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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그늘아래 (시 9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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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압니다. 뜨거운 태양이 사정없이 비출 때, 태양을 피해서 시원한 그늘을 발견하면, 태양이 식을 때까지 시원하게 쉴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가운데에도 이와 같은 그늘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위기가 닥쳐와서 빨리 이 위기의 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구설수에 올라 헛된 소문이 돌고, 아무리 이해시키고 싶어도, 나의 진심이 전해지지 않을 때, 사람 때문에 시험이 들어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마동안 쉬고 싶습니다. 이보다 더한 위기도 있습니다. 배우자를 잃거나, 자식을 잃었을 때, LA 사건처럼 천재지변으로 인한 해를 입거나,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인 손실을 입었을 때 우리들의 충격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한참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는 사람을 만나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의 말도 도움이 되지 않고, 그저 혼자 있고 싶지만, 텅빈 가슴에 더 깊은 절망이 다가올 때, 바로 이때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그분의 위로를 들어야 할 때입니다. 뜨거운 태양 앞에서 그늘로 피한 것처럼 환난이 지나가고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때까지 여호와의 그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 속에는 바로 이와같이 환난가운데서 여호와의 그늘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왜 여호와의 그늘이 필요합니까?

인생은 하루도 예측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였습니까? 본문을 이해하려면 전쟁터를 연상하면 됩니다.
"새 사냥꾼의 올무, 극한 염병,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화살,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 " 등입니다. 기아와 전쟁, 기근이 있는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안전하다고 하는 미국 땅에서도 우리의 경험을 돌이켜 본다면 이 말이 실감날 것입니다. 지난 9.11 테러사건은 우리에게 천국과 유사하고, 아무도 해할 수 없다고 여기던 미국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교훈을 던져 줍니다. 인간의 환상에 가려진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안전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놀램이 찾아옵니다. 정말 예수없이 이 세상을 들여다 보면 살만한 가치가 없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위기의 연속입니다. 인생 전체에 걸쳐서 위기는 항상 존재합니다.

유년기: 유괴, 우연한 사고, 질병, 부모가 이 위기에 대한 걱정을 담당합니다. 이것만 극복하면 될 것같지만 이제는 됐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없습니다. 보십시요.
청소년기 : 입시의 연속, 또래에 대한 소속감, 범죄, 마약, 진로,
청년기 : 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며, 부부간, 부모 자식간 긴장, 직장의 선택, 적응, 스트레스, 분열된 가정,
중년기 : 자녀 입시, 출세, 자녀 독립, 삶의 의미, 실업의 두려움.
노년기 : 죽음, 질병, 마지막에 대한 준비, 외로움.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 위기를 어떻게 잘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한두번 잘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매번 위기는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고, 건전한 판단력만이 이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평강교회 교인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평강교회를 한 10년간 지켰으면 그것만 가지고도 위대하다고 말입니다. 제가 이 교회에 오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들도 있고, 이 교회에 와서 한숨섞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교회 교인들이 겪었던 아픔을 생각해 봅니다. 사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축소판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가는 하나님나라의 기쁨을 조금씩 맛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셨습니다. 지고의 기쁨을 누리고 하늘나라를 사모하면서 살도록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피흘려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정말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서로 격려하며, 신바람나고, 즐겁고, 예수님 만나는 벅참이 있어야 합니다. 한주동안 세상에서 얻은 스트레스 다 극복하고, 새 힘을 얻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들이 이런 기쁨보다는 성도들에게 걱정과 근심거리를 안겨 주고 있습니다.

