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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골리앗과 맞선 다윗 (삼상 17:3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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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38.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39.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41.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 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인간세상에서 간혹 ?다윗과 골리앗?으로 비유되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강한 자와 약한 자의 대결을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이 기독교적인 의미로 쓰일 때 흔히 세상과 교회의 대결이나 또는 불신앙적 횡포에 맞서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대한 물체를 들어 올리는 대형 크레인을 ?골리앗 크레인?이라고 부릅니다. 골리앗은 블레셋 나라 가드 출신으로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약 3m이상)이나 되는 거대한 체구에다 머리에 투구를 쓰고 몸에는 갑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베틀채 같은 창을 잡고 있었습니다. 한편 다윗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서 전쟁에는 경험이 없는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이처럼 상상이 안되는 두 사람의 대결은 블레셋 진영과 이스라엘 진영이 대치하고 있는 엘라 골짜기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잠시 후 숨을 죽인 채 지켜보는 두 나라 병사들 앞에서 다윗이 던진 물맷돌의 일격에 골리앗의 거대한 체구가 땅에 나뒹굴며 싱겁게 끝이 났습니다.

그동안 골리앗이 밤낮 40일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히며 온갖 야유를 다 퍼부었으나 어느 누구도 거기에 맞서겠다는 엄두를 못 내었습니다. 마침내 사울 왕은 골리앗과 싸워 이기는 사람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또 자기 딸을 주어 사위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25절). 그때 아비의 심부름으로 그곳에 갔던 다윗은 사울 왕 앞에 나아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단신으로 적장과 맞붙어 싸우겠다는 다윗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가치관과 삶의 자세를 교훈 받을 수 있습니다.

I.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삶의 목표를 하나님께 두고 오직 하나님의 기쁘심을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다윗이 맨몸으로 골리앗과 맞서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40일 동안이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협할 때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기만 하였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면서도 막상 그들이 분을 내며 싸워야 될 자리에서는 모두들 침묵하거나 뒷걸음질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골리앗으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엘라 골짜기의 전쟁터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주님의 영광을 표방하는 교회의 모습이며 또한 말만 있고 행동이 없는 형식적인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1) 의분을 일으키는 다윗

다윗이 그곳에서 골리앗을 처음 보았을 때 옆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26절).

블레셋 사람들은 팔레스틴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으로 사사시대 이후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입니다. 다윗이 그들을 “할례 없는 자”라고 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 들임을 뜻합니다. 그들은 ?다곤?이라는 우상을 국신으로 숭배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 받은 이스라엘에 비교될 수 없는 열등민족입니다. 엘리 제사장이후 그들이 한때 언약궤를 빼앗아 가서 다곤 신전에 바쳤다가 큰 재앙을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삼상 5:2-4). 다윗은 이처럼 무도한 백성의 입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모독당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서 분노한 것입니다. 어느 때나 그리스도인은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자들입니다(빌 1:20). 어떤 형태로든지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되거나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당하는 것을 볼 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마음이 상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시 42:3).

(2)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사람들

사울 왕과 다른 병사들입니다. 이스라엘 진영에서는 모든 장졸들이 골리앗의 위용 앞에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군대를 지휘하는 사울 왕은 백성에게 용기를 일깨우고 한편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어야 할 것이지만 그자신이 먼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골리앗을 죽여주도록 바라고 현상금까지 내걸었습니다. 25절에 보면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적인 삶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나 주님 영광을 위하는 일에 자기가 먼저 나가고 솔선수범 하여야 됩니다. 그러나 사울 왕의 경우 자기의 명예와 지위를 보존하는 일에 급급하여 이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행동하였지만(삼상20:30-31),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는 현장에서는 침묵하였습니다. 책임 있는 사람이 자기는 뒤로 빠지면서 다른 사람의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은 참으로 비겁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방해하고 나오는 사람

다윗의 형 엘리압의 경우입니다. 다윗의 형제 여덟 명 중 엘리압을 위시하여 장성한 세 명이 그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 40일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골리앗의 위협에 기를 못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동생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골리앗과 맞서겠다고 했을 때 다윗을 크게 나무라며 몹쓸 사람으로 매도하였습니다. 28절에 보면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 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엘리압이 맏형으로서 동생에게 대한 충고라기보다는 그를 시기한 나머지 악의에 찬 모함을 하며 그 싸움에 못나가게 하려는 방해공작이었습니다.

군인으로 출전한 사람이 저희의 하여야 할 일을 못 다하면서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서려는 사람을 욕하고 방해 하는 처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사명을 못 다하는 사람이 자기를 변호하고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건전한 성도를 흔들고 끌어 내리는 일을 저지르곤 하는 것입니다.

