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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물가의 여인 (요 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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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칠전에 어떤 성도님이 저에게 이 메일을 보내 왔습니다. 정기적으로 동창회를 가지는데 동창 중에 어느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 장로님의 딸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는데 학교 다닐 때에는 모범생이었고, 공부도 잘하고, 이성적이고 또 개성이 강한 동창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기쁨이 무엇인지 감사가 무엇인지 그저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의무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중 어느 교회에 가 보았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가 보니까 기쁨이 충만한 교회, 은혜가 충만한 교회 그래서 같은 하나님을 믿는 교회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이 동창생이 그 교회에 다니고 난 다음부터 완전히 변해 버린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하고 그래서 이 메일을 보낸 성도님에게 우리 교회 한 번 와 봐라 분명히 너도 달라 질것이다. 그리하여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 한 번 가보았습니다. 어떻게 온 성도들이 기쁘고, 감사가 넘치느냐 고 물어 보았습니다. 기도만 하면 즉각적으로 기도의 응답을 받으니 우리 교인들은 매일 기쁘고, 감사가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 교회에서는 기도만 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 교회에 가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판단이 쓰지 않습니다. 

작년 11월 4일에 골로새서 1:26-29본문을 가지고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부재로: 보험신앙과 그리스도 안의 신앙)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신앙은 세 가지의 단계가 있습니다.

1. 보험신앙입니다. 

보험금을 넣듯이 하늘나라 가려고 의무적으로 억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아이고 오늘이 벌써 주일이네 교회 가지 않아 지옥가면 어떻게 하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 지옥가면 어떻게 하지? 

의무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거기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그렇게 믿어도 하늘나라는 갑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재미가 없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병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단이 나왔는데 당신 이제 얼마 살지 못합니다. 주변을 정리 하십시오. 아직도 난 젊은데 내가 죽다니 의학적인 방법으로는 살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살려 주십시요. 그래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병원에 가보았더니 그 참 희한한 일이네 암 덩어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때 기쁨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 구나! 

저는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너무 너무 못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만  점수가 나오지 않아서 화장 실청소를 많이했습니다. 어느 날 울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공부를 잘하게 해주시든지, 운동을 잘하게 해주시든지 노래를 잘 부르게 해주시든지, 그림을 잘 그리게 해주시든지, 무엇 하나는 잘하게 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후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머리는 나쁘지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공부를 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감사 할 수가 있습니까?

무정자증으로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안수기도를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아기를 낳았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IMF때 회사가 부도나서 망하게 생겼는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적적으로 은행융자를 얻게 되어 회사가 살아났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런 감사는 처음에는 너무 너무 감사가 넘쳐흐르고, 기쁨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시일이 지나 갈수로 그런 감정들은 자꾸만 식어간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는 오늘은 주일인데 교회는 가긴 가야 되는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갈등 하면서 기쁨과 감사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허전합니다. 이것을 ‘영적 갈급함’이라고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다시 예전의 감정을 되찾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습니다. 부흥회에 참석을 해 봅니다. 그런 감정이 온 것 같았는데 부흥회가 끝난 다음 또 다시 마음이 허전합니다. 그러면 여기 저기 부흥회가 있는 곳이면 다 쫓아 다녀 봅니다. 그런데 자꾸만 약발이 약해집니다. 그러면 부흥회에 쫓아 다녀서는 안 되겠구나! 그러면 기도원 집회에 한 번 가 봐야지! 그것도 임시 조치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부지런히 기도원에 쫓아 다녔지만 요즈음은 기도원에 쫓아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은사집회 하는데 한 번 가보자! 은사집회에 가서 방언 받고, 예언하고, 입신을 해서 하늘나라에도 갔다 오고, 지옥에도 갔다 오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막 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입니다. 

요사이 젊은이들 에게 열린 예배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기에 가서 마음껏 손을 흔들면서 주여 주여 외치면서 찬송을 하면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 같은데 그것도 일시적입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기쁨을 느끼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육신적인 요구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 주시는 것, 예를 들어서 병을 고쳐주신 다든가 가난한 사람의 기도를 듣고 부자가 되게 해주신다.

2. 그것보다도 수준이 더 높은 것은 영적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언을 하게 되고, 예언을 하게 되고,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면 병이 낫고, 입신을 해서 하늘나라에 갔다 오고 이런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은 육신적으로 병이 낫고 사업 실패하여 기도해서 사업이 제대로 되는 것 하고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도 일시적입니다.

