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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종의 겸손 (삼하 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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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으로 삼위일체주일이면서 우리교회적으로는 여리고봉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하루의 생활도 우리 이웃을 위해서 어떻게 봉사할 수 있을까? 어디서 봉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귀한 시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실천의 기쁨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종의 겸손’이라는 말씀을 나누기를 오늘 본문은 16절과 더불어서 말씀을 우리가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였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이방의 땅에서 전전하다가 국경지역에서 머물렀고, 그 곳에서 다시금 오벧에돔의 집으로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성으로, 다윗성으로 올라오는 시간입니다.

다윗임금은 너무나도 감격스럽고, 그 일이 중요한 일이라서 3만명의 선택한 군사들로 그 일을 호위하게 하였고, 거룩한 예복을 입은 노래하는 자들과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이 그 일에 앞장서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왕 자신도 성에서 나가서 하나님의 궤가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 했는지 자신이 얼마나 기쁘고 그리고 감격하는 모습을 백성들 앞에서 표현했는데,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윗왕의 모습과 비교가 되는 또 한 사람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그는 바로 다윗왕의 아내였던 제가 과거형의 표현을 쓰는 것은 그가 다윗왕의 아내로써의 그 정신적 내면적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성경도 그를 다윗의 아내라고 표현하지 않고, 16절, 21절, 23절 계속해서 표현되는 말씀, 사울의 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았다라고 그랬고, 20절에도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법궤가 돌아오는 환영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다윗을 맞았다고 그랬고, 23절에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 그랬습니다.

자식이 없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원래 태가 열리지 못해서 한나처럼 원래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갖지 못했던 경우, 한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태를 열어 주신줄 믿습니다. 사사였던 삼손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사울의 딸 미갈은 원래 자녀를 나을 수 없는 그런 숫태의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사랑을 얻지 못해서 자식을 얻지 못했다는 후자의 의미입니다.

아내로써의 대우를 얻지 못했고, 아내로써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이 다윗의 아내라고 해야하는 이 미갈을 사울의 딸, 사울의 딸이라고 반복해서 그의 위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으로 높임을 받았던 사울은 교만함으로 인해서 그를 대적하셨고, 그를 포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후회의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가 겸손에서 교만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할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할 수 있을 만큼 그는 교만했습니다.

그는 이제는 하나님 앞에 왕으로써 설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다윗을 기름 부으셨는데, 내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겠다고 한 이유는 바로 사울에게서 실패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준수한 사람이었고, 키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외모로 보아서 하나도 빠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겸손까지 있어서 금상첨화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귀중한 내면적 특성 겸손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은 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다윗이 여호와의 궤가 돌아오는 그 기쁨을 그는 마음껏 누렸습니다. 춤추며 뛰놀았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그 때에 춤추며 뛰놀다가 바지가 흘러내리는 것도 몰랐다고 그랬습니다.

그것을 지금 성위에서 창문으로 바라다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수만의 왕을 포함해서 여호와의 궤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감격하고 어쩔줄 몰라하는 그 시간에 그는 그 축제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예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 위에서 창문으로 내려다 보았습니다. 구경꾼의 위치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구경꾼의 위치에 설 때가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가끔씩은 구경꾼의 위치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에 경험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오늘 내 신앙의 자세가 구경꾼의 위치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담임목사, 부목사가 여러 주의 종들이 광고하고 광고하고 아무리 수고의 땀을 흘려도 그저 삼자의 입장입니다. 구경꾼의 입장입니다. 고생들 하는구만, 행사가 꽤 많은 것 같네. 그러면서 여전히 구경꾼의 입장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구경꾼의 특징이 있지 않습니까? 구경꾼은 언제나 자기의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남의 일로 여기는 거예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구경꾼은 판단하려고 합니다. 내 일이라면 부족해도 감싸고, 혹 연약해도 감싸주려고 하는데, 구경꾼은 평가하려고 그럽니다.

지금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을 보면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돌아왔을 때 사울의 딸 미갈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어떻게 영화로운신지... 이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닌데, 우리가 흔히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귀한 일을 해서 상을 받았다고 하면, ‘아, 집사님 정말 상 받은 것 축하드려요. 정말 귀한 상인데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내 맘을 담아서 그를 향해서 축하할 때에 듣는 사람이 ‘정말 저 사람이 마음을 담아서 진심으로 나를 축하하고 있구나.’ 느낄 수도 있고, ‘어, 상 받았다며? 아유, 축하해.’ 이럴 때 느끼는 느낌이 ‘저 사람이 지금 비꼬고 있구나.’