교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것, 이를테면, 하나님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기쁨을 느끼고, 서로서로 세워주고, 양보해야한다는 것을 잃어버리면, 그 다음순간부터 교회는 더 악한 전쟁터로 변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곳에 인간의 자랑과 교만이 판을 치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를 잃어버린 곳에 더러운 인간의 죄악이 조금의 창피함도 없이 쌓여서 구역질나게 하고,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 보게 됩니다. 부활의 능력을 통한 기쁨을 잃어버린 곳에, 온갖 걱정과 근심이 가득하고, 수심에 가득 차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이 있습니다. 섬김을 잃어버린 곳에, 서로 잘났다고 주장하고, 남의 꼴 보기 싫다고 외면하고, 자기 이익만 계산하여 지독한 개인주의자들만 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수 있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 치열한 전투장에서 무기도 없이 넘어지고, 쓰러지고, 아픔을 겪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것입니까? 나 자신이 아닙니까? 우리에게 애통하는 회개가 있었습니까? 형제가 넘어지고, 사람들이 떠나가도,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대로 살려고 했습니까? 아니면 인간적인 생각대로 살았습니까? 기쁨과 감격을 잃지 않으려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했습니까? 서로 섬기려고 노력했습니까? 이 모든 어려움들을 거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피해를 끼친 인간들에 대한 분노입니까? 건드리면 넘어질 것같은 연약함속에서도 견디는 오기입니까? 만약 이것뿐이라면 남은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치른 이 뼈아픈 과거는 우리들의 신앙을 위한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는 새로 시작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그늘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새로 출발할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우십니다.

둘째, 이러한 위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약속을 하십니까?

저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천인이 네곁에,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라.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딫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호하십니까? 하나님은 성도들을 직접 관리하십니다. 한때 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한때 부도 기업을 인수하여 잘 성장 시키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부도 기업을 인수하던지, 아니면 상황이 어려운 공장을 맡으면 김우중 회장이 직접 공장을 챙긴다고 합니다. 그 공장에서 밤낮을 살면서, 근로자와 함께 맞서서 노력한 결과 그 공장을 일어서게 합니다. 회장이 관심을 가지고 가장 어려운 공장을 직접 챙기는 이 마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곁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우리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하시고, 필요하면 더 많은 부로서 어떤 알들을 하게 하십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하시고,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주십니다. 필요한대로 알맞게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시기를 말하라고 하면 대학교 3학년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 학생회 임원으로, 민주화를 위해 뛰고, 교회 청년회 회장으로 뛰고, 기독학생회 총무로 힘겹게 뛰던 그 때의 목표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뛰고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거의 12시가 될 때였습니다. 하루 종일 열심히 뛰기는 했지만 나는 해답을 찾지 못하고 나의 인격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나갔기에 가까운 교회당 안에 들어가 기도하는데 기도가 아니라 울부짖는 탄식이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살아 계십니까? 그래도 해답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다가 친구들이 저보고 혼자 일한다고 핀잔을 주고 비난을 듣던 어느날, 저에게는 신앙을 지탱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친구의 핀잔을 듣고,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무슨 전생의 죄를 져서 교회 일을 위해 봉사하고, 욕은 욕대로 먹고, 아마 진리라는 것은 그저 그런 것인가보다. 나도 이제 체념하는 법을 배우고 신앙을 포기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결심하는 나 자신을 돌이켜 보니 한번 무너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같기에 그 자리에서 다시 통곡을 했습니다.

청년회장 사표를 들고 버스를 타고 한 선배의 집에 가기까지 한없이 울었습니다. 울고 또 우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위로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내가 다 안다. 내가 다 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니? 하나님의 위로가 들려왔습니다. 선배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은 것은 그 눈물은 어떤 특정한 자를 향한 증오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서로가 더 잘해보려고 하다가 부딛힌 것입니다. 그 파란 만장한 대학 3학년, 1년간은 몇년동안 닥칠 수 있는 어려움들이 닥쳐왔지만 인내로 승리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동안 나의 신앙은 꽤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것이 값어치 있으면서도 아슬아슬하다는 것은 정말 내가 온전히 신앙을 가질 수 있을 까,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간이 저의 인생에 있어서는 가장 값진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일들을 통해 단련하시고, 필요할 때 위로하시고,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끝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우리보다 더 멀리 내다 보십니다. 지금은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미래의 보금 자리를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계시록 21:3-4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거시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

그분의 위로를 믿으십시요. 눈물많이 흘린 사람들이 있습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는 약속을 믿으십시요. 애통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위로하시고, 애통을 없애시는 약속을 믿으십시요. 이제 다 지나갑니다. 우리에게 더 없는 기쁨만이 있을 그날이 올 것입니다.

