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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조연배우(7) : 주의 길을 예비하라, 세례 요한 (막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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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비자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제16대 에이브러험 링컨, 이 링컨 대통령은 한국 사람들 중에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미국역사, 아니 세계역사에 위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가 한 위대한 일은 바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노예해방을 이룩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다 흑인노예해방이 이 링컨 대통령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노예해방은 결코 링컨 대통령 한 사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닙니다. 링컨 당시에 그를 도와 노예해방을 이룬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링컨보다 수십 년 전부터 이미 노예해방의 꿈을 가지고 노력한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이 위대한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중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해리엇 엘리자베스 비처 스토우(H.E.B. Stowe)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성입니다. 스토우 부인은 그 이름보다 그녀가 쓴 소설로 더 유명하지요. 그 소설이 바로 여러분 모두가 어렸을 때 한번쯤은 꼭 읽어보았음직한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 우리말로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라는 책입니다. 스토우 부인은 독실한 퀘이커교 신자로서 당시 미국사회에서 흑인노예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10년 전인 1852년에 썼습니다.

여러분도 내용이 기억나십니까? 저는 이 어렸을 때 소설을 읽으며 눈물께나 많이 흘렸습니다. 켄터키 주에 사는 노예 톰이 마음씨 좋은 주인 셸비와 행복하게 살다가 주인이 사업에 실패하자 충실한 노예 톰과 그 아내 일라이저, 다섯 살 난 아들 해리를 노예상인에게 파는 장면이 눈물겹습니다. 또 톰이 우연히 생명을 구해준 에바와 그 아버지와 더불어 행복하게 지내던 중, 그들이 죽은 후 냉혹한 주인 레글리 밑에서 혹사당하다가 원래 주인인 셸비의 아들이 그를 다시 사들이기 위해 찾아오기 직전 죽는 장면에서 눈물 한 방울 안 흘린 정서 메마른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 소설은 발표 후 미국 사회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켜, 간행 1년 만에 30만 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출판사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오늘날도 30만부가 팔렸다고 하면 베스트셀러인데 당시 30만부가 팔렸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책이 미친 진정한 영향력은 발행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이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의 불씨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링컨 대통령도 이 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아 노예해방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후 이 스토우 부인을 백악관으로 초청했을 때 한 말이 유명합니다. 링컨은 스토우 부인을 보자 “이렇게 조용한 부인이 그 큰 전쟁을 일으켰군요”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노예해방의 주역은 링컨 대통령이지만 링컨을 포함한 수많은 미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노예해방에 대한 신념을 불러일으킨 사람이 바로 스토우 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이 이 가냘픈 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힘없는 작은 여인이야말로 노예해방의 위대한 역사를 예비한 위대한 예비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이 죽은 지 110년이나 지났지만 그 이름은 이 위대한 한 편의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오늘은 성경에 나온 위대한 예비자 한 사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구약의 위대한 조연배우들을 살펴보았지요? 엘리에셀, 이드로, 아론과 훌, 갈렙, 요나단, 모르드개가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이들은 모두 주연배우보다 조연역할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각기 다른 특징과 장점으로 주연을 빛나게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신약에 나오는 위대한 조연배우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로 선택된 사람이 누구냐?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왜 세례 요한이 신약의 첫 번째 위대한 조연배우가 되느냐? 신약의 첫 부분은 복음서로 시작됩니다. 또한 이 복음서의 주인공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와 신약성경 전체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 그 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먼저 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먼저 온 세례 요한, 바로 이 점에서 세례 요한이 신약의 첫 번째 조연배우로 선택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누가복음에 의하면 제사장 사가랴와 아내 엘리사벳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이 엘리사벳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친족 간이었으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먼 친척벌이 됩니다(눅 1:36). 간혹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사촌간이라고 설명하는 분이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아무튼 누가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 역시 예수님처럼 어머니 엘리사벳이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를 받고 잉태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 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늘 집에 가셔서 누가복음 1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보면 짧은 구절이지만 바로 세례 요한이 한 일, 즉 세례 요한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같이 찾아봅시다.

