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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았으면 증언하라 (요일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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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는 편지 성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한이 쓴 첫 번째 편지 성경입니다. 
그런데 다른 편지 성경들과는 다르게 시작됩니다.
다른 편지 성경들은 거의 대부분이 ‘나 아무개는 누구에게 문안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에게 있기 바랍니다.’ 이렇게 시작하는데 오늘 본문은 보세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강한 어조로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붓을 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1절에 나오는  “생명의 말씀”  2절에 나오는 “생명,” 한 걸음 더 나가서 “영원한 생명,”  “아버지” 다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3절에 나오는 “사귐”이라는 말, 코이노니아. 이것도 중요한 말입니다.
3절 끝에 나오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가장 중요한 말이지요.

2절에 나오는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는 말도 중요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원문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주어는 “우리가”입니다.
술어는 “전한다.”입니다.
“증언하여”라는 말은 전한다는 말을 뒷받침하는 말이기도 하고 반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전한다.’라는 말을 ‘우리가 증언한다.’ 이렇게 해도 좋습니다.

오늘은 이 “증언하여” “전하노니”라는 말을 중심으로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세계 교회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1738년 5월 24일, 그 분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체험을 합니다. 회심을 한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그 날 일기의 앞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마음이 대단히 내키지 않았으나  올더스게이트에 있는 한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 전쯤 그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자의 마음에 일으키는 변화를 읽는 부분을 읽을 때 나는 마음이 이상스럽게도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가 내 죄, 나 자신의 죄를 모두 가져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내게 주셨다.
그 후에 나는 나를 모욕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내가 새로이 얻은 내심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증거하였다.

이것은 웨슬리 목사님의 후예들, 웨슬리안들은 자주 듣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말, ‘그리스도만을 나의 구주로 신뢰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말,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나를 모욕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했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회심을 했으면 무엇인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도 변화가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밖으로 나타나야합니다.
‘나는 나를 모욕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했다‘는 것은 웨슬리 목사님에게  나타난 변화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가 회심을 하고나서도 자기를 모욕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을 계속 미워하고 그들을 저주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참된 회심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 다음에 ‘그리고 나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내가 새로이 얻은 내심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증거하였다.’ 이 말도 참 중요합니다.
체험했으면 여러분, 증거해야 합니다. 전해야 합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증거했고, 계속해서 힘써 증거했습니다.
그 증거의 열매가 바로 웨슬리의 후예들, 웨슬리안들입니다.
웨슬리안이라고 하면 감리교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아닙니다.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나사렛, 다 웨슬리안들입니다.
지난 주간의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24일에서 27일까지 이 교파에 속한 분들이 연합하여 웨슬리안 세계지도자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대회는 신촌성결교회에서 열렸는데 구세군에 속한 분들이 제일 열심히 참석했다고 합니다.
만일 웨슬리 목사님이 회심의 체험을 공개적으로 증거하지 않았다면 그의 회심은 웨슬리 목사님 개인의 체험에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두 주일 전 낮설교에서 참된 부흥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일이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한 학자가 교회의 역사에는 참된 부흥과 그렇지 않은 부흥이 있다는 글을 썼는데, 참된 부흥에는 참된 회개, 삶의 개혁, 주님과 이웃과 원수에 대한 참된 사랑, 구령의 열정, 불신자들의 회심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고 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은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왜 증언하여 전하고 있습니까?

먼저 본능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들었고, 자세히 보았고, 손으로 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들었으면 전하고 싶어 합니다.
‘아이쿠, 누가 그러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네…’ 신이 나서 전합니다.
거기에 자기의 상상을 덧붙이고 부풀려서 전합니다.
전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갑니다.

보았으면 더 그렇습니다.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생긴 것을 본 복두(幞頭), 관 만드는 사람은 그것을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참다못해 대나무 밭에 가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실컷 외쳤습니다.

만졌으면 더 그렇습니다.
‘내가 그거 만졌는데 그 감촉이 이렇더라!’ 신이 나서 전합니다.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1960년에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4․19혁명 뒤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단히 뜨겁게 이 분을 환영했습니다.
그 때 친구 하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악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가 덕수궁 부근 환영인파 가운데 서 있었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무개차를 타고 손을 흔들면서 지나가더랍니다. 무심코 손을 내밀었는데 대통령이 그 손을 잡더랍니다.
이 친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놀라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해서 그 손을 놓지 않고 무개차를 따라갔는데 경비하던 경찰관이 당황해서 뒤에서 곤봉으로 등을 내리치는 바람에 손을 놓았다고 합니다.
그 친구 며칠 동안 그 손을 씻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그 손을 내밀어 보이면서 ‘이 손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악수한 손이다.’고 했습니다.
하도 여러 번 말해서, ‘알았어! 그만 좀 해!’라고 해도 말하고 또 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았습니다.
말씀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인 것 같지만 여기에서 생명의 말씀은 로고스로서 예수님을 말합니다.
2절에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손으로 만졌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것은 도마가 손가락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옆구리, 창에 찔린 자국을 만진 것을(요20: 27) 말하는 것입니다.
또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과 피부 접촉, 요즘 말로 하면 스킨십을 자주 가겼을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의지해서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까” 물은 일도 있습니다.(요21: 20)