시일이 갈수록 자꾸만 식어져 갑니다.  계시록 2장에 보면 성령이 ‘에베소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다 좋은데 ‘네가 처음 사랑을 잃었다. 회개하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 가서 촛대를 옮기겠다.’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사랑이 기도해서 기도의 응답이 왔을 때 뜨거운 감사, 뜨거운 열정 이것이 처음 사랑이라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체험했던 기도 응답을 받고 감사와 감격, 뜨거운 열정은 우리 성경에서 말하는 처음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식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처음사랑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내 안에 그리스도와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될 때에 그 때 나오는 기쁨, 그 때 나오는 감격 이것을 체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 가서 바울신학을 공부할 때 ‘엔 그리스도’ 신비주의라고 하는 바울의 독특한 신비주의 사상에 접하개 되었습니다. 영어로 하면 in christ, 우리나라 말로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체험 ‘그리스도는 내 안에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체험을 하게 되면 그 때 나오는 기쁨과, 감사와 감격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도 했을 때 응답을 받았던 기쁨은 항상 나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고침 받고, 내가 가난했을 때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부자로 만들어 주셨고, 내가 머리가 나빠서 하나님께 기도 했더니 머리가 좋아지게 만들어 주셨고, 대학입학 시험에 떨어진 줄 알고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 했더니 붙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것은 다 내 중심의 기쁨과 감사일뿐입니다.

그런데 ‘엔 그리스도의 신앙’ 안에 들어가면 정 반대의 기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감사가 나옵니다. 행 5: 41절 사도들이 예수 전한다고 해서 공회에 붙잡혀 가서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시는 예수 이름을 전하지 말라 고 내어 보내주었습니다. 

매 맞고 나오면서 하는 말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바울과 실라가 에베소에 가서 전도하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에게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주인이 돈 벌이가 되지 않으니까 바울과 실라를 붙들어다가 관가에 고발을 하였습니다. 관가에서는 바울과 실라를 매를 때려서 피투성이가 되게 만들어서 빌립보옥에 가두었습니다.

엔 그리스도의 신앙이 아니고 기도의 응답을 받아가지고 기쁨을 가진 신앙이라면 감옥에서 무어라고 했겠습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전도했는데 이렇게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억울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빨리 석방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기도가 나왔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 전하다가 매를 맞고 주님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이 너무 기쁜 것입니다. 

초저녁에 감사의 찬송을 하다가 잔 것이 아니고 한밤중 까지 주를 위해서 매를 맞다니 주를 위해서 감옥에 갇히다니! 이런 기쁨과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처음사랑인 것입니다.

  처음사랑은 그렇게 쉽게 식지를 않습니다. 처음사랑은 이기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오늘의 본문 말씀을 왜? 우물가의 여인의 본문을 택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는데 사마리아 성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 예수님께서 피곤해서 잠시 쉬는 동안에 제자들은 사마리아 성에 떡을 사러 갔습니다. 어떤 여인이 물동이를 가지고 물을 떠가려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천한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너와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네가 그에게 생수를 청했을 것이요 그러면 내가 생수를 너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 또 목이 마르지만 내가 주는 생수를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주여! 그 생수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엉뚱하게도 내 남편을 데리고 오라 이 여인은 말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말이 옳도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 너와 같이 사는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니 내 말이 옳다.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다 아는 이 분은 큰 선지자임에 틀림없다. 내가 알기로는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했는데 언제쯤 오십니까? 너와 말하는 그가 곧 그리스도다. 

여인은 너무나 좋아서 물동이를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예수님을 모시고 그 말을 듣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떻게 결혼을 다섯 번 이나 했을까?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여인은 결코 음란한 여인도 아니고, 나쁜 여인도 아니고, 참으로 매력적이고, 착한 여인인데 어떻게 해서 결혼을 다섯 번이나 해서 지금은 결혼도 하지 아니하고 남의 남자와 같이 살게 되었는지 이 여인은 참 아름다운 여인이고, 참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결혼에 대한 인식의 잘못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연애감정하고, 진정한 부부애하고를 구분하지 못하여 이런 끔직한 비극이 찾아왔지 않을까 생각하여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연애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연애할 때는 죽고 못 삽니다. 항상 붙어있어야지 떨어지면 불안하고 보고 싶고 그런데 연애감정은 오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오래가려고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연애감정은 없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식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혼을 해서 살게 되면 자연히 없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연애감정이 없어지는 것을 사랑이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 했습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멋있고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주 늠름하고, 재산도 많고, 멋있는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잠시도 떨어지면 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꿈같은 신혼생활은 자꾸만 식어져가고 나중에는 허전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것을 사랑이 없는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무덤과도 같다고 했는데 내가 이렇게 살 필요가 없지 않는가? 차라리 헤어지자 그렇게 해서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너무나도 매력적이고,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남자들이 가만히 놓아두지를 않습니다. 재혼이라도 좋으니 남자들이 결혼하자고 야단입니다. 이번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 정말 괜찮은 남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정말 꿈같은 신혼생활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서 또 사랑이 식어져 갔습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을 내가 왜 하나! 그리하여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다섯 번 까지 다 이런 식 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다섯 번 다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연애감정은 오래가지를 않습니다. 결혼생활을 하게 되면 연애감정은 식어지게 되고 진정한 부부애가 새로 생겨난다는 것을 이 여인은 몰랐습니다.

