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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 또 하나의 가족 (엡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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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나왔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도 없고 주택가도 아닌 남산에서 매주일 이만한 인원이 모여 예배드린 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작한지 4년째에 3000명이 넘는 인원은 이런 곳에서는 최대한 모일 수 있는 인원인지도 모르겠다. 소위 목이 좋은 신도시 지역에서 시작했다면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모였을지 모르겠다.

이런 저런 모임에 나가서 성도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면. 열심히 사역을 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은 성도라고 생각하는 분인데도 “아직도 이 교회가 내 교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고 고민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런 마음을 가지신 것 같아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큰 틀은 어느 정도 잡았습니다. 예배드릴 장소도 있고 자녀들을 양육할 <청어람>도 장만했습니다. 사역도 웬만한 큰 교회 못지않게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큰 틀의 교회는 있어서, 나는 <높은뜻 숭의교회>에 예배드리러 간다고 말하고, 또 헌금도 내고 하는데, 내가 들어가서 직접 만지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교회는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외형적 성장 속도가 빠르다 보니까 공동체를 만들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를 알고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게 되려면 시간이 지나야만 합니다. 모이는 숫자로 보면 20년 이상이 넘은 교회인데 실제는 4년째 접어든 교회입니다. 외형적으로 20년 된 교회에 맞추어 그 내용을 채우려면 똑같이 20년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기에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전 교회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거나, 너무나 힘들게 사역하였기 때문에 여기 와서는 좀 쉬자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믿음을 충전 받고 위로받으려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예배만 드리고 말씀만 듣고 돌아가는 일도 한때이지 그것만으로는 교회의 참 맛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한계를 발견하고 교회를 옮기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참된 교회를 만들어 보려는 열망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좋은 교회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과 우리의 헌신과 인내라는 대가만 지불하면 반드시 좋은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설계도이며 신약시대 최초의 교회인 사도들이 세운 예루살렘 교회가 그 모델입니다. 그 교회는 첫째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과의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공동체란 쉽게 말씀 드리면, “나 없이는 네가 못살고 네 없이는 내가 못사는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의 모임” 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러한 공동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부릅니다.
권속이라는 헬라어 <오이케이오스> 는 ‘가족, 집’이라는 뜻입니다. 가족이야말로 성경이 교회를 묘사하는데 사용한 가장 중요한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영적 가족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것이며, 그 가족의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난후 영적 가족이 생겼습니까? 서로 얼굴이나 알고 만나면 인사하는 정도말구요. 매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고, 만나면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정말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있어주고 나를 붙들어 줄 사람들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그룹이 있습니까?

이 교회를 다녀도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고 나도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상태, 무리 속에 섞여 예배드리지만 누구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저 혼자 왔다가 돌아가지 않습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고, 내게 찾아와서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
그래도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의 과제는 <영적 가족>을 만드는 일이라는데 여러분도 동의하실 것입니다. 처음부터 3000명을 한 가족으로 묶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가장 작은 모임에서 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첫걸음은 열 명 안팎으로 모이는 <순>입니다. 하나의 순이 영적 가족이 되면 또 다른 영적 가족으로의 <순>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순이 거미줄처럼 얽혀지면 전체가 하나의 대가족, 믿음의 큰 가문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순>은 교회 속의 ‘작은 교회’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순>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 우리는 순을 통해서 <높은뜻 숭의교회>를 비로소 경험하게 됩니다. 순은 첫째 가정에서 모이기 때문에 <가정교회>이며, 둘째 구성원들이 서로 친밀하게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가족입니다. 가족 같은 교회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가족 흉내를 내는 것은 진정한 교회가 아닙니다. 순은 진정한 가족이 되어야만 맞습니다. 셋째, <순> 은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넷째, 목사 혼자 사역을 독점하지 않고,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은사를 이용하여 사역하기 때문에 만인 제자장직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이제 더 이상 방황하시지 말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교회 속의 작은 교회, <순>을 세우는 일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높은뜻 숭의교회>라는 간판은 있습니다. 그 간판에 걸 맞는 틀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교회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만질 수 있고 느끼고 볼 수 있는 살아있는 구체적인 교회를 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두 번의 성육신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보여 주셨습니다. 한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요1:14)
<유진 피터슨>은 이것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말씀이 피와 살이 되어 이웃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그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피부와 살을 취하셨습니다.