그러니까 사도 요한은 그것을 증언하여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보고 또 보고, 손으로 만진 것,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구원 사건, 이것을 증언하여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본능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의지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이 때문에 이것을 힘써 증언하여 전한다’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증언하여 전하는 목적은 이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3절을 「공동번역 성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증언하여 전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과 누리고 있는 교제, 내가 예수님과 나누고 있는 교제, 이것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나누도록 하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과 누리고 있는 교제, 예수님과 나누고 있는 교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니까 이렇게 좋습니다!’ 증언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우리와 같이 부족한 존재들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이것부터 증언하여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했는데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the Communion of Saint)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세상 친목회의 교제와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의 교제는 먹고, 마시고, 함께 어디 가고, 찜질방 가고, 이런 것이 중요한 내용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세상의 교제를 너무 닮아 가는 일도 있는데 그러면 곤란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렇습디다.’ 이런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세상의 친목단체는 회원을 늘이기 위해 힘쓰면서 성도의 교제를 확대하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신학자 불트만은 ‘교회는 코이노니아(교제)의 선포에 의해 생성되는 공통된 신앙 안에서의 합일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성경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생명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기 바랍니다.
어느 분이 성경을 열심히 읽으니까 성경의 활자들이 일어나서 자기 눈앞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이 느껴지더랍니다. 
예수님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 예수님이 나를 만져주시는 느낌을 갖는데 까지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성도가 깊은 병에 걸렸습니다. 이 성도는 이 병을 고쳐 달라고 주님께 긴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병을 고쳐주시면 저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서원을 했습니다.
어느 날,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자기의 아픈 곳을 만져주는 환상을 보았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 성도는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힘 있게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보는 데에 이르기 바랍니다.
귀의 신앙에서 눈의 신앙이 되기 바랍니다.
자세히 보는 데까지 이르기 바랍니다.
‘보고 또 보고’라는 드라마가 있었지요?
생명의 말씀은 보고 또 보고,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듣고, 보고, 자세히 보았으면 손으로 만지는 데까지 이르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눅24: 38~39a)

하셨습니다.
“또 나를 만져보라”는 감촉을 통해, 감각을 통해, 실증적인 신앙, 확고한 신앙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귀의 신앙에서 눈의 신앙을 거쳐 손의 신앙, 감촉적인 신앙을 갖는 데에 이르기 바랍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것은 내가 증언하여 전하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구체적 실체라는 뜻입니다.
성육신 사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같이 잡수시고 슬픈 일을 같이 슬퍼하고, 기쁜 일을 같이 기뻐하고, 어려운 일을 만난 사람을 위로하고, 같이 고통 받고, 우리      보다 더 큰 고통을 받으신 생생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내가 듣고 보고 만지는 생명의 말씀이 신화나 전설처럼 신비로운 형태로 또는 환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로 살아계셔서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 구체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생생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서 주석가는 오늘 본문을 ‘황홀경의 필치로 묘사한 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들은 것, 본 것, 만진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면서 내가 듣고, 보고, 체험한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일입니다. 
남자들, 군대 이야기, 얼마나 신이 나서 합니까?
환갑 넘은 사람들도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릅니다.
요즘 저희 교회는 결혼식이 참 많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주례를 서게 된 예비 신랑과 신부가 찾아오면 결혼예배 순서에 대해서 의논하고,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제주도로 간다고 하면 제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뭐라고 하는지 여기 들은 사람도 여럿인데 대답해 보세요.
‘응, 제주도, 좋은 곳이지…’ 그 다음에 제가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나는 군대생활을 제주도에서 했어!’
제주도 모슬포라는 곳에서 군대생활 한 것이 40년 전 일인데 저절로 그렇게 나옵니다.

한번은 어느 연세 많은 초신자를  심방했는데 이 분이 본래 말이 적은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나 교회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대화가 잘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답답하지요. 심방 온 목적을 잘 이룰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군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말문을 열더군요.
대화가 잘 진행되고 그 대화를 신앙적인 내용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군대 체험은 그렇게 신이 나서 이야기 하면서 신앙체험을 증언하여 전하지 않는다면 신앙체험이 군대체험보다 못하다는 뜻이 됩니다. 보통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증언하여 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을 증언하여 전해야 합니까?
주님의 이름을 증언하여 전해야 합니다.
시편  22편 22절을 보세요.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자주 씁니다.
본문 가운데에도 3절 끝에도 이 이름이 나옵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예수 그리스도, 이 이름은 사실은 신앙고백적인 이름입니다.
예수는 개인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는 직책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관지 담임목사’에서 유관지는 저의 개인 이름이고, 담임목사는 직책이름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메시아,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다’ 하는 고백이 거기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온 땅에 퍼지도록 힘써 증언하여 전하시기 바랍니다.
전도할 때 상대방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나오게 하세요.
알고 했든지, 모르고 했든지,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증언하여 전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여 전해야합니다.
증언하여 전하는 일에 완벽한 모범을 보인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구원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은혜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증언하여 전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여 전해야합니다.