동고동락하면서, 싸우면서, 사랑하면서, 부부싸움은 칼로 물배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연애감정하고는 차원이 다른 깊은 부부애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어떤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남편이 식물인간이 되어서 누워 있습니다. 약값이 엄청나게 들어갑니다. 

남편이 소생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빨리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다. 돈만 들어가고 식구들만 고생시키고 특히 아내의 고생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에게서 나오는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 죽지 않게 기도해 주십시요. 식물인간이라도 좋습니다. 돈 많이 들어가도 좋습니다. 내가 고생이 되어도 좋습니다. 그저 내 옆에 있기만 하여도 저는 만족합니다.

이 남편이 부인에게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짐밖에 되는 것이 없습니다. 손해만 끼칩니다. 그래도 남편이 내 옆에 있기만 해도 좋으니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해 달라고 기도 해 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부애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근무할 때 국어 선생님이신 신 선생님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신 선생님 사모님은 아주 매력적이고, 일류대학을 나온 문학소녀 이었습니다. 앉아서 이야기를 해보면 감칠맛이 납니다. 남의 부인이지만 참 괜찮은 여자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면 전혀 달랐습니다. 나는 우리 부인 때문에 못살아 내가 미칠 것 같아?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니까 연애감정에서 깨어날 줄 모르는 사모님이었습니다. 학교에 출근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합니다. 

전화가 옵니다. 신 선생님 계십니까?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몇 분에 나옵니까? 몇 분에 나옵니다. 여보! 나 당신 사랑해! 얼마나 좋습니까? 

신혼생활 때 같으면 환상적이겠지요. 아기 둘을 놓았는데도 계속해서 연애감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한 번은 겨울밤에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여보 오늘 눈 오는 밤에 덕수궁 한번 거닙시다. 이 추운겨울에 미쳤나? 덕수궁은 왜? 우리가 연애할 때 눈이 펑펑 맞으면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는데 얼마나 환상적이었습니까? 그런 생각나지 않습니까? 사람 피곤해서 죽겠는데 그래 가자 덕수궁까지 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눈이 펑펑 오는 날 추워 죽겠는데 신 선생님의 사모님은 아주 낭만에 젖어서 시를 읊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열 시가  되고 열한시가 되고 열두시가 되었습니다.  여보!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이런 낙만을 두고 돌아가다니 말도 안 된다. 나는 피곤해서 죽겠는데 내일 또 학교에 가야 되는데!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가 봅니다. 

이런 밤에 이렇게 좋은 곳을 놔두고 어떻게 집으로 갑니까? 한 시가 되었는데도 집으로 돌아 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신 혼자 실컷 즐기고 오라 나는 피곤해서 안 되겠다. 그렇게 하여 집으로 돌아왔더니 펑펑 울면서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당신이 변했다고 나는 당신 같은 사람하고는 못 살아요. 보따리 싸서 친정으로 가면 몇 칠 동안 집에 오지를 않습니다.  예 선생님! 무슨 팔자로 이런 여자를 만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연애 할 때는 연애감정이 황홀하고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없어져야 합니다. 어떻게 밤낮 그렇게 하면서 일평생을 살아갑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연애감정과 같은 얕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는 사랑 배우자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고 어찌하든지 남편으로 인하여 내가 만족하고 내가 환상적이고 나의 로맨틱한 감정을 다 만족시켜 주는 그런 남편 그럴 때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그것은 연애감정이지 진정한 부부애는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중매를 하는데 몇 번씩 선을 보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이는 자꾸만 먹어가고, 직장도 그만하면 괜찮고, 학벌도 그만하면 괜찮고, 인물도 그만하면 괜찮고 연애감정은 전혀 없는데 의무적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생활을 하는데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애도 낳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연애감정이 없는 부부생활 그래도 애는 낳고 잘 살아가고 있겠지요. 그런데 재미가 없지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아무런 감사도 없이 아무런 감격도 없이 의무적으로 교회 다니는 보험신앙 그런 것은 별로 좋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도를 하다가 육신적인 체험이라든지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면 그때의 기쁨과 감격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연애감정과도 같아서 오래가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을 자꾸만 추구하다가 보면 우물가의 여인처럼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자란 처녀가 시집을 갔습니다. 신랑교회에 가 보았더니 영 은혜가 되지를 않습니다. 애기 하나를 낳아서 신랑을 몇 년 동안 설득을 해서 우리 성도교회에 갑시다. 우리 성도교회는 이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성도교회는 은혜가 넘칩니다. 이렇게 해서 신랑하고 애기하고 세 식구가 우리 성도교회로 왔습니다. 열심히 다니더니 얼마 전에 다른 교회로 갔다고 해요. 성도교회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에는 사랑이 넘쳐난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가서 얼마나 오래 갈 것입니까? 처음에는 그렇게 사랑이 넘치는 것 같은데 오래 있어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교회로 가봅니다. 그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자꾸만 옮기다 보면 계속해서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밤낮 옮기다가 볼일 다 봅니다.