똑같은 말이지만 글로 적어놓으면 틀림이 없는데, 그 느낌에서 벌써 어감에서 비꼬고 있고, 비난하고 있고, 조롱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습니다.

지금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왕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운신지...’ 얼마나 이스라엘 왕의 자리가 귀하고 존귀한 자리인지, 그런데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 히브리 단어에 영화로우신지라는 말은 비꼬는 투에 말입니다. 정상적인 의미를 가진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춤추는 다윗, 바지가랑이가 내려가도 모르는 다윗을 비꼬고 조롱하는 말입니다.

한 걸음 나갑니다.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이 영화롭고 존귀한 왕이 그렇게 하셨네. 다윗왕을 술주정뱅이로, 술에 취해서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갈은 외적인 부분에 치중했습니다. 형식에 얽매인 자세를 가졌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장면을 다윗왕가와 사울왕가의 긴장되고 대립된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다윗과 미갈과의 단순한 두 사람의 남편과 아내의 대립이 아니라 지나간 왕조의 대표인 미갈과 새로운 왕조의 대표인 다윗의 대립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두 왕궁이 긴장관계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갈은 헌 부대에 헌 포도주를 얻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시대입니까? 새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고, 다윗을 새 시대의 지도자로 삼으신 줄로 믿습니다. 바로 저가 내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셔서 나로 이스라엘의 백성 주권자를 삼으셨다고 다윗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새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칼 조지라고 하는 교회 성장학자는 오늘날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21세기 교회는 메타교회가 되지 아니하면 교회는 생존할 수 없다. 메타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변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교회는 생존할 수 없다는 말이예요. 부흥하냐, 안 부흥하냐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변화되지 아니하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에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교회가 변화되어야 할 부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는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화하는 교회로 전환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변화에 앞장서 왔습니다.

한국교회가 바꾸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로가 새로 임직이 되고, 권사가 새로 임직이 되고, 집사가 새로 임직이 될 때 우리 평안의교회는 일체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일가친척들이 장로로 안수를 받습니다. 무슨 권사로 취임을 합니다. 무슨 집사로 취임을 합니다 하면 아마 수천만원씩 기본으로 내는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좋은 뜻에서 참석한 이들에게 선물도 준비하고, 음식도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지만 엄밀한 의미로 보자면 그것은 성직을 매매하는 것입니다. 집사가 되었으니까 300만원 내세요. 당신이 장로가 되었으니까 천만원 내세요. 안 낼 수가 없잖아요. 그것은 결국 성직을 매매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을 22년전에 과감하게 타파했습니다. 손님이 천명이 온다면 우리가 5000원짜리 설렁탕을 대접한다 그래도 경비가 500만원 들지 않습니까? 선물을 5000원짜리만 해도 500만원 들지 않아요? 그러면 선물과 식사비용만 간단하게 해도 천만원이 들어가지요. 그것을 교회 재정에서 한다면 일단 아무리 머리 나쁜 사람이 계산을 해도 교회가 천만원을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그것을 당신들이 당신들을 위해서 내는 것이니까 내세요. 어떻게 보면 무리한 요구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목회자들이 이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교회가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평안의교회는 22년동안 손해나는 일을 해왔습니다.

문제는 그런 일에 앞서가는 메타교회의 성도로써의 자부심을 얼마나 느끼고 감사하고 있는지 저는 때때로 의문일 때가 있습니다. 당연히 그 은혜와 감격을 누리고 있는지, 아니면 감사로 누리고 있는지, 저는 때때로 의문이 들때가 있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여러분, 담임목사가 가운을 입는데, 그 가운에 줄이 세줄이 쳐지면 무슨 가운입니까? 박사 가운입니다. 여러분, 담임목사가 박사가운을 입지 않고 설교를 해서 미안합니다. 박사목사가 아니라서 하지만 머리가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이 그래요. 너는 세상에서 실패한다면 넌 머리가 나빠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아이큐검사를 하고 잘 보여주지는 않지만 오늘날 저를 불러서 교무실에서 아이큐 검사한 것을 보여주면서 ‘너는 머리는 나쁘지 않아. 천재는 아니지만 그 다음 단계야. 넌 세상에 실패한다면 머리가 나빠서 실패한 것이 아니야.’ 그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점수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래요. 제가 세상적으로 머리를 굴린다면 그것을 모를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저도 목회학 박사학위, 무슨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잠깐 1년 고생하면 인센티브 코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더 이상 제가 그 과정을 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습
니다.