우선 2절에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 이 세례 요한이 이미 구약시대부터 예언된 사람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사야서만 인용한 것이 아니라 2절은 출애굽기 23장 20절과 말라기 3장 1절을 인용한 것이고 3절이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같이 마가복음 1장 2절과 3절을 읽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무슨 내용입니까? 하나님께서 장차 한 사람을 보낼 텐데 이 사람은 ‘너’ 혹은 ‘주’라고 표현된 분보다 앞서 보내질 것이고 그가 하는 일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일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무슨 뜻인지 하나씩 생각해 봅시다. 먼저 이 말씀에서 ‘너’ 혹은 ‘주’라고 표현된 분은 누구일까요?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먼저 누군가를 보낸다는 뜻인데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할 일은 첫째,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첩경을 평탄케 하는 일입니다. ‘첩경’이란 ‘고속도로처럼 쭉 뻗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제일 큰 대로를 뜻하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한 일은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예수님이 가실 길을 미리 예비하고 평탄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 어보지요. TV에서 사극을 볼 때 임금이나 높으신 대감이 가마를 타고 행차할 때 병졸이나 종 한 사람이 미리 앞서 가면서 길을 비키도록 하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극에 보면 이럴 때 뭐라고 말합니까? 목청을 길게 뽑으면서 “길을 비켜라 ⃝⃝대감 행차시다!”라고 외치지요? 조선시대에 이 소리를 ‘권마성’(勸馬聲)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종이나 병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가마가 가는 길이 방해 받지 않도록 앞길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이게 바로 길을 예비하고 첩경을 평탄케 하는 일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도 임금이 행차할 때 미리 앞서 가면서 일반 백성들을 교육하고 미리 머물 곳이나 숙식을 준비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종이나, 이런 일을 맡은 사람이야말로 세례 요한의 사명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백성들이 이 종이 무서워 길을 비킵니까? 임금님 지나가실 때 백성들은 길을 비킬 뿐 아니라 모두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는데 그게 이 종이나 병졸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란 말이지요. 백성들이 길을 비키거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그 종이나 병졸 뒤에 오실 분, 그 높으신 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예비하는 이 종이나 병졸은 자기 역할이 뭔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사명은 단지 내 뒤에 오실 분을 위해 길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는 일뿐이다. 내가 무엇이라도 되는 양 으쓱거리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사명만 다하면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

이제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먼저 3절에서 세례 요한을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묘사합니다. 광야라는 말은 건조하고 메마른 땅을 뜻하므로 오늘날로 치면 사막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 것일까요? 그것은 4절에 나온 것처럼 세례 요한이 실제로 유대 광야에서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광야라는 말은 반드시 메마른 땅만 뜻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살지 않는 곳, 버려지고 황량한 곳을 뜻합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이 메시지를 전한 유대광야는 석회질의 토양 위에 자갈과 바위가 널려 있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울퉁불퉁하고 황폐하고 메마른 불모지로 여기저기 뱀들이 기어 다니고 야수들이 출몰하곤 하는 버려진 곳이었습니다. 광야는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운 곳입니다. 이상한 것은 세례 요한이 사람들이 많이 사는 유대의 도시에서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이 버려진 땅, 황폐한 광야에서 메시지를 전했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은 6절에 보면 약대 털(낙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합니다. 황량한 광야에 사는 유목민들은 먹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메뚜기를 소금물에 담근 후 숯불에 익혀 먹었고 야생 꿀을 따 먹었습니다. 이렇게 세례 요한이 버려진 땅 광야에서 유목민들처럼 입고 먹으며 외롭게 메시지를 전한 모습은 말라기 4장 5절에 나온 엘리야를 연상케 합니다. 말라기 4장 5절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이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하신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엘리야는 물론 구약에 나온 선지자 엘리야를 뜻하기도 하지만 나아가 종말의 때(‘크고 두려운 날’)가 오기 전 하나님이 보내실 선지자(예비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엘리야는 열왕기하 1장 8절에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다’고 묘사하는데 여기서 ‘털이 많다’는 말은 ‘털옷을 입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엘리야가 마지막 때가 이르기 전에 오는 것처럼 세례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먼저 와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자신도 마태복음 11장 14절과 마가복음 9장 13절에서 세례 요한이 바로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라고 증언하고 계십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를 비롯해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면 언제나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다 보니 핍박과 죽음의 위협까지 당했습니다. 만약 선지자들이 인기나 편안한 길을 찾았다면 진작 하나님 말씀 전하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해 광야에서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먹으며 인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무시무시한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광야는 버려진 곳이며 외로운 장소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도 높은 사람, 귀한 분들 모여 사는 예루살렘 대신 가난하고 버려진 자, 소외된 사람들이 살던 갈릴리를 복음전파의 장소로 택한 것을 볼 때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또 자신보다 먼저 와서 예비한 세례 요한처럼 외롭고도 힘든 선지자의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나아가 세례 요한이 광야를 택한 것은 오늘 우리가 이 광야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오늘 우리가 이 광야 같은 험한 세상, 외로운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세례 요한의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비로소 참된 안식과 행복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7절부터 세례 요한이 전파한 메시지가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세례 요한은 자신의 처지와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나밖에 안 보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뒤에 나보다 더 능력 많으신 이가 오시는데 주인공은 바로 그분이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푸는 종노릇조차 감당할 자격이 못 되는 못난 사람일뿐이다.” 나아가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세례는 같은 세례지만 자신이 주었던 세례와 내 뒤에 오실 예수님이 주실 세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세례라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 요한이 준 세례도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세례와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세례였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도 세례라는 관습이 있었는데 유대교의 세례는 단지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입교예식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마가복음 1장 4절에 나온 것처럼 ‘좌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단순한 개종이나 입교의식이었던 세례에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의미를 부요한 획기적인 변화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뒤에 오실 그 분은 이 회개의 세례 정도가 아니라, 물세례 정도가 아니라, 불과 성령의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과 성령은 우리를 태워 깨끗이 합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역할은 하지만 죄를 사해주고 깨끗이 해주는 역할은 못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 뒤에 오셔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면 요한의 세례를 통해 죄를 고백한 죄인들은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은 그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낮춘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입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