네 살짜리 여자아이가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캄캄한 어둠 속에 온갖 도깨비와 괴물들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이는 얼른 부모님이 자고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엄마는 아이를 진정시키고 나서 손을 잡고 다시 침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방에 불을 켜준 다음 아이에게 말했다. “애야, 무서워할 것 없어, 넌 혼자 있는 게 아니란다. 하나님께서 네 겉에 계시거든.” 그러자 그 아이가 말했다.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몸이 있는 사람이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

주님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는”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승천하셨습니다. 지상에서 다시는 예수님을 만나 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자신의 몸을 지상에 남겨두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성령을 보내주시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 부활의 생명을 이어받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성육신은 지상의 교회입니다.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주님은 마 28:19에서 사람들을 교회로 오라고 부르지 말고 교회가 세상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기관이나 건물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와야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만드신 교회는 가족입니다. 가족이라도 대 가족, 가문 전체가 내려가기는 어렵습니다. <순> 가장 작은 교회, 가장 작은 영적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형식도 조직도 없이 그들 속으로 스며들어 갈 수 있는 <순>입니다. 그들은 그들 겉에 있는 작은 <순>을 통해 날마다 세상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사랑, 예수의 은혜를 아무리 외쳐도 세상은 그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병들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실 것이요” 아무리 입으로 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허한 말이나 구호가 아니라 가까이서 그들을 사랑해 줄 몸, 즉 그들 겉에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들을 섬기며 돌볼 때 그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같은 사람은 만났습니다. 나는 예수의 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당신을 통해서 예수의 사랑을 맛보았습니다.”

아직도 순에 들어오지 않으신 분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100개 순에 평균 10명씩을 잡아도 2/3 정도가 영적 가족 없이 고아처럼, 독립군처럼 혼자 고독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저희 교회의 목회적 최우선 순위는 순사역입니다. 교회 속의 작은 교회, 순을 영적 가족으로 세우는 일에 모든 것을 다할 것입니다.

혹시 사람이 싫어서 이리로 오신 분들 있습니까? 그 아픈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계속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피하고 공동체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는 새로운 관계, 공동체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순>에 들어오셔야 할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공동체는 공기와 같이 인간이 생존하는 데 절대적인 환경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그렇게 살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는 하나님의 존재양식도 들어있다.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시는가? 관계로 존재하신다. 삼위일체 공동체가 아닙니까?

그냥 한분 하나님 유일신으로 존재하셔도 좋은데, 왜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일체가 되는 것을 택하셨을까? 그것보다 더 좋은 존재양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언제나 가장 좋습니다. 공동체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존재양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처럼 공동체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관계를 통해서 행복을 맛봅니다. 그러나 사탄은 공동체를 깨트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현상이 관계의 단절입니다. 죄는 공동체를 파괴시켰다. 공동체가 깨어진 결과 인간에게는 소외, 고독, 외로움, 단절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질병과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어지고 성령님이 들어오시는 곳에 는 언제나 공동체가 세워집니다.

구원받으셨습니까?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십니까? 그런데도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고, 관계를 끊어놓고 사십니까? 신앙이 좋은 사람은 관계가 좋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모르는 채 아무 관계도 없이 모여 있는 3000명 속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열 명이라도 서로 친밀감을 느끼며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한 그룹을 원하십니까?

2. <순>은 신앙성장의 가장 좋은 환경입니다.
순에서는 그저 앉아 구경이나 하는 구경꾼이 없습니다. 오직 참여만이 있습니다. 가정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한다. 교육에서 참여, 경험보다 더 좋은 학습방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가장 빠른 길은, 신앙이 성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물건들 중 일 년에 특별한 경우 한두 번 쓰고 마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들을 몇 가정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지금 갖추어 놓은 가재도구 들 중 상당수가 줄어 들것이며, 또 그것을 구입하는데 드는 막대한 돈도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이 자기 신앙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은사들을 가져야 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으시고 각자에게 꼭 필요한 은사만 나누어 주셨다. 왜? 공동체를 만드신 하나님은 서로 섬기고 나누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제 것 제 혼자 쓰는 데서 갖는 것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는 은사보다는 내게 없는 은사가 더 많을 것이다. 나는 내 있는 것으로 없는 사람을 섬기고, 그 대신 내게 없는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을 통해 언제든지 공급받을 수 있다면 서로가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한 가족으로 누리는 행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이제부터 <순>에 참여함으로 새롭게 발견해 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이 재미없고 믿음의 권태기가 오는 것은 공동체 없이 혼자서 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환란이나 시험이 와도 두렵거나 떨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나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순장과 순원들이 나와 함께 싸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늘 패했지만 가족이 함께 나가니 언제나 이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 공동체에 과감히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오히려 공동체를 시작하면 다른 교회로 옮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교회에 대한 인식의 부족이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면 성도로서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일 낮 예배에는 소수의 목회자가 인도하는 공식적인 예배에 강조점이 있다. 이때에는 구성원간의 교제는 예배 순서 가운데 상징적으로 나타날 뿐, 직접 대화하거나 식사를 나누거나 할 수가 없다.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경험으로 끝난다. 그 결과 대부분은 교회 공동체 안에 살아있는 구성원으로서 참여하기보다는 개인으로서, 그리고 주기 보다는 받기 위해서 교회에 온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순>을 선택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순>은 영적 가족이며, 작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하고 신앙이 자라는데 공기와 같이 절대적인 환경입니다. 결혼을 혼자 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 믿는 것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다른 사람에 대한 헌신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왜 순 공동체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가? 새롭게 관계를 맺게 되었을 때 지금 누리는 나의 행복을 빼앗길 수도 있고, 방해받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공동체에 들어가면 내가 더 많은 유익과 덕을 볼 것이다.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달라질 것이다. 얼마나 모순인가? 나는 남들에게 헌신하기를 주저하면서 남은 나에게 헌신해 주기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또한 공동체 안에서 나를 너무 노출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내게 은밀한 사적인 것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다. 사실 이전에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헌신을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배신과 상처뿐이었다. 이용만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누구에게든 마음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공동체는 내 자신을 잃어버리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아 주는 곳이다. 내가 사적으로 지키려 하고 방어하려는 나는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나입니까? 아니면 왜곡된 나입니까? 가면과 헛된 것으로 포장된 거짓 자아는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껍질을 깨고 알에서 나오는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할지라도 기꺼이 받아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제부터의 삶이라도 진정한 해방과 자유,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닌가?