셋째, 여호와의 그늘을 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보호는 부적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하나님은 보호하십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에 거하리로다.
저가 나를 사랑하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며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그러나 전심으로 찾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도우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 누가복음에 보면, 세번째로 도전한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인간의 욕심에 직접 호소하여 시험을 했습니다. 빵이 돌로 되게하라 하니 사람이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으로 이기셨고,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권세를 주신다는 시험 앞에서 제 일계명, 즉, 하나님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다시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그때 사탄은 이 말씀으로 시험했습니다. 봐라, 네가 이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천사가 와서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하고 도전하십니다. 말씀으로 공격하시면 우리가 어떻게 분별합니까? 오늘날 말씀을 가지고 이단들이 생겨 나는데, 말씀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찾다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천사를 통해서 지키시겠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세상의 우상이 되기 위해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긍휼을 간구하면서 우리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되시고, 끝까지 나를 지키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인내로 서는 것,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신실함과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만나는 대표적인 예가 요셉의 경우입니다. 인생의 초반기에는 정말 요셉은 인생이 잘 안 풀렸습니다. 형들에 의해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고, 보디발의 아내에 위해 고소당하고, 감옥에 끌려가기까지 역경 속에서 요셉을 끝까지 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 하며 인내로 기다렸습니다. 참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더니 마침내 총리가 되고, 모든 가족들을 기아에서 구하는 역사를 담당했습니다. 요셉은 형들 앞에서 이 신앙경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 하셨나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섭리 신앙입니다. 이 영광된 미래는 요셉의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가운데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기에 그분을 의지하고 견디고 마침내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바라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넘어져서 신앙을 포기하던지, 아니면 오기로 이기려고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는 사람은 고난가운데 즐거움이 있습니다. 꼭 미래의 승리가 있어야 기쁨이 아닙니다. 이 고난가운데 생명이 다한다해도 주님이 함께 계시니 기꺼이 맞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오기만 남았다면 그 마음속에 상처만 남고, 복수하고 싶은 생각만 들고, 기회만 있으면 신앙생활의 짐을 벗어 버리려고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고난의 과정에서 나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으로 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의 중심을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있습니다. 나의 은밀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늘을 주시고, 마지막 날의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나와의 통하는 이 중심이 소망을 갖게 합니다. 은밀하게 나의 기도, 찬양, 봉사를 드리십시요.

위기를 당할 때 극단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쉽습니다. 분노해서 누구랑 다시는 말을 하지 않겠다. 교회를 당장 그만 두겠다. 또는 다시는 누구를 만나지 않겠다. 자신의 성질대로 처리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택하는 것 그것이 어렵습니다.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아시지 않습니까?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 마음을 알지 않습니까? 자기가 무고하다고 논쟁하고,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신실함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분이 끝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동안 교회의 어려움 앞에서 실망하고, 인간의 죄악에 아파하고, 애통하던 우리들입니다. 이 모든 것을 견딘 나에게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실망하고, 죄악에 찌든 상처받은 마음입니까? 대가 없는 현실때문에 지나간 세월을 탄식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바로 거기에 우리의 믿음을 담아야 합니다. 참다운 신앙인으로 다시 서야 합니다.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신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논쟁에서 승리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을 향해 "주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나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오니 저를 지켜 주옵소서!" 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한을 토로하거나, 다툴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사랑을, 우리의 찬양을, 우리의 애통함을, 우리의 역설적인 믿음을 드려야 할 때입니다. 나의 중심을 주님께 드린 후에 인내로 그분의 긍휼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하여 그 위로의 약속을 기다리십시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아래 거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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