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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이 가까운 이 때 에 (마 24:4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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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중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방심하고 지내다가 큰일을 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우’(杞憂)라는 말도 있습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자꾸 생각하며 쓸데없이 걱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기우와 ‘설마 하는 방심’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하겠습니까? 방심입니다. 왜냐하면 기우는 마음속에서 끌탕을 해서 그렇지 큰 피해는 없습니다. 하지만 방심은 마음이 잠시 편할지 모르지만 자칫 잘못하면 큰일을 당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고 한탄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에 대낮 강도가 들었습니다. 마침 그 집 식구들은 모두 밖에 나가고, 노모 한분만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강도는 그 할머니를 살해하고 금품을 털어 갔습니다. 나중에 귀가해서 그 참혹한 사건을 확인한 식구들은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살인 사건이 우리 집에서 일어날 줄이야 ... !”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좀더 신경을 써서 노모를 돌보는 사람을 두었거나, 철저한 보안 시설을 갖추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 중에 종말에 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종말이 있음을 늘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설마 종말이 있으려고?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큰일 납니다. 종말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그 날이 인류 역사의 종말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라도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내 인생에 종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죽음으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종말을 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 신앙 자세를 가리켜 흔히 ‘종말론적 신앙’이라 부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종말론적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오늘부터 선교축제가 있는데, 종말론적 신앙의 중요한 일면이 사명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이번 선교축제를 통해서 선교적 사명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종말의 필연성과 임박성 :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는 인류의 종말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 종말에 관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짐에 따라 나타난 말세의 징조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말세 장’(章) 혹은 ‘소(小)계시록’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은 디모데후서 3장과 함께 보면 더 좋습니다. 마24장은 대개 외부적이며 거시적인 징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지진, 전쟁, 난리 등입니다. 반면 딤후3장은 내부적이고 미시적인 징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배금주의, 인간성 타락 등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군데를 상호보완적으로 보면 말세 징조를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하고 지나갈 게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혼동해서 사용하는데, 종말과 말세라는 말을 구분해서 이해하는 게 필요합니다. 종말(終末)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시점(point)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헬라어 알파벳 마지막 문자(ω)를 사용해서 오메가 포인트( ω poin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말세(末世)는 마지막 때의 일정한 기간(period)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 기간이 말세입니다. 그래서 1세기에도 말세, 지금도 말세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종말이 아주 가까운 시기라는 점에서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혹은 영어로 Terminal Age라고 부르는데, 직역하면 ‘종착역 시대’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종합해 보고 이 시대 상황을 관찰해 보면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① 종말의 필연성 : 여러분,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종말은 분명히 있습니다. 종말에 관한 한 ‘설마’ 라는 말은 1%도 사용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② 종말의 임박성 : 종말은 분명히 있을 뿐 아니라,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세의 징조들을 보면 1세기 때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 징조의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지고, 그 빈도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진, 전쟁, 난리, 재난, 기근, 적그리스도와 이단의 극성, 기후 변화, 전재지변, 인간성의 타락, ... 이런 현상들은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최근에 그 강도가 빈도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해 말 남아시아에 지진해일(쓰나미)이 발생되었을 때 전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도 매스컴이 온통 떠들썩하게 지진에 관해 보도했습니다. 한반도도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둥, 그러니까 잘 대비해야 된다는 둥 ... 그런데 몇 달도 채 안 되어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잊어버려도 그 현상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지진만 하더라도 강도도 심해졌지만, 그 범위가 급속도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겁니다.

또 얼마 전 신문 보도를 보니까, 지구의 온난화 현상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기온이 상승되고, 사막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겁니다. 한반도까지 그 영향권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상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얼마 후에는 한반도에 겨울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미 그런 조짐을 우리가 피부로 느끼잖아요. 계절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겨울인가 하니까 봄이고, 봄인가 하니까 어느덧 여름입니다.