사실 박사학위라고 하는 것은 4-5년동안 그곳에서 전념을 해도 할 수 있을까, 없을까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1년동안 잠깐 해서 여기다가 박사의 표시를 하고 다닌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이야기지요.

그런데 우리 딸이 학교에 다녀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 교수님이 목사님 중에 가짜 박사가 많다는 말이 속상했다는 거예요. 속상한 이야기지만 현실적으로는 사실입니다. 목사라고 하는 것이 자기 정체성에서 가장 뛰어난 사역자로써 목사라고 하는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직업인데, 이상하게 한국에서 박사목사라고 하는 것이 이상하게 자랑이 되어지는 잘못된 모습들이 우리 사회에 그동안 있었습니다.

아마 교인들 중에도 우리 목사님은 박사가 아닐까? 그렇게 섭섭한 분이 있다면 박사목사 있는 교회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이 박사목사가 아니라 나는 이 교회를 다닐 수 없다고 하는 저는 기꺼이 여러분들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어느 장로님은 부목사님이 목사님이 오시면 차를 문 열어 드리고, 그래서 멋있다고 그래서 내가 당신 장로지만, 정신나간 장로가 아니냐고 제가 책망을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평신도도 문제예요. 패러다임의 전환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존경심에서 문 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목사 자신이 운전을 하고 다니는데, 후배목사님이 나쁠 일이 없지요.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와야지, 그것이 문열어주는 사람으로써 자리매김이 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목회자가 길거리에 떨어진 휴지도 주울 수 있는데, 그것 어려운 일 아니지요. 그러나 그것이 휴지를 줍는 사람으로 고착이 된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목회자 뿐 아니라 성도들도 패러다임이 바뀌어져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목회자들이 고급승용차, 대형차 타고 다니는 것 바꾸자. 어떻게 보면 그것은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그 부분에서는 저와 생각이 똑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은 앞으로 우리가 바뀌어야 할 한 부분인 줄 믿습니다. 많이 달라져야 합니다. 많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못 되느냐? 그 결과를 놓고 우리가 분석을 해야 됩니다. 이런 부분에서 우리가 세상에 빛이 되지 못했구나. 그렇다고 하면 우리의 기득권을 지금까지 누렸던 우리의 특권들을 과감하게 내려놓아야 되겠다. 기꺼이 해 놓아야 되겠다고 하는 희생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갈은 그 기득권을 왜 다윗 당신이 누리지 못하느냐고 책망조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오늘 대단히 놀라운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온산으로 오른다. 다윗성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다윗이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어떤 자세로 나아갔습니까? 왕으로써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궤가 돌아올 때 뛰놀면서 자기가 좋아서 춤추면서 그 모습은 왕으로써의 모습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으로써의 모습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끔씩 우리 지방회나 연회가 개최되면 그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와서 인사할 때가 있습니다. 두가지 유형이 있어요. 국회의원 아무개올시다. 그렇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뒤에서 반드시 몇 마디가 옵니다. 당신이 여기 뭐하러 왔어? 국회의원이 지방회에 뭐하러 오고, 연회에 뭐하러 옵니까? 국회의원은 국회로 가야지.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인사합니다. 어느 교회 권사 아무개올시다. 우리 지역에서 이런 성회에서 열리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거지요. 지금 그 분은 국회의원으로써 그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어느 교회 권사요, 집사요, 장로님으로써 인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위치를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
사할 때는 아무도 시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어떤 포지션으로, 어떤 위치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대표이사로 오셨습니까? 사장으로 오셨습니까? 어르신으로 오셨습니까? 어떤 위치로, 어떤 모습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다윗은 백성들에게 왕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종으로써 선 줄로 믿습니다.

