, 루터의 회심, 그리고 웨슬리의 회심을 인류 역사를 변화시킨 4대 회심이라고 합니다. 이 네 회심은 각기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그런 아름다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초대교회라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참회록」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기초를 이루는 많은 저작 이라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루터의 회심은 개신교라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의 회심은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과 같이 감리교라는 열매와 어둠으로 가득 찼던 18세기의 영국 사회의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국 감리교회도 150만이 넘는 큰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교파는 다르지만 성결교회 역시 웨슬리의 후예들입니다. 전 세계의 웨슬리 가족이 4천만은 된다고 합니다. 하나의 중생의 경험이 이렇게 엄청만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지도력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진정한 지도자가 부족하다는 것은 심각한 현상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들의 생애를 통해서 사회는 변화됩니다. 웨슬리는 영적 침체의 시대에 비전의 사람, 개혁의 사람, 헌신의 사람으로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웨슬리 운동이 이 땅에 다시한번 나를 통하여 꽃이 피기를 바랍니다.

4. 우리 이 땅에 웨슬리의 운동이 필요합니다.

당시 영국 사회는 참으로 비참했고 열악했습니다.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에 관해 구호 차원을 넘어 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고 제거하는 것을 기독교의 사명을 보여 준 사람입니다. 당시 메도디스트들은 곤궁에 처해 있는 자들을 돕기 위해 매주 모금을 했습니다. 농사의 작황이 안 좋을 때에는 특별 모금을 했습니다. 때로는 웨슬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 모금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직자들을 위해 목화 손질과 방적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도 했습니다.
기숙사 학교제도로 1748년에 설립한 새로운 킹스우드 학교에서는 읽기, 쓰기, 셈하기, 영어, 불어,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수사학, 역사, 작문, 지리, 대수, 물리, 원예, 음악 등.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서, 교육에 대한 선각자였습니다.

웨슬리는 회심을 한 다음에 탄광 지대를 찾아가서 광부들에게 설교하고 빈민촌을 찾아가서 설교했습니다. 당시 영국 교회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금지했습니다. 영국 교회는 품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 웨슬리 목사님은 “세계가 나의 교구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개척하는 동안 유대인들의 위협과 박해와 훼방이 아주 심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교회를 개척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방해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아직 교회다운 면모를 갖추지 못하고 미숙한 상태인데도 사도 바울은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후로 그 교회에 대한 염려가 참 많았습니다. 늘 그 교회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파송해서 그 교회가 여전히 잘 모이고 있는지, 잘 견디어내고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잘 지켜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근처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도 모범이 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 장에서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3절에 보면 이것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입니다.

1) 믿음의 역사 - 데살로니가교회는 박해 속에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그래서 애착이 더 있습니다. 바울은 멀리 있어도 그 교회를 위해서 매일 기도합니다. 얼마나 애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겠습니까. 어린아이를 떼어놓은 부모의 심정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회개하기를, 환난과 핍박을 잘 견디고 성장하기를. . .궁금해서 디모데를 보내어 들으니 바울이 떠난 뒤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우상도 버리고 회개하여 완전히 변화 받은 모습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믿음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이런 변화를 수반합니다. 웨슬리가 믿음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영국 사회가 변화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사회적 역할입니다.

2) 사랑의 수고 - 데살로니가 교인은 지금까지 우상 숭배하던 삶을 끊고 완전히 변화되어 하나님만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우상을 숭배했던 그 열심을 바꾸어 하나님께 더욱 쏟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에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사랑에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헛말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고통 없는 사랑에는 삶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수고와 희생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입으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지만 . . . 예수님의 사랑은 입술로만의 사랑이 아닙니다. 십자가 희생을 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이겨 내셨습니다.
3) 소망의 인내 - 사람은 아무런 목적 없이 맹목적으로 수고하거나 희생 하지 않습니다. 농부의 소망은 추수입니다. 그 소망 이 있기에 1년 동안 수고하고 땀 흘리고 인내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성공을 바라보며 투자하고 또 열정을 다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인내의 동기는 ‘예수님 재림 신앙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사람은 매일같이 놉니다.

우리의 신앙은 회심 전 웨슬리처럼 개인의 경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뜨거운 신앙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회에 영향을 주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 웨슬리의 후예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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