지난 주일 낮예배 설교에서 우리 교회 기도탑에 있는 열두 종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열두 종은 열두 제자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에수님의 처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불행한 일로 빠졌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제자들은 이 빠진 제자를 보충하려고 했습니다. 왜 보충하려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1장 21절과 22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연설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을 증언하여 전하기 위해서 제자를 보충해서 세웠습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에 올 때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종탑의 종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 ‘나도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하나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여 전하라고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증언하여 전해야 합니까?
주님의 공의를 전해야합니다.
시편 71편 15절과 16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

이 세상에는 공의롭지 못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공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법관들도 그렇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공의로운 분입니다’ ‘주님께는 완전한 공의가 있습니다.’ 힘써 증언하여 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이 의의 면류관을 내게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여 의로우신 재판장인 주님이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게 증언하여 전해야합니까?
성경은 여기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62장 6절은 우리를 보고 파수꾼이 되어 주야로 잠잠하지 말고 쉬지 말고 전해서 여호와를 기억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8장 9절은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전하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은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전하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2절은 자기가 본 것을 다 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은 부득불, 어쩔 수 없이 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속히 증언하여 전해야 하는 일에 대해 잠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속히 증언하여 전해야 합니다.
말라기서 3장 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다른 일들은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전하세요.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여 전하는 일은 속히 하시기 바랍니다.
속히 할 것은 더디 하거나 아예 하지 않고, 좀 더디 해도 좋은 것은 속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세요.
한 번 말씀드린 일이 있는데 뛰어난 과학자이고 신앙인인 정근모 장로님, 지금 명지대학 총장으로 계시는 이 분에게 평생 후회가 되는 일이 있습니다.
정근모 장로님에게 절친한 친구인 김재익이라는 고등학교 동창이 있었습니다.
김재익 씨는 5공화국 시절에 대통령의 경제담당 수석비서관이었습니다.
이 친구에게 꼭 전도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만나자고 했습니다.  친구는 대통령을 모시고 동남아를 순방해야 하는데 그 준비에 바쁘니 다녀와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마침 정근모 장로님도 상해에 출장을 가게 되어 있어서 그러자고, 피차 다녀와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길에서 미얀마 아웅산 사건이 터져 김재익 비서관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상해에서 그 소식을 듣고 정근모 장로님은 마음을 찢으며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울고 또 울었으나 조금도 자책감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정근모 장로님이 쓴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이 이야기가 적힌 곳의 제목이 ‘아, 아웅산, 아, 김재익!’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그에게 복음을 속히 증언하여 전하지 않은 일이 얼마나 후회스러우면 제목을 그렇게 정했겠습니까?

웨슬리 목사님은 회심을 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마음으로 느낀 것을 공개적으로 증언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 마치시고 나가시다가 만나는 사람에게 증언하여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단어에 대해 살피고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는 1절에 있는 “태초부터 있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태초에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에 있었던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있는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증언하여 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우리”라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1절, “우리가 들은 바요”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절,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여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4절,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 풍년입니다.
‘나’라는 말을 많이 쓰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좀 위험한 사람이고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이 우리에 여러분과 저도 들어가야 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여러분도 저도 ‘나는 생명의 말씀을 들었노라, 보았노라, 만졌노라’ 하게 되기 바랍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2절 중)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3절 중)

여러분과 저도 증언하여 전하는 일에 힘쓰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과 웨슬리 회심의 체험을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시동을 걸고 엔진소리를 듣습니다. 앞에 사람이 없나 살핍니다.
손으로 기어를 잡아 변속을 합니다.
운전에 대해 말할 때 시동 걸고 바로 나가지 말고 엔진이 더워진 다음에 나가라고 하지요. 웨슬리 목사님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증언하여 전하는 일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차가 앞으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아까 ‘나는 생명의 말씀을 들었노라, 보았노라, 만졌노라’ 했는데 여기에 ‘증언하여 전했노라’가 빠지면 겁이 나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부릉부릉, 공회전만 하고 있는 사람, 소음공해, 환경공해만 일으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운전하는 사람은 차가 힘 있게 앞으로 나가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힘써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증언하여 전하시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4절을 보세요.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쓰는 것도 증언하여 전하는 일 가운데 하나인데 그와 같이할 때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전도하면 기쁘지 않습니까?
증언하여 전하기에 힘써 충만한 기쁨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관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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