미갈은 그것을 못 보았습니다. 미갈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종으로써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과거에 국군중앙교회에 있을 때 제가 군에 있을 때 모범 사병이 되어서 전국산업시찰을 가고, 육군중앙교회에 가서 특송을 하고 그랬는데, 성가대석 옆에 좌석이 또 하나가 있는데, 빨간 카펫이 깔려 있어요. 저 자리는 어디냐고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저 자리는 장군석이라는 거예요. 국군중앙이니까 국방부 바로 옆이예요. 육해공군 장군들이 앉는 자리라는 거예요.

그 제가 젊지만 그 생각에 하나님의 교회에 장군석이 다 있나? 그러면 교회에 국회의원이 있으면 국회의원석을 따로 만들어야 될 것 아니예요. 시장이 있으면 시장석을 따로 만들어야 될 것 아니예요. 이승만대통령께서 정동교회를 나가실 때에 대통령석을 따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회중석에 앞자리 회중으로 앉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이건 조금 잘 못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교회에 장군석이라는게 있을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는 직분으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은 있을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장군석이 있으면, 쫄병석도 있습니까? 교회에 장군과 쫄병이 왜 구별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사회적인 계급인데, 사회적인 계급은 교회 안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육군병장으로 정말 하잘 것 없는 위치였지만, 그렇게 이의제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제가 그 교회에 방문해 보지 못했는데, 제가 확신하건데 장군석은 없어졌을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 대표이사석이 따로 있고, 그 교회 종업원석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종의 뜻 여기서 겸손이 시작되는 거예요. 다윗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의 겸손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이 본문 사무엘상, 사무엘하 계속적으로 고백되어지는 것이 뭐예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코람데오, 나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다윗은 21절에서 말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논 것이라. 나는 앞으로도 더 뛰놀수 있어. 22절입니다.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이더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높임을 받으리라.

사람들 앞에서 내가 왕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더 낮은 자리가 있다면 내가 내려갈 수 있어. 그 말입니다. 사울의 실패의 원인은 겸손한 자가 교만의 자리로 옮겨간 것입니다. 다윗의 성공의 비결은 그가 그만한 자리에서 그 위치에서도 그는 가능했지만 그는 더 낮은 자리, 더 겸손한 자리를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에서 주님의 자녀의 모습이 나타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자녀의 특징중에 하나는 겸손입니다. 주님 앞에 겸손할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데, 과거에 겸손했는데, 우리가 교만으로 가고, 잘못된 모습으로 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세월입니다. 옛날에는 겸손했는데, 세월이 가면서, 나이가 들면서 교만해 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월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이 세월을 우리는 아껴야 합니다.

우리를 변하게 만드는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돈일 거예요. 부부도 가난할 때는 행복했습니다. 밤 11시에 들어와서 씻고, 밤 12시에 찬 밥 비벼면서도 부부는 행복했습니다. 서로 쑤셔서 서로 어깨 주물러 주면서도 부부는 행복했지요. 그러나 돈이 생기면서 좋은 집 생기면서, 좋은 자동차 생기면서 부부는 서로 만날 시간이 멀어지고, 서로 즐기는 시간이 달라졌어요. 서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이 문제예요.

돈이 문제입니다. 성도들도 때때로 돈이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반문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겸손한 것은 가난해서 그런 것입니까? 그 말은 앞으로 부자가 되면 겸손 안하고 부자 될 것이냐 그 말이예요. 내가 지금은 가난하니까 목사님 앞에 겸손하지만 내가 부자가 되면 내가 지금처럼 겸손할 이유가 있나? 그럴 것입니까? 그래서 겸손한 것입니까? 그럴 가능성이 많이 있지요?

돈 좀 벌고 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정말 트럭 하나만 사와도, 봉고차 하나만 사와도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아, 그냥 타요.’ ‘그러면 아니요. 목사님 축복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야 타지요.’ 그래서 목사를 강권해서 기도받고 짜장면이라도 대접하고, 그 마음에 목사는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살만 하면 수천만원짜리 고급승용차를 사도 목사에게 말 한마디 없지요.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샀어요.’ 당신은 알 것 없다 이것입니다.

제주도만 가도 감격해서 ‘목사님 우리 제주도 갑니다. 목사님 우리 제주도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극존칭을 쓰면서 안 하던 짓을 하면서 그럽니다. 저 사람이 제주도 가는 것도 저렇게 행복해 하는구나. ‘잘 다녀오세요.’ 문자메세지 보내고, ‘잘 다녀오세요. 행복한 추억 만드세요.’ 축복합니다.