그런데 종말이 임박했다는 가장 결정적인 징조는 세계 복음화입니다. 마24:1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세기부터 시작된 십자가 복음 전파는 최근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선교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상에 2만 4천 종족이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복음이 미치지 못한 미전도종족은 이제 7천~8천 종족 이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적인 도시화 현상과 정보화 현상으로 문자 그대로 지구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로 가면 세계 복음화는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히 이 시대는 말세지말이요, 종말이 임박한 때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면에서 종말이 임박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위에 언급한 인류역사적인 종말도 중요하지만, 개인적 종말도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종말은 죽음으로 닥쳐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에게 닥쳐올 수 있는 정말 임박한 종말인 것입니다. 젊다고 건강하다고 설마 하고 방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우리는 역사적 종말이든, 개인적 종말이든 그 임박성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종말을 의식하는 삶 : 신앙 관리, 사명 관리

그러나 종말을 의식한다고 해서 호들갑떨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단들이 대개 그렇죠. 특히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아예 재림의 연월일시(年月日時)까지 정해놓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자기들이 계시를 받았다며 난리를 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마24:36 보면 재림의 정확한 일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만일 재림의 정확한 일시를 알려주면 인간의 본성 상 아마 당일치기로 신앙생활을 할 겁니다. 그 전날까지 진탕 놀다가 마지막에 잘 하는 척 할 겁니다. 그런 본성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는 겁니다. 말하자면 항상 잘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말을 의식하는 가장 지혜로운 모습은 항상 깨어 있는 ‘건강한 긴장감’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재림할지 모르니까, 개인의 종말이 언제일지 모르니까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언제 주님을 만나도 당당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런 삶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두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① 신앙 관리 : 구원의 확신 재확인

본문 42절~44절을 보면 ‘도둑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도둑처럼 오신다는 겁니다. 이 말은 윤리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갑자기 닥치는 불가예측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렇습니다. 재림은 반드시 있지만, 그 정확한 시기를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준비할 게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신앙입니다. 확실히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언제 어디서 주님을 만나도 자신 있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천국에 갈 수 없다면 모든 신앙생활은 헛것입니다.

물론 이미 예수를 믿은 사람은 이미 죄 사함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구원의 확신을 날마다 재확인하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죠. 외국 여행을 할 때 비행기 좌석을 예약합니다. 그런데 어떤 충고를 받죠? 비행기 타기 전 이틀 전쯤에 반드시 재확인(Reconfirm)을 하라는 겁니다. 혹시라도 최소가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취소될까봐 걱정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확인 철차가 필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선 나 자신을 위해서 좋습니다. 구원을 확신을 확인하면 항상 당당합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해도, 주님 만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영적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남에게도 좋습니다. 내가 천국 갈 때 확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가족에게 위로가 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의 실재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② 사명 관리 : 복음전도와 선교의 사명 감당

본문 45절~51절을 보면 ‘두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의 비유입니다. 주인이 일을 맡기고 멀리 갔다 옵니다. 지혜 있는 종은 항상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들이닥치면 칭찬과 상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악한 종은 주인이 나중에 오겠지 하며 방심한 나머지 허랑방탕하게 지냅니다. 그러다 주인이 갑자가 들이닥치면 혼 구멍이 난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직 이 세상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행복만을 위한 게 아닙니다. 행복은 부산물입니다. 행복만을 위한다면 당장 천국 가는 게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곳도 천국만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갈 사람들이야 이 세상이 전부니까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하지만, 성도들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이 한시도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명을 맡은 종이요 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됩니다.

우리가 맡은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죠.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복음 전파입니다. 가까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요, 더 나아가 온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입니다.

[3] 종말과 선교 : 가든지 보내든지 감당해야 할 선교 사명

앞서 말씀드린 대로 종말이 임박한 최대의 징조는 세계 복음화입니다. 그러므로 선교 역사를 보면 종말을 예감하게 됩니다. 특히 종말이 가까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선교 사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며 남긴 유언적 지상명령이 곧 선교입니다. 선교 사명의 완수를 위해 주님은 성령을 통해 오늘도 교회들과 성도들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선교를 지향하는 월드 크리스천(World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들은 지역 사회 복음화뿐 아니라 세계를 품고 선교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교회는 월드 처어치(World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교회를 담임하더라도 세계를 품고 선교 지향적 목회를 하는 월드 패스토(World Pastor)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행1:8 말씀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 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가 이 선교 명령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① 주님의 놀라운 은혜 :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시고, 독생자 예수님은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 우리는 당연히 주님이 주신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② 선교의 빚을 진 우리들 : 특히 우리 한국은 국가적으로 교회적으로 선교의 빚을 많이 지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화의 과정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끼친 영향은 문자 그대로 지대한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한국교회가 이만큼 부흥한 것은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의 덕분입니다.