II. 몸을 던져 헌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삶이요 신비로운 능력의 실증입니다. 일찍이 야고보는 지식과 경륜만을 자랑하면서 행동하지 못하는 신자를 향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질타하였습니다. 야고보서 2:22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진영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군대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싸운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자기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위험스런 현장에서 모두들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맨몸으로 골리앗과 맞서면서 헌신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 사명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그 일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빌 1:20-21).

진정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을 자기의 사명으로 여기는 사람은 어느 때,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그 일에 자기를 던져 희생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엘리압은 다윗에게 “들에 있는 몇 양은 뉘게 맡겼느냐”고 하며 나무랐습니다. 그의 기준으로 볼 때 다윗은 목장에서 아비의 양을 지키는 일만 해야 되는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 다윗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보다 더 우선되어야할 사명이었습니다. 어느 때나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 상위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롬 12:2).

(2) 임마누엘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 앞에 섰을 때 왕은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33절).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지난날 경험을 통해서 그 싸움에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하였습니다. 그가 목장에서 아비의 양을 지킬 때 사나운 맹수가 양을 움켜 가면 그 수염을 잡고 주먹으로 쳐 죽인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37절).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아가는 그 싸움에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시고 또한 반드시 이기게 하여 주실.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사울이 주는 갑옷과 투구를 마다하고 맨몸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39절). 골리앗이 다윗을 향하여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고 할 때(43절),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45절).

성도는 세상에서 한평생을 괴롬과 죄로 더불어 싸우는 생활을 하는 자이지만 하나님의 기쁘심을 위한 목적의 싸움일 경우 언제나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함께하시고 승리하게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됩니다(민 14:8).

III. 승리의 영광에 도취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되는 것을 보고 의분을 일으켰습니다. 마침내 몸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었을 때 그것으로 보람을 느끼며 만족하였습니다. 곧 사람들에게서 받게 되는 보상이나 인기 같은 것에서 초연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차원 높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보상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한일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거기 상응하는 보상을 받기 원합니다. 간혹 자기가 한일이 사람들에게서 과소평가 되거나 기대했던 대로 보상이 돌아오지 아니할 때 마음이 상하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여기 다윗은 그가 싸움에 나가기 전 사울 왕이 내건 보상금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자기 입으로 말한 상급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다윗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삼상 17:55). 그리고 약속한 그의 딸은 다윗에게 주지 않았고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습니다(삼상 18:19).

그렇지만 다윗은 그런 것에 미련을 가지지 아니했고 불쾌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며 피하려고 하였습니다(삼상 18:22).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명과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자기가 하여야 될 일을 하고나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나 세상적인 보상 같은 것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단5:1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상급을 기대하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광 따위에 미련을 두지 않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마 6:2).

(2) 세상인기에 들뜨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겸손히 자기 관리를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세상 살기가 힘들거나 어려울 때는 저절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지만, 일단 성공을 하고 형통케 되고나면 저도 모르게 교만해 지고 맙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역경에 봉착하고 환난을 당했을 때 힘들게 참아 나오는 것보다 성공을 하고 승리했을 때 자기를 지키고 겸손해 지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영웅적으로 환영하며 높여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고 사울 왕보다 다윗을 더 높이며 그를 칭송하였습니다(삼상 18:7). 이일로 인해 사울 왕은 다윗을 미워하였고 그날 이후 다윗을 죽이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를 추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백성들의 충동에 같이 들뜨거나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그가 하여야할 일에만 충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다윗의 겸손한 삶은 훗날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사무엘하 12:13에 보면 밧세바의 일로 인하여 선지자 나단이 찾아가서 엄하게 책망했을 때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노라”고 하며 무릎을 꿇었고, 또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을때도 “가만두어라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고 하며 겸손히 수용하였습니다(삼하 16:10).

이와 같은 다윗의 겸손은 그 속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그 마음속에 간직한 감격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고백하면서 항상 자기의 분수를 지키며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축복의 증거자입니다

사도행전 13:22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두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하나님나라의 역사경영에 다윗을 중심인물로 사용하였습니다(마1:1). 다윗을 이스라엘 왕조의 뿌리로 삼고 거기서 열왕이 나게 하였고 결국은 인류의 구주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나게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예수그리스도의 조상이며 선민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역대상 29:26-30에는 다윗 왕의 일대기를 마무리하면서 그가 누린 축복의 내용을 열거하였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왕위에 있었고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그가 죽은 다음에는 그 아들 솔로몬이 대를 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왕 된 일과 그 권세와 그의 치적들이 여러 명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기록으로 남아 후세사람들에게 교훈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를 헌신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후세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거울이 되는 축복의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설교 : 손 상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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