좀 돈 좀 생기고, 좀 살 만 하면 한 두 달 안 보이지요. ‘어디 갔다 왔어요? 안 보이데요?’ ‘네. 미국 좀 다녀왔어요.’ 미국 좀 다녀왔대요. 잘 났다 그래. 처음에는 제주도만 가도 극존칭을 쓰고 다녀와서 뵙겠다면서 자기의 작은 사항도 보고하고, 집사 권사만 되어도 자기의 상황을 다 보고하고, ‘목사님 제가 이래서 교회를 못 옵니다.’ ‘이래서 제가 참석을 못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염려했는데,

이제는 미국 영국 갔다와도 당신 알 것 없다는 거지요. ‘보고해야 하지 않아요?’ ‘왜 내가 당신한테 보고해야 되느냐?’ 목사가 기겁하고 졸도할 지경이예요.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도 왜 당신한테 보고해야 되냐고 오히려 대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많이 달라진 것 아닙니까?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많이 변했습니다. 갑자기 변하면 자기도 알 텐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변해서 자기가 이제는 엄청난 교만의 자리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한지도 모릅니다. 왜 내가 당신한테 보고해야 되냐고 그 쯤이면 이제는 끝장이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그래서 어느 때는 그런 기도가 되요. 성도들이 다 물질의 축복 받고, 부자되기를 바라면서도 강남에 목회하는 분들 이야기 들어보면 ‘목사님, 재미가 없어.’ ‘왜요?’ 거기는 한 끼 식사 대접을 해도 10만원짜리 식사를 우습게 대접한대요. ‘우리는 여기서 4,5000원짜리 설렁탕도 좋아.’ ‘그래 그런 좋은데, 재미가 없어.’ 왜? 기본적인 겸손과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등록해도 두가지 조건을 건답니다. 무슨 조건이 또 있어요? 첫째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 것. 내가 무슨 직장을 다니는지, 공무원인지, 과장인지, 계장인지,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두 번째는 뭐예요? 심방오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청담동 사는지, 강남구에 사는지 오지 말라는 거예요. 주일날 가서 설교 듣고 만날 테니까 교회 외에는 만나지 말자는 거예요. 그래도 좋으면 등록하자는 거예요. 강남만 해도 이제는 살벌합니다. 공동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강남에 있는 목사님이 이구동성으로 재미없다고 그럽니다.

목회하는 건지, 뭐 하는 건지 모르겠대요. 목회자가 성도의 집에 가는 것도 갈 수도 없고, 오는 것 반가워하지도 않고, 그 분이 도대체 무슨 직장에 다니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할 수도 없고, 알면 기분나빠하고, 알면 떠난다고 하니까 가장 목회의 기본적인 관계가 단절된 그러면서도 외형적인 껍데기만 있는 공동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우리의 삶의 기초적인 출발점이 무엇일까? 우리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오늘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여호와 앞에서 내가 한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체면 생각하고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의 종의 자세로 한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것이 있다면 난 더 할 수 있는데, 오늘 우리는 분명히 달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22년의 적지 않은 역사를 가졌습니다. 이 역사는 때때로 자부심도 되지만, 이 역사가 때때로 부정적이고 변질시키는 연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금 주님 앞에 새출발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겸손입니다. 사울이 겸손만 잃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왕위를 폐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네가 겸손할 때에는 내가 너에게 머리가 되도록 할 것이며, 열두지파 중에 가장 머리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스스로 교만한 이후에는 나는 너를 버렸다. 교만한 자를 주님은 가만 두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여호와의 종의 겸손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여호와의 종의 겸손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 여호와의 종의 겸손이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기억하면서 겸손의 삶으로 여러분의 삶을 내어놓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시간이 지나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겸손의 흔적은 사라지고, 교만한 모습,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요, 우리의 정당한 자세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거울이라고 생각했던 말씀의 거울을 통해 우리가 새로워지기 원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고 하셨으니 말씀을 통해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며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게 하시고, 새로워 질 것은 우리가 적용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 겸손함을 가졌던 다윗을 생각합니다. 오늘 그 다윗의 겸손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 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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