이제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의 의로운 죽음을 살펴봅니다. 세례 요한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헤롯 안티파스에게 죽음을 당합니다. 헤로디아라는 여인이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빌립에게 시집을 갔다가 그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형제이자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본래 선지자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인기가 없을뿐더러 자기가 핍박당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지도자의 범죄를 보고 단호하게 지적하는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세례 요한도 이러한 지도층의 부도덕과 타락을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힙니다. 결국 헤롯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춘 춤을 보고 홀딱 반하여 “네가 원하는 것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 주겠다”는 섣부른 약속을 했다가 헤로디아의 계교에 빠져 세례 요한을 죽이고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 주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의롭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대중의 인기나 편안한 삶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 죽음은 또 하나의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설교 첫머리에 임금의 길을 예비하는 자는 그 사명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임금의 행차에 앞서 길을 예비한 후 자신은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비자가 자기 일을 끝마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면 그는 임금이 받을 예우를 대신 받게 될 것입니다. 용납될 수 없는 죄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기 일을 마치면 그야말로 조용히 사라져야 합니다. 이 사실을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한마디의 말을 남기고 역사상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입니다.

그 증거가 복음서 곳곳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3장 29절에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취하는 주인공은 물론 신랑입니다. 그런데 신랑 말고도 또 한 사람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결혼식장에 들러리로 선 신랑의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자기가 장가가는 것도 아닌데 신랑만큼이나 기뻐합니다. 요즈음도 좋지 않은 의미로 ‘들러리 선다’는 말 쓰지요? 하지만 세례 요한은 신랑이신 예수님 곁에서 기꺼이 스스로 들러리가 되었고, 그 들러리의 기쁨을 마음껏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30절에서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한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에서 세례 요한은 헤롯의 손에 비참하게, 아니 너무도 기쁘고 행복하게 성경의 무대에서 스스로 사라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겸손함과 낮아짐을 누구보다 잘 아셨기에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높여주십니다. 스스로 낮아진 세례 요한을 예수님이 친히 높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비록 세례 요한이 위대한 예비자요 가장 겸손한 자로서 예수님께 이렇게 엄청난 평가를 받았지만 천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비록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을 목격하거나 천국을 경험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특권이 세례 요한이 누린 모든 특권과 섬김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은 단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데 그쳤던 반면 예수님을 친히 목격하고 체험한 우리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면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지만 아무나 천국백성이 됩니까?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5) 하신 말씀에서 어린 아이 같다는 것은 무엇보다 겸손한 섬김의 자세를 뜻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겸손하게 섬기고 자기는 사라지는 사람이 될 때, 오직 내 뒤에 오실 예수님만 드러나고 나는 없어지는 자세가 아니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의 위대한 일을 예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국백성의 진정한 사명입니다. (설교 /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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