결코 바람직한 신앙이 아닙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됩니다.

교회가 사랑이 없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교인이 하는 이야기 입니다. 

엔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교회에 사랑이 없다 하면 더 좋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해야지 사랑이 없는 교회 교인들을 내가 먼저 사랑을 해야지 사랑을 못 받아서 사랑이 갈급한 교인들을 내 가슴에 품고 안아야지 차원이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 성령께서 계시록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에 한 처음사랑을 잊어 버렸다는 것은 이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의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위에 네 교회를 세우리니 천국열쇠를 네게 주겠다. 베드로는 너무 기뻤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칭찬받고 나는 주님을 죽도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 한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방인의 손에 팔리어서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으리라 베드로가 주님을 너무 사랑한다고 한 말이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님에게 이루어 지지 아니 하리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베드로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이 사랑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단의 역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전날 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너희 중에 나를 팔자가 있으리라 그리고 목자를 치리니 양떼들이 다 흩어지리라 주님을 끔찍하게 사랑한 베드로가 주님에게 울부짖으면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 뜻으로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부인 할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 너 그것이 사랑이 아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는데 실패를 했습니다. 조그마한 계집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저주하고 부인했습니다. 내가 기도해서 유익이 되어 기뻐하는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 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언제 식어줄 모르고 언제 배반할지 모르는 그런 사랑입니다. 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랑, 이 사랑이 처음 사랑인 것입니다. 에베소 교인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을 갖게 되었을까요? 에베소서 1:17-19절에 보면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인을 위해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로 구하노라’

기도해서 기도 응답받고, 가난한 사람이 잘 살게 되고, 병들었던 사람이 낫게 되고, 미련한 사람이 공부를 잘하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우리의 마음눈을 밝히사 우리의 영안을 밝혀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로 할 수 없는 은혜 그것을 깨닫기를 원하노라. 

그것을 깨달을 때에 엔 그리스도의 신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주를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이 기쁘고, 감사하는 것으로 알고 주님 때문에 매를 맞고, 주님 때문에 감옥에 걷히고, 주님 때문에 손해보고, 주님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럴 때 나오는 기쁨, 이런 것이  식을 줄 모르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사랑인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하면 성령 받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와서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때 우리는 성령을 쫒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고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세요! 성경을 보면 기도하는 것 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신다고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눅18장에 항상 기도하되 낙심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하여도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하여도 내 뜻과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기도만 하면 들어준다? 세상에 그런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곳은 무엇인가 잘못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카나다에서 하고 있는 빈야드 운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기뻐해야지 기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그래서 기쁨에 대해서만 계속해서 강조하고 기쁨이 없으면 죽은 신앙이고 기쁨이 없는 성도는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합니다. 

기쁨이 넘치면 웃음이 나와야 된다. 예배 시간에도 웃습니다. 껄껄대면서 웃습니다. 찬송할 때도 웃고, 기도할 때도 웃고 목사님이 설교할 때도 웃고 우리는 아멘이라고 하는데 껄껄대고 웃습니다. 나중에는 짐승의 소리를 냅니다. 그 교회에만 가면 기쁨이 충만해서 가슴이 터질 것 만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빈야드 운동이 들어오다가 많은 비판을 받고 지금은 수그러들었습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병고치고, 귀신 쫒아내고, 이적과 기사가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사를 극대화 시켜서 기독교가 병고치고, 귀신 쫒아내고 이런 종교로 이끌어 나가면 이것은 신비주의로 나가고 맙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축복의 종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복 받는 것만 극대화 시키면 기복적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일부에서 하고 있는 그런 치우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 거기에서 진정한 기쁨과 진정한 감사와 진정한 감격, 영원히 식지 않는 이런 아름다운 은혜가 우리 가슴속을 차고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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