우리 한국에는 역사 정말 좋은 선교사들이 와서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외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우수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헌신적인 분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헐버트 선교사를 잠시 소개해 봅니다. 그분은 고종 황제 시절 영어 교사로 이 땅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신학을 갓 졸업한 청년 선교사였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압력으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땅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유학하던 시절 헐버트 선교사는 그를 최선을 다해 후원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다방면으로 수고했습니다. 그러다 해방 후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방한 기간 중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국장급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많은 백성들이 애도했습니다. 그의 평소 소원대로 이 땅에 묻혔는데, 그 묘지가 양화진에 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져 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③ 한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  

우리 민족은 참 희한합니다. 짧은 기간에 교회가 부흥한 것도 그렇거니와, 많은 한민족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아갑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 한국은 부존자원도 없고 사람만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세계화 시대에 두 가지를 통해서 먹고 삽니다. 세계에 나가 장사하고, 머리를 쓰고 그래야 삽니다. 그런데 한국인만큼 교육열이 높은 민족이 드뭅니다. 그리고 현재 전 세계 구석구석 한국인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대충 550만~600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는 데마다 교회가 섭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가는 곳에는 항상 김치와 처치(church)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각처에 선교사가 나가 있는데, 공식적은 숫자가 1만 명이 넘어섰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교회가 가장 활발하게 부흥되는 지역은 중국, 남미, 아프리카입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회심하고, 수백 개의 교회가 섭니다. 그러나 그 나라들에게 불쏘시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한국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선교 사명에서 예외의식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선교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렇다고 다 선교지로 나가라는 말은 아닙니다. 선교는 단체 경기와 같습니다. 나가는 선교사도 있고, 그들을 후원하는 보내는 선교사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든지 보내든지(Go or Send) 둘 중의 하나는 꼭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는 선교사’로 가면 됩니다. 아니면 ‘보내는 선교사’로 헌신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내는 선교사로 선교에 동참할 수 있을까? 간단하게 말하면 내 가족 같이 생각하면 이야기가 끝납니다. 예를 들어 가족 중 한 사람이 유학이든 사업이나 직장 때문이든 외국에 나가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염려하면서 기도할 겁니다. 자주 연락을 할 겁니다. 그리고 필요한 물질이 있나 살피면서 보내줄 겁니다. 선교사를 가족 중 하나로 여긴다면 마찬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 이따금 연락하고, 기도해 주고, 물질을 보냅니다. 그것이 곧 선교기도, 선교헌금, 선교 편지 교환 등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루 24 시간 중 단 5~10분도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지 못한다면, 자기를 위해서는 물질을 아무 부담 없이 쓰면서 한 달에 선교사에게 식사 한 두 끼 대접하는 금액 정도도 헌금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구원의 은혜를 알고, 사명을 아는 사람인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관심은 얼마나 벌었는가, 소유했는가 하는 겁니다만,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소유 중에서 얼마나 드렸는가 하는 겁니다. 많은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많이 드린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 앞에 부름 받을지 모릅니다. 눅12:20~21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때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물으실 겁니다. 그때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드렸는지를 물으실 겁니다. 눅12:47~48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그 때 할 말을 준비해 놓으십시오. 제가 목사이고 여러분이 제가 섬기는 교인들이라도 대신 말해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준비해야 됩니다.

성도 여러분! 종말이 가깝습니다. 우리 인생도 얼마 남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종말이 가까운 이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할까요? 신앙 관리 잘 하십시오. 구원의 확신을 날마다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명 관리 잘 하십시오.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 잘 감당하고, 오늘 주님이 부르셔도 할 말이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특히 선교축제 맞이하여 다시 한번 각성하시고, 선교 사명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 주님이 오시는 그 날, 아니면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날 당당히 천국을 들어가시고, 잘 하였다고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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