언제까지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채 가면을 쓰고 위장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진정한 나 자신과 가치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셋째, 시간의 부족이라고 한다.
공동체가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은 하지만 결국 못하고 마는 것은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바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미 다른 공동체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 가정에 직장에, 학교에, 공동체는 필요한 줄 알고 다 원하지만 결국에는 거기에 들어갈 시간 때문에 주저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어디에 가치와 순위를 매기느냐에 따라 만들어 지는 것이다.

어떤 일을 2번째로 놓으면 항상 우선순위에는 밀리고 두 번째 시간이 날 때라야 투자하게 된다. 많은 교회들이 가정교회를 시작했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누구도 가정 교회에 최우선순위를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그렇게 분주한가? 그렇게 분주하게 사는데 일이 대출 끝나 가는가? 아니다, 끝도 없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문제, 더 많은 일거리가 만들어 진다.
왜냐하면 본질이 만들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리 한쪽을 기브스해서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한다고 하자. 그러면 한번 걷기 위해서는 몸의 모든 지체가 그 한쪽 발의 역할을 대신 감당해 주어야 한다. 두 손은 목발을 짚어주어야 하고 한쪽 다리는 힘을 배로 더 주어야 하고 두 눈은 다른 곳을 볼 수 없다. 온 몸이 균형을 잡기 위해서 얼마나 바쁜가? 그래도 제대로 걷는게 안된다. 그러나 다리가 성했을 때는 어땠는가? 걷는데 여유가 있었다. 각 지체가 자기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걸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다. 교회가 영적 가족으로서의 본질만 가지고 있으면 지금 바쁘게 하는 일은 절반 이상이 줄게 될 것이다. 가족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문제는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것을 해결하느라 또 다른 조직을 만들고 인원과 재정이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 있는 법을 배운다면 그래서 영적 가족을 회복하기만 한다면 적게 일해도 훨씬 더 많이 성취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권의 문제이다. 공동체의 성패는 우리가 어디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느냐에 달려있다.

넷째,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온 세상 일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만물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도들은 교회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으며 교회가 나의 필요를 얼마나 잘 채워주는 가에 따라 교회를 판단한다. 그래서 그 교회가 더 이상 자신의 필요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면 떠나버린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성도들을 가리켜서 육체에 속한 자라고 말했다. 예수는 영접했지만 마음의 중심에는 자신이 왕이 되어 있다. 주재권이 예수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 이렇게 사는 한 그의 삶은 예수 믿기 이전과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과 그 분을 위한 사역이라면 열성으로 달려들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영적훈련 제자훈련의 중심 과목은 이웃사랑이다. 왜냐하면 이웃사랑을 통해서만 자기중심적 사고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웃사랑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섬김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섬김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수준과 깊이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섬길 때마다 우리는 육체의 교만과 자기중심적 성향에 어퍼컷을 날리는 것이 된다.

천국의 DNA.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강력한 유전자 코드는 섬김이다. 이 DNA가 천국의 가치를 천상에서 지상으로 전이시키고 재생산할 수 있게 만든다. <순>에는 천국의 디엔에이가 들어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왜 우리는 공동체로 가야 합니까?

이제 교회 전체의 생명력을 위하여, 전통 교회 안에서 한계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신약적인 교회, 초대교회의 거룩과 권능을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경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회복해야 만 한다. 가정 교회를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하고 불신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를 삼아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한 모든 조건들의 무르익었다. 지금은 우리가 그 기회를 향하여 일어설 때입니다.
(설